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로 보는 세상
송명관 참세상연구소/ 사진 홍진훤
알파고를 당황시킨 ‘신의 한 수’
시끄러운 총선 얘기로 짜증만 가득했던 우리에게 인공 지능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대결은 신선한 충격을 줬다. 온갖 매스컴들이 인간과 기계의 세기의 대결을 강조하는 기사를 쏟아 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알파고의 연승 소식은 기계에 잠식될 미래 사회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 주기도 했다.
그런데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국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알파고의 연승이 아니었다. 이세돌이 ‘신의 한 수’로 알파고를 이겼던 4국일 것이다. 바꿔 말하면 알파고가 이세돌에게 항복했던 4국이다. 이 대국은 이세돌이 인간의 자존심을 지켜 준 사건으로 회자되어 대중을 흥분시키기도 했다. 그런데 이 대국에서 인상적이었던 또 하나의 장면은 ‘신의 한 수’ 이후 알파고가 보인 이상 행동이다. 이세돌이 던진 78번 ‘신의 한 수’ 이후, 이에 일격을 받은 알파고는 바둑 초보자가 봐도 이상한 엉뚱한 실수를 연발한다. 그래서 알파고의 이런 행동은 대국 종료 후 ‘버그’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신의 한 수’가 알파고에게 무엇이었는지 분석해 보고자 한다.
보통 바둑인들 사이에서 이세돌 9단은 불확실성을 높이는 세력 싸움을 전개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에 반해 알파고는 불확실성을 점점 줄여 가는 방식으로 대응한다. 그래서 초반 세력 싸움에선 이세돌이 앞서가더라도 중후반부로 넘어갈수록 점점 경우의 수가 줄어들기 때문에 알파고가 전세를 뒤집는 경우가 다반사였던 것이다. 특히 2국에서 초반을 리드했던 이세돌 9단이 별다른 실수를 하지 않았음에도 역전패당했는데, 이 사건은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특히 끝내기 수순에 들어가고부터 알파고는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당연히 수십만 가지 경우의 수를 동시에 계산하는 알파고의 프로그래밍 특성상 승리의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선 불확실성을 줄이도록 설계됐을 것이다.
그런데 4국에서 이세돌이 둔 78수는 알파고도 미처 계산하지 못한 묘수였고, 불확실성에 빠진 알파고는 엉뚱한 수를 연발했다. 가장 첨예하게 부딪히는 지점을 회피한 채 엉뚱한 곳에 두기 시작한 것이다. 알파고는 그것이 불확실성을 줄이는 것이라 계산했겠지만, 그건 누가 봐도 이상한 행동들이었다. 이것으로 볼 때, 78번 ‘신의 한 수’는 불안한 균형 속에서 최적의 선택지를 찾도록 설계된 알파고의 프로그래밍을 깨뜨린 ‘나비 효과’의 임계점이었던 셈이다. 영화 제목으로도 잘 알려진 이 ‘나비 효과’는 흔히들 우연으로부터 시작된 작은 사건이 확률적으로 매우 낮은 사건들의 연쇄 작용으로 인해 결국 예상하지 못한 커다란 사건으로 확대되는 것을 말할 때 자주 사용되곤 한다. 최근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시그널>에서도 주인공이 어떤 목적 때문에 과거를 바꾸지만 예상치 못한 일들이 발생해서 현재에 전혀 의도하지 결과로 드러난다. 불확실성의 증대로 인해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는 ‘나비 효과’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세계 경제 위기와 불확실성의 지속
사실 알파고를 만든 목적은 기계와 인간의 묵시록적인 대립을 암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엄청난 데이터 처리를 필요로 하는 빅데이터 분야에 인공 지능을 응용하기 위함이다. 예부터 불규칙하게 나열되어 있는 통계 자료 속에서 일정한 규칙과 패턴을 찾는 작업은 모든 행정 업무와 연구 활동의 기본이었다. 그래서 알파고를 지금의 세계 경제 위기를 관리하고 있는 중앙은행에 비유해 보고자 한다.
현재 전 세계 중앙은행들은 언제 위기로 발전할지 모를 경제 활동의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 국제 공조에 몰두하고 있다. 특히 환율 불안과 자금 유출, 신용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거시적인 금융 안정 체제를 유지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정례적으로 이뤄지는 G20 정상회의, 재무장관회의, BIS 중앙은행 총재회의 등 대부분의 국제 회의들이 세계 경제의 안정을 목적으로 열리고 있다.
이런 국제 공조 체제들은 2008년 전대미문의 세계 금융 위기를 계기로 강화되었다. 이 위기는 리만브라더스 투자 은행의 파산이 전혀 예상치 못한 사태로 전개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불과 3일 만에 전 세계 금융 시장을 마비시켰다. 금융 상품 리스크 관리 모형의 계산법에 따르면 발생 가능성이 벼락 맞을 확률보다 낮은 사건들이 연일 벌어졌던 것이다. 마치 ‘나비 효과’처럼 말이다. 그 결과 부도 가능성이 극히 낮았던 전 세계 우량 금융 상품들이 대량 부실 사태에 빠지게 되었다. 리만브라더스 파산이 세계 금융 시스템의 안정을 뒤집는 임계점이 된 셈이었다. 그리고 곧 금융 상품의 대량 부실 사태는 은행 위기로 번지기 시작했다. 이런 금융 상품을 취급하거나 보유하고 있던 은행들이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그리고 은행이 위기에 빠지자 은행을 통해 금융 거래를 하고 있었던 경제 주체들이 심각한 금융 공황에 휩싸이게 됐다. 모든 금융 거래가 전산화되어 24시간 쉼 없이 돌고 도는 현대 금융 시장에서 이런 공황은 돈을 순식간에 사라지게 만들었다. 당시 금융 위기 가능성을 부인했던 미국 재무장관은 위기가 걷잡을 수 없이 퍼지자 대형 은행들을 살리기 위해 의회에 긴급 구제 금융을 요청하면서 무릎까지 꿇었다. 결국 사태가 파국으로 치닫자 미국 중앙은행인 연준(연방준비제도)이 천문학적인 수준의 돈을 찍어 직접 구제 금융에 나서게 된다. 그리고 곧 G20 국제 공조 체제가 탄생하면서 국제적인 경제 활동의 불확실성을 줄이고 안정시키기 위한 작업들이 진행되어 지금까지 오게 된다.
이게 우리가 아는 2008년 세계 금융 위기의 과정이다. 급격한 금융 공황은 현재 소강상태에 들어가 있다. 하지만 여전히 세계 경제는 불안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금융 시장의 작은 사건만으로도 급격한 가격 변동이 벌어지는 일이 다반사이다. 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중앙은행들은 각종 통화 정책을 쏟아 내고 좌충우돌하면서 지금까지 세계 경제를 끌어 오고 있다. 특히 중앙은행이 직접 돈을 찍어 각종 금융 상품들을 사는 ‘비전통적’ 통화 정책인 양적 완화는 9년째 지속되고 있다. 임시 대책이 상시 대책으로 바뀐 셈이다. 그리고 이제는 일반인들의 상식으론 이해될 수 없는 ‘마이너스 금리’ 정책들까지 도입되고 있다. 지금까지는 중앙은행과 시중 은행 사이에서만 시행되고 있는데, 점점 논의가 확장되면서 그 폭과 깊이가 커지고 있다.
이런 상황들을 알파고 4국에 대입해 보자. 알파고의 프로그래밍을 일순간 혼란에 빠트렸던 78번 ‘신의 한 수’를 2008년 금융 위기의 첫 단추에 비유할 수 있다. 혼란에 빠진 알파고처럼 전 세계 금융 기관들은 자신의 계산 영역에서 벗어난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그리고 무기력했다. 알파고의 엉뚱한 착수처럼 중앙은행을 비롯한 금융 기관들은 허둥대기 바빴고, 시스템 전체의 위기로 사태가 전개되는 것을 손 놓고 바라봐야 했다. 결국 사태는 자신들이 설계한 기존 금융 규율들을 허물고 나서야 진정되었다. 모두 알다시피 중앙은행의 ‘돈 찍기 신공’이었다. 마치 알파고가 바둑 게임의 규칙을 무시하고 한 번에 몇 수를 동시에 두는 방법으로 사태를 해결한 것과 같다. 현실은 게임이 아니니 위기 상황에서 규칙을 무시하는 게 별 문제가 될 건 없다.
그렇다고 불확실성이 영원히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현실은 바둑 게임처럼 열아홉 줄 정사각형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한 평면에서 바둑을 두는 것처럼 현실의 영역은 그 성질이 계속 변하고 확장과 축소를 반복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알파고가 규칙을 무시하고 위기를 넘긴다 하더라도 바둑판의 경계는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세돌이 펼치는 불확실성 증대 전략과 계속 마주해야 한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신의 한 수’에 대응하기 위해 특단의 대책을 준비해야 한다. 마치 현재 중앙은행이 ‘비전통적’ 통화 정책을 지속하는 것처럼 말이다.
알파고 4국이 주는 교훈
알파고가 한국 사회에 일으킨 파장은 의외로 큰 것 같다. 정부에서 갑자기 한국형 알파고 연구 개발에 3조 원을 투자하겠다고 발표하고, 각 당이 총선 비례 대표 1번을 과학 기술인으로 내세우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을 이런 인기영합주의적인 행태로만 소비하기엔 아깝다. 또한 인간과 기계의 대립이라는 디스토피아적 몽상에 매몰되는 것도 적절한 대응은 아닌 것 같다. 알파고의 탄생 배경엔 불확실성을 줄이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망이 담겨 있다. 복잡한 현실이 주는 두려움 속에서 어떤 해결 방법을 찾아 현실이 직면한 위기를 극복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계(시스템)에 의한 인간의 지배가 문제가 아니라 기계(시스템)에 의존하려는 인간의 욕망이 문제이다.
그러나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 우리가 만든 그 어떤 시스템의 규칙도 그 자체로 완전할 수 없다. 규칙의 대상이 되는 현실이 계속 변하기 때문이다.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불안정한 세계 경제는 우리가 마주했던 현실이 예전과 다른 국면으로 변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런 가운데 불확실성을 줄이고자 하는 국가 기구들의 개입과 활동은 더욱 확대되고 분주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 개입과 활동은 알파고가 4국에서 직면했던 것처럼 또 다른 불확실성과 마주할 가능성을 안고 있다. 그리고 현실을 고정된 대상으로 간주하고 계산 시스템을 맹신하는 순간, 예상치 못한 ‘한 수’의 일격에 그 체계는 무너질 수 있다. 그러므로 알파고의 4국에서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기존 체제로부터 설계된 경제 이념과 규칙을 신화처럼 받아들이는 태도를 경계해야 한다는 점이다. 한때 널리 회자된 “또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라는 구호는 그냥 이상적인 말을 나열한 게 아니다. 이 세계는 변하고 있고, 우리는 또 다른 세계를 설계하고 만들어야 할 상황에 직면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