미국 흑인 사회는 왜 샌더스를
지지하지 않았을까
정은희 기자
미국 남부 끝단 흑인 이발소. 무하마드 알리, 짐 브라운, 제리 라이스 같은 흑인 영웅의 초상화가 걸렸다. 이발사는 고객의 얼굴을 면도하거나 머리를 만지며 수다를 떤다. 자연스럽게 대화는 각 정당 대선 경선으로 이어진다. “누구를 지지하나요?”라고 묻는 질문에 버니 샌더스란 이름은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세계를 놀라게 한 억만 장자에 맞선 정치 혁명. 민주적 사회주의자 버니 샌더스는 민주당 경선 초반 아이오와와 뉴햄프셔 경선을 강타하며 세계를 긴장시켰다. 민주당원들이 샌더스 돌풍에 응답하자 설마 하던 이들도 감탄을 연발했다. 하지만 힐러리 클린턴은 2월 말 사우스캐롤라이나 경선을 시작으로 샌더스를 빠르게 따돌렸다.
클린턴의 선전은 흑인 유권자의 ‘방화벽’ 덕분이다. 사우스캐롤라이나 흑인 유권자 10명 중 8명이 클린턴을 뽑았다. 텍사스, 루이지애나, 미시시피, 앨라배마, 조지아 등 흑인 유권자가 다수인 남부 주 모두 클린턴에 몰표를 줬다.
미국 흑인 유권자는 왜 클린턴을 지지했을까? 샌더스는 경제 불평등 해결을 위해 정치 혁명을 말한다. 흑백 간 소득 격차 등 경제 불평등으로 고통받는 다수는 백인이 아닌 흑인 등 소수 인종이다. 정책만 보면 흑인 유권자가 샌더스를 지지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샌더스의 대표 공약인 임금 평등, 시간당 최저임금 15달러, 대학 등록금 무상화 등도 대체로 저임금 노동 시장에서 일하는 흑인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샌더스는 백인 노동자층 지지를 끌어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흑인에게서는 실패했다.
흑인 민주당원이 샌더스가 아닌 클린턴을 지지하는 주요 이유는 그를 버락 오바마의 계승자라고 보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 지적대로, 흑인 유권자는 오바마의 승리를 민권 운동의 성과로 평가한다. 갤럽 조사에 따르면, 2009~2014년 사이 오바마에 대한 평균 지지율은 58%에서 42%까지 떨어진 반면, 흑인 계층은 84% 이상을 유지했다. 클린턴은 오바마의 정책을 옹호하고 동일시하며 그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정치 혁명을 외친 샌더스의 구호도 작동하기 어려웠다. 샌더스의 정치 혁명을 위해선 민주당도 바꿔야 한다. 그리고 그 화살은 민주당의 적자 클린턴을 향한다. 백인 청년과 실업자, 노동자 계급은 이 화살에 응답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오바마를 지지하는 흑인 유권자에게는 잘못된 해법이었다. 흑인 유권자 다수에게 문제는 오바마가 아니라 백인 주류의 공화당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들은 공화당에 맞서 오바마 정책을 계승할 더 강한 민주당을 원한다. 샌더스의 도전은 아이러니하게도 경제 불평등의 최대 희생자인 흑인 유권자의 방어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흑백 간 다양한 경제적 차이를 간과한 샌더스의 공약도 엇박자를 냈다. 상대적으로 실업 인구가 많은 흑인 가구는 오바마 정부 뒤 실업률이 줄어들어 경제 여건이 크게 좋아지지 않았더라도 살기가 더 나아졌다고 봤다. 불평등 이야기는 일자리 여부보단 소득이 중요한 백인 노동자 계급에게는 설득력이 있었지만 흑인 가구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오바마케어도 백인 노동자 계급은 더 많은 비용을 냈지만 가난한 흑인 가구는 비교적 더 많은 혜택을 받았다.
뿌리 깊은 흑인 사회와 민주당과의 관계
오바마 집권 뒤 민주당에 대한 흑인 사회의 지지가 강해지긴 했지만 민주당은 애초 흑인 유권자의 대표 정당임을 자임해 왔다. 흑인 유권자는 뉴딜과 민권 운동을 거치며 역사적으로 민주당의 주요 지지층이었다. 하지만 주류 정치는 여전히 흑인을 소외시켰다. 공화당은 이들을 무시했고 민주당도 거리를 뒀다. 1992년 대선에 출마한 빌 클린턴이 반대 전략을 취하면서 민주당과 흑인 사회와의 관계는 더욱 단단해진다. 그는 남부 아칸소 주 가난한 동네에서 보낸 어린 시절을 말하며 흑인 유권자의 성장 과정과 다름없음을 강조했다. 당시 흑인 교회 네트워크부터 시민운동 단체까지 흑인 사회는 다양하게 조직화됐다. 성과는 곧 나타났다. 흑인 유권자는 클린턴이 남부 프라이머리에서 우승할 수 있도록 지지했고 승세는 대선까지 지속됐다. 하지만 빌 클린턴은 당선 후 흑인 유권자와는 동떨어진 행보를 걸었다. 그는 1994년 형법을 개정해 역사상 가장 많은 흑인을 투옥했다. 같은 해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통과시켜 흑인 가구가 다수인 저임금 노동 인구에 가장 많은 타격을 입히기도 했다. 그는 또 공화당이 낸 복지 삭감 개혁안도 받아들였다. 글라스 스티걸법(Glass-Steagall Act)1)을 개정해 모기지 위기를 악화시키고 흑인 가구에 심각한 영향도 남겼다.
“빌은 남부 사람이고, 부친은 알콜 중독자였어요. 우리처럼 바비큐와 프라이드치킨도 먹죠. 선글라스를 끼고 섹소폰을 불잖아요. 우리는 그를 첫 번째 흑인 대통령이라고 생각해요.” – 이발소 주인 키스 아모스
그럼에도 민주당을 향한 흑인 유권자의 표심은 변하지 않았다. 이들은 2008년 민주당 경선에서도 확고히 클린턴을 지지했다. 남편 클린턴의 성추문 뒤 흑인 여성 유권자는 힐러리 클린턴을 더욱 지지했다. 오바마가 선전하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 경향이 변한 건 아이오와 코커스였다. 많은 유권자는 오바마를 향한 힐러리의 경박한 비판에 분노했다. 클린턴은 민주당 최후 경선에서 흑인 유권자 표의 22%만 얻었다. 그러나 이제 클린턴은 오바마의 정책을 계승하는 민주당 적임자로 나서며 민주당 흑인 공직자, 노조, 활동가 그룹과 성직자의 지지를 받고 있다.
“계급이나 불평등이란 말로는 모자라요”
버니 샌더스는 계급 문제를 대중 이슈로 부상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소수 인종에 대한 그의 노력은 부족했다는 지적을 받는다. <가디언>에 따르면, 샌더스가 흑인 유권자에 대한 전략을 진지하게 생각한 것은 지난해 8월부터였다. 당시 ‘흑인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활동가 3명은 백인 경찰에 살해된 마이클 브라운 사망 1주년을 계기로 샌더스 연설을 가로막고 발언했고 샌더스는 집회가 끝난 뒤 유감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샌더스에게 이런 갈등은 처음이 아니었다. 이전에도 샌더스는 “흑인, 백인, 히스패닉 모두의 생명이 중요하다”라는 말을 해 비판을 받았다. 샌더스는 인종 간 차이보다는 계급적 동질성을 강조하려고 이 말을 했다. 하지만 경찰에 의한 흑백 간 사망자 격차가 크고 무고한 흑인의 죽음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흑인 사회는 이 말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흑인 생명은 소중하다’ 운동은 이번 선거에서 어느 후보도 지지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채택했다.
흑인만이 아니라 히스패닉, 여성 유권자도 클린턴에 더 우호적이다. 계급보다는 인종 차별이나 성차별의 문제를 우선하고 공화당에 그 책임을 묻는 민주당의 전략이 통한 셈이다. 하지만 흑인 사회가 민주당을 일률적으로 지지한 것은 아니다. 미국 중부 러스트벨트 지역 흑인 대의원들은 민주당을 상당히 이탈했다. 비무장한 채 길을 걷고 있던 18세 마이클 브라운이 백인 경찰에 의해 살해됐던 미주리 주 퍼거슨, 장난감 총을 갖고 있던 13세 타미르 라이스를 사살한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 파산한 디트로이트와 플린트 수돗물 오염 사태가 일어난 미시건 주가 그렇다.
실제 샌더스는 남부 지방에선 흑인 대의원에게 약 15%의 표를 받았지만 미시건에서 이 표는 약 30%로 늘어났다. 흑인 주민 운동은 개별 사건만이 아니라 흑인 사회가 겪어 온 폭력이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어떻게 구조화됐는지 주목했다. 또 기성 정당에 맞선 다양한 시위가 조직됐다. 러스트벨트의 많은 흑인 인권 활동가들은 샌더스 선거 운동을 지지한다. 대표적으로 에리카 가너는 <워싱턴포스트>에 샌더스 지지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그는 2014년 불법으로 담배를 판다는 혐의로 뉴욕 시 경찰에 살해된 에릭 가너의 큰딸이다. 에리카는 아버지의 죽음 뒤 흑인 인권 활동가가 됐다. 그는 기고문에서 “우리의 삶이 정말 중요하다면, 우리는 좋은 일자리에서 일하고, 좋은 학교에서 배우며 알맞은 집에서 동등하게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왜 우리 모두를 패배하게 하는 이 체제를 지지해야 합니까?”라고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