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를 뿌린 자 분노를 거둘 것이다”
정은희 기자
“잊을 수가 없어요. 나는 지난 대선 때 사회주의자를 찍었습니다. 올랑드는 우리를 속였어요. 그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밀어붙이고 수십억 유로를 삭감해 기업에다 바쳤죠. 그는 노동법 개악을 위해 테러의 공포를 이용하고 있어요. 그러나 우리는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겁니다.”
메가폰에서는 계급 전투라는 말이 흘러나온다. “위기를 뿌린 자는 분노를 거둘 것이다”라고 한 여학생이 소리친다. 지난 9일 프랑스 전역 200여 곳에서 약 50만 명이 프랑수아 올랑드 사회당 정부가 최근 발표한 노동 개악안에 맞서 거리를 메웠다. 프랑스 양대 노총인 프랑스 노동총동맹(CGT)과 노동자의 힘(FO)을 포함해 다수의 노총이 주도한 이날 시위에는 수많은 학생, 청년, 정치 단체들이 가세했다. 참가자의 상당수는 파업을 병행했다. 프랑스 국영철도(SNCF) 등 철도 노조도 이날 노동 조건 개선 등을 요구하면서 파업을 벌여 3분의 1 이상의 철도가 마비됐다. 여러 좌파 정치 단체뿐 아니라 사회당 정치인도 일부 시위에 동참했다. 주 35시간 노동제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마르틴 오브리 전 사회당 당수도 시위에 합류했다.
가장 큰 목소리는 10대와 20대에게서 나왔다. 이들만 10만 명이 넘었다. 프랑스 교육부는 전국에서 중등학교 90개가 수업을 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이들 일부는 시위 중 계란을 던지거나 폭죽을 터트리며 정부에 항의했다. 올랑드 대통령 집권 뒤 노동자, 청년, 청소년이 이렇게 큰 규모로 연대한 시위는 이번이 처음이다. 결국 정부는 의회 제출 기한을 2주 연기하겠다고 일단 수습했다.
해고는 쉽게 노동 시간은 길게
노동부 장관의 이름을 따 ‘엘 코므리 법’이라고 불리는 정부의 노동 개악안은 해고를 쉽게 하면 고용을 늘릴 수 있다는 논리로 제출됐다. 개악안이 통과되면 회사가 손실을 겪거나 구조조정이 필요할 때 해고가 쉬워진다. 모회사가 튼실하더라도 자회사가 임의로 해고할 수 있다.
또 노사 협약을 법보다 우선해 기업별 투표로 프랑스 법정 노동 시간인 주 35시간을 초과할 수 있다.
예외적이긴 하지만 주당 60시간도 가능하다. 기업은 회사 확장이나 위기 시에 노동 시간 연장에 불응하는 노동자를 해고할 수도 있다. 초과 근무 수당도 산별 협약보다 낮게 책정할 수 있고 10% 하한선도 폐지된다. 1일 11시간 연속 휴무를 강제하는 조항은 이틀에 11시간으로 축소된다. 또 부당 해고에 대한 보상금 상한제도 도입된다. 올랑드 정부는 이번 개악안을 통해 기업 경제 전망을 안정화하고 정규 고용을 늘릴 수 있다며 “기업이 더 많이 채용해 젊은이들에게 더 안정된 일자리를 제공해야 한다”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시각은 다르다. 기업이 더 많은 노동자를 쉽게 해고할 것이며 고용보다는 이윤 극대화에 집중할 것으로 본다. 또 고용을 불안하게 하며 불법 노동과 저임금을 상시화해 노동권을 박탈할 것이라고 반발한다. 청년들의 저항은 더욱 거세다. 국민의 50%가 이 개악안에 반대하고 청년층의 반대는 70%가 넘는다. 시위에 참가한 20세 플로라는 “나는 많은 학생들처럼 공부하기 위해 일을 해야 해요. 이 법이 통과된다면 노동 시간은 늘어날 것입니다. 그러면 공부할 시간이 어디 있겠어요? 지금도 35시간만 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얼마나 더 오래 일해야 할까요?”라고 했다.
2000년에 도입된 임금 삭감 없는 주 35시간 노동제는 프랑스 노동자들의 중요한 성과였다. 당시 우파 자크 시라크 대통령과 ‘동거 정부’를 구성했던 사회당의 리오넬 죠스펭 총리가 마르틴 오브리 당시 노동 장관의 발의로 추진했다. 그러나 2002년 총선에서 사회당이 패하자 우파 다수의 의회는 2004년 주당 최대 노동 시간(초과 노동 시간 포함)을 48시간까지 허용하는 개악안을 통과시켰다. 이번에 사회당 정부가 제출한 노동법안은 15년 전 주 35시간 노동제를 관철시켰던 사회당의 노동법을 역행하는 것이다.
애초 올랑드 대통령은 2012년 우파 사르코지에 맞서 부유세 증대, 사회 복지 확대 등 전통적인 사회당 공약을 내걸었지만 주요 공약은 수포로 돌아갔고 긴축을 단행하며 우향우 행보를 계속했다. 또 2015년 연이은 테러로 6개월째 비상사태령이 계속되며 천여 건의 기습 단속과 반 이민 정책 등으로 인권 침해 논란도 심각하다. 지지율 15%라는 최악의 상황에서 올랑드는 이제 중도층을 겨냥해 노동 개악안을 들고 나왔지만 성사될지는 미지수다. 사실 우파 사르코지 전 대통령조차 임기 중 노동 시간을 늘리겠다고 확언했었지만 결국 제출하지 못했다.
“독일 하르츠? 저질 일자리만 양산했습니다”
프랑스 정부의 노동 개악안은 유럽 경제 위기를 명분으로 휘몰아치고 있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광풍과 맞닿아 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경제산업부 장관은 변화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프랑스 밖을 보라. 유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그들은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해) 모든 것을 수행했다”고 말한다. 유사한 노동 개악을 관철시킨 마테오 렌치 이탈리아 사회당 총리는 프랑스를 향해 “변화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유럽에선 1980년대 영국, 네덜란드 등이 노동 개악에 착수한 데 이어 2000년엔 독일이 임시직 고용 증진을 위한 규제 완화를 골자로 하는 4단계 노동 시장 개혁안인 ‘하르츠’를 실시했다. 2010년대에는 경제 위기를 계기로 그리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남유럽 국가들이 잇따라 개악을 강행했다. 특히 경제 위기 뒤 독일 실업률이 줄어들면서 각국은 독일을 벤치마킹하기에 바빴다.
노동 개악과 함께 실업률이 떨어진 것은 분명하다. 독일 실업률은 2008년 7.8%에서 2015년 4.7%로, 2012년 노동 개악을 강행한 스페인은 2013년 최고 26.3%에서 2015년 22.7%로 낮아졌다. 반면 프랑스의 실업률은 같은 기간 7.1%에서 10.5%(청년 실업률 약 25%)로 올라갔다.
그러나 노동 개악은 독일의 시간당 ‘1유로 잡’이나 ‘미니 잡(한 달 450유로 미만 일자리)’처럼 저임금 비정규직 확대로 이어졌다. 때문에 실업률만 떨어졌을 뿐 결과적으로는 저질 일자리만 확대됐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유럽 통계청 유로스타트에 따르면, 독일의 전체 노동 시장에서 파트타임 일자리 규모는 1983년 12.2%였지만 노동 개악을 단행한 2000년을 고비로 19.1%로 가파르게 성장한 뒤 2014년 현재 26.5%를 차지하고 있다. 기간제, 임시직 등 다른 비정규직까지 포함하면 비정규 비율은 더욱 늘어난다. 이렇게 증가한 비정규직 규모와 함께 각국 빈곤 수치도 역시 가파르게 증가했다. <유로뉴스>에 따르면, 지난해 독일에선 인구의 14%가 넘는 약 1250만 명이 빈곤선 아래에서 살았는데, 1990년 동·서독 통일 이래로 가장 높은 수치였다. 영국에선 1986년 상위 10%가 하위 10%보다 8배 많은 소득을 얻었지만 2011년 이 격차는 10배로 늘었다. 스페인에서도 빈곤율은 2013년 27.3%에서 2014년 29.2%로 올라갔다.
노동 개악 뒤 잠시 높아졌던 경제 성장률도 최근 다시 주저앉고 있다. 영국 GDP 성장률은 1980년 -2.7%에서 2000년 3.8%로 증가했으나 2014년 2.94%로, 독일은 하르츠가 도입된 2000년엔 2.96%였지만 2014년에는 1.6%로 떨어졌다.
시위에 참가한 28세의 트록스는 “가장 큰 문제는 사업장 협약으로 노동권이 얼마나 후퇴할 것인가입니다. 독일에서처럼 임금 인상과는 상관없이 저질 일자리만 양산할 것이 분명해요”라고 단언했다. 프랑스 청년, 노동자는 17일에 이어 31일 다시 대규모 시위에 나선다. 프랑스에선 노동자, 청년이 연대할 경우 모두 정권 연장에 실패했다. 연금 개혁을 강행한 사르코지, 청년 해고를 확대하는 최초 고용 계약(CPE)을 밀어붙인 시라크 모두 재선에 성공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