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다솔, 윤지연 기자/ 사진 홍진훤
“근로자를 비인격적으로 대우하는 갑질 사업장에 근로 감독을 실시하겠다.” 지난달 28일, 이기권 고용부 장관이 갑질 기업과 전쟁을 선포했다. 최근 기업(사주)의 노동자 폭행 및 인격 모독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까닭이다. 하지만 장관의 선전 포고에도 여론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하다. 사업주의 갑질이 어제오늘 일도 아니고, 기업 몇 군데 손본다고 달라질 것이 없다는 것을 뻔히 알기 때문일 터.
지난해 민주노총이 전국 16개 공단 미조직 노동자 1437명을 설문 조사한 결과, 40.6%가 인권 침해를 겪었다.
그중 22.1%는 폭언이나 폭행, 모욕을 당했다. 가해자는 대부분 관리자(37.9%)와 임원(26.5%)이었다.
만약 노동조합이 있다면 상황이 좀 나아질까? 안타깝지만 노조의 존재는 그것대로 또 폭력의 대상이 된다. 대개 사업주가 눈엣가시인 노조를 없애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발생한다. 계획적인 폭력인 만큼 강도가 높다. 이럴 경우, 노동자는 폭행이 아닌 테러 수준의 위협을 감수해야 한다. 막강한 자본력과 사회적 권력을 가진 회사가 못할 것은 없다. 지금부터 이어질 사건들은 과거 사업주로부터 테러를 당한 노동자의 이야기다. 폭행을 가한 사업주와, 폭행을 당한 노동자가 법 앞에 평등했던 시절이 있었을까.
사건 하나
1992년. 혼자 노동조합 대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회사의 탄압으로 다른 동료들은 모두 출마를 포기한 상황이었다. 어느 날, 노무과 직원과 구사대가 자취방에 쳐들어와 나를 야산으로 끌고 갔다. 그들은 구덩이를 파고 그 속에 나를 집어넣었다. 대의원 선거에 나가면 묻어 버리겠다고 했다. 선거에 나가지 않겠노라 애원했다. 가까스로 그곳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하지만 조합원들은 곧바로 보궐 선거를 요구했고, 나는 다시 선거에 출마하게 됐다. 선거 전날 오전 7시. 덩치 큰 괴한 두 명이 집에 들이닥쳤다. 다짜고짜 급소를 가격했고, 나는 바닥에 쓰러졌다. 살려 달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소용없었다. 그들은 허리띠로 목을 조른 채 나를 들어올렸다. 이대로 죽는구나, 하는 순간 허리띠에서 풀려났다. 그들은 죽고 싶으면 선거에 나가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두려움이 분노로 바뀌었다. 대의원이 꼭 돼야겠다는 오기가 생겨났다.
이희동 전 삼익악기노조 위원장은 회사의 탄압에 죽음의 위협을 느꼈다. 하지만 가해자들은 번번이 증거 부족을 이유로 처벌받지 않았다. 이 전 위원장은 고소 고발을 멈추지 않았고, 가해자 중 일부인 노무과 직원은 혐의가 인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전과자가 된 가해자들은 회사로 복귀해 노조 탄압에 더욱 열을 올렸다. “깡패도 그런 깡패들이 없었어요.” 그때 사건을 떠올리던 이 위원장이 내뱉은 말이다. 폭행을 행사한 노무과 직원은 훗날 이 위원장을 만나 이야기했다. “먹고살기 위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안합니다.” 하지만 이 위원장은 그 사건으로 괴로워했던 동료들 때문에 그들을 쉽게 용서할 수가 없다. 이 위원장은 1996년 삼익악기 부도 후, 건설 현장에 들어가 목수 일을 하며 살고 있다.
사건 둘
2003년, 친척 결혼식에 가기 위해 회사에 월차를 신청했다. 과장이 나를 불렀다. “네가 회사 경영하냐?” 하청 노동자가 감히 월차를 쓰느냐는 듯한 말투다. 말싸움이 났다. 과장이 나를 밀치고 목을 졸랐다. 폭행을 당한 뒤 두통이 사라지지 않았다. 조퇴 후 병원에 갔다. 의사가 입원을 권했다. 병원에 입원한 그날 밤. 과장이 남자 둘을 데리고 찾아왔다. “돈을 원해?” 과장이 말했다. 미안하다고 사과를 해도 시원찮을 판인데 황당한 소리를 한다. “당신이랑 얘기하기 싫습니다.” 대화 거부 의사를 밝혔다. “뭘 원하느냐고. 편하게 해 주면 돼?” 자꾸 쓸데없는 소리를 하기에 돌아누웠다. 그러자 “편하게 해 줄게”라며 갑자기 이불을 잡아 끌어내렸다. 그리고는 식칼로 아킬레스건을 그었다. 한 번, 그리고 두 번. 발목에서 피가 흘렀다.
현대차 아산 공장 사내 하청 노동자 송성훈 씨는 하청 업체 과장으로부터 식칼 테러를 당했다. 이 사건으로 아킬레스건 70%가 손상돼 수술을 받아야 했다. 4개월간 입원 치료, 3개월간의 물리 치료가 이어졌다. 가해자는 도망쳤다. 경찰이 수배를 내리자 다음 날 자수했다. 하지만 과장을 제외한 나머지 2명은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다. 과장은 징역 2년에 집행 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송 씨는 그때를 떠올리며 ‘어이가 없다’는 말을 반복했다. 당시 현대차 사내 하청 지회장은 파업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징역 2년에 집행 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살인 미수에 가까운 식칼 테러와 노동자 파업. 형량은 같았다. “과장과 경찰은 우발적인 범행이라고 몰고 갔어요. 식칼까지 준비했는데 우발적인 범행이라뇨. 그 후에도 회사의 폭행은 이어졌습니다. 납치, 미행, 폭행 등으로 많은 노동자들이 다쳤어요.”
사건 셋
2009년 1월 17일 밤 10시경. 울산 현대중공업 소각장 안으로 수십 대의 승용차가 들어갔다. 그리고 11시 30분경. 머리에 헬멧을 쓴 남성 50여 명이 공장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들의 손에는 각목과 쇠파이프, 소화기가 들려 있었다. 그들은 순식간에 우리가 농성 중인 현대중공업 앞 농성장으로 달려들었다. 소화기에서 뿌연 분말가루가 뿜어져 나왔다. 시야가 흐릿해졌다. 그사이 농성장이 부서져 내렸다. 그리고 불길이 솟구쳤다. 불을 지른 듯했다. 누군가 각목으로 등을 세게 내리쳤다. 두려움이 몰려들었다. 빨리 도망쳐야 했다. 허겁지겁 달려 나왔다. 누군가가 내 뒤를 따라 나왔다.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다리가 꺾이면서 땅바닥에 꼬꾸라졌다. 갑자기 빨간 소화기통이 어깨를 덮쳤다. 묵직한 통증을 느끼며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현대중공업 경비대에게 심야 테러를 당한 현대미포조선 노동자 김석진 씨. 현대중공업 경비대는 의식을 잃는 그를 향해 소화기를 세 번 내리쳤다. 응급실에서 눈을 떴을 때 몸은 멍으로 울긋불긋했다. 의사는 승모근이 파열됐다고 했다. 그는 그때의 후유증으로 7년째 치료를 받고 있다. 우울증과 수면 장애까지 왔다. 근로복지공단은 그의 산업 재해를 인정했다. 내년 4월 30일까지 꼬박 통원 치료를 받아야 한다. 김 씨는 사건 이후 가해자 처벌을 요구하며 3년을 싸웠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었다. 경찰은 50명의 현대중공업 경비대 중 누가 폭력을 휘둘렀는지 인지하지 못해 처벌할 수 없다고만 했다. 당시 사건 현장에는 30여 명의 경찰이 있었지만 누구도 체포된 사람이 없었다. “야밤에 복면한 경비대 50명이 농성장에 불을 지르고 쇠파이프로 사람을 내리쳤어요. 살인 미수잖아요. 그런데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다는 게 말이 됩니까?”
사건 넷
사측과 택시 사납금 문제로 교섭을 벌였지만 몇 달째 제자리걸음이었다. 노조는 회사의 최저임금 위반 등 불법 행위 감시를 요구하며 인천시청 앞에 농성장을 차렸다. 2010년 11월 7일, 농성 82일째를 맞던 날. 사장에게 연락이 왔다. 둘이 만나자고 했다. 그날 저녁, 사장과 술자리에 마주 앉았다. 날 선 관계이긴 했지만 특별한 싸움은 없었다. 더군다나 둘 다 취하지도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느닷없이 사장이 테이블에 있던 소주병으로 내 머리를 내리쳤다. 그리고 벽에 소주병 밑동을 깨 다시 한 번 내 머리를 내리찍었다. 어떤 이유도 없는 폭행이었다. 피가 흘러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가서 여덟 바늘을 꿰맸다. 그날 이후, 아직도 소주병을 든 괴물이 문득문득 생각난다.
사장은 현행범으로 체포돼 부평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다. 피해자인 정인재 전 한성운수노조 위원장은 서로에 대한 고소 고발을 취하하고, 적정 임금 협정을 맺는 등의 조건으로 사장과 합의했다. 합의하기 전 사장은 그를 찾아와 사과까지 했다. 하지만 당시 합의 사항이었던 체불 임금 지급은 6년째 지켜지지 않고 있다. 정 씨는 현재까지 회사와 법적 다툼을 이어가고 있다. 사건 이후 잠시 주춤했던 노조 탄압도 다시 시작됐다. 2010년 복수 노조 제도가 도입된 후, 회사는 재빠르게 기업 노조를 띄웠다. 복수 노조는 회사와 타임오프제 등에 합의하며 단체 협약을 후퇴시켰다. 그리고 정 전 위원장은 테러 사건 후 1년도 되지 않아 해고됐다. 남은 조합원들은 노후한 차를 배정받고, 폭언 등으로 괴로워하다 노조를 탈퇴했다. 결국 한성운수노조(분회)는 지난해 해산했다.
사건 다섯
2010년 노조 조직화 사업을 위해 휴게 시간마다 하청 업체를 돌아다니며 설명회를 했다. 하청 업체 중 유독 활동을 방해하는 업체가 있었다. 부장이라는 사람은 조합원들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회사 문을 잠그기도 했다. 어느 날, 회사 근처에서 조합원들과 술을 한잔하고 있을 때였다. 테이블 저편에서 그 업체 부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같은 술집에서 마시고 있었나 보다. 그가 우리에게 다가오더니 동석을 요구했다. “동석 필요 없습니다.” 동석을 거부하자 그가 화를 냈다. 말싸움이 시작됐다. “사람 등쳐 먹는 사람과 같은 자리에 있는 것조차 싫다고.” 내가 화가 나서 소리쳤다. 그러자 그가 갑자기 테이블에 있던 맥주병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내 머리를 내리쳤다. “내가 다섯 살이 많은데, 어린놈이 싸가지 없게 반말이냐”고 화를 내며. 분에 못 이긴 그는 주방으로 가 식칼을 가져와 나를 위협했다. 주변에서 말렸지만 막무가내였다.
이 사건으로 현대차 전주 공장 사내 하청 노동자 류영하 씨는 후두부 출혈 외상과 타박상 등을 입었다. 류 씨는 그 길로 병원에 입원했다. 그러자 가해자도 입원했다. 류 씨에게 맞아 엄지손가락이 부러졌다는 주장이었다. 가해자는 류 씨를 맞고소했다. 사건 당시 경찰은 신고를 받고 현장에 도착했다. 하지만 가해자를 현행범으로 체포하지 않았다. 가해자의 주장으로 사건은 쌍방 폭행 사건이 됐다. “저는 그때 그 사람 손도 안 댔어요.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증인으로도 섰어요. 그런데도 쌍방 폭행이래요.” 류 씨가 억울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류 씨는 징역 6월에 집행 유예 2년, 사회 봉사 80시간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가해자의 형량은 징역 1년에 집행 유예 3년. “가해자가 동네에서 유명한 건달이었어요. 비호가 있지 않고는 이럴 수 없죠. 가족들에게 너무 미안했습니다.”
어떤 법과 제도로도 제압할 수 없는 사회
“이윤 추구에 몰두해 노동자의 피해는 염두에 두지 않는 거죠. 가해자의 특정 성향이라기보다는 사회 구조적 문제입니다. 구조적 문제 안에 심리적 기저 요인들이 있는 것이겠죠.” 박성희 ‘마음의숲’ 심리 상담 센터 상담가의 설명이다. 안용민 서울대 신경정신과 교수는 “갑질 논란의 사주들은 자신이 주인이고 너희는 하인이니, 모두 자신을 따라야 한다는 공통된 심리를 갖고 있다”며 “상대방을 인격체로 보지 않기 때문에 이에 반하면 폭행을 가하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누구나 공감하는 말이지만, 또 쉽게 잊는 말이기도 하다. 그만큼 자본의 폭력은 꽤 일상적이고 광범위하게 일어난다.
고용노동부의 말마따나 근로 감독으로 자본의 갑질 폭력에 브레이크를 걸 수 있을까. 아니면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하는 걸까. 폭행을 당한 피해 당사자들에게 질문을 해 봤다. 돌아오는 건 헛웃음뿐이다.
“법도 제도도 모두 가진 사람들 중심으로 돌아가잖아요. 우리를 위한 사회 안전망 자체가 존재하지 않아요. 법, 제도 몇 개 바꾼다고 달라질까요?” 하청 부장에게 맥주병 테러를 당한 류영하 씨가 씁쓸하게 말했다. 대부분의 반응은 비슷했다. 아킬레스건 테러를 당한 송성훈 씨는 “자본은 노동자를 이윤을 위한 작업 도구로만 본다”며 “노동자를 대하는 자본의 관점 자체가 왜곡돼 있는데 몇 가지 제도로 문제가 개선되겠느냐”라고 반문했다. 심야 테러를 당한 노동자 김석진 씨 역시 “지금의 비정상적인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어떤 법과 제도를 만든다 한들 자본은 이를 교묘하게 빠져나갈 것”이라고 답했다.
법과 제도는 불평등하다. 그 불평등은 ‘법조문’으로 시작해 ‘법 집행’으로 이어진다. 자본의 갑질 폭력이 법 제도에 제압당하지 않는 이유다. 김상은 법무법인 새날 변호사는 “동일한 강도의 폭행이어도 피해자가 사업주라면 처벌의 수위는 높아진다”고 말했다. “법률 자체에는 어디에도 ‘누구에게 적용되는 법’이라고 나와 있지 않습니다. 평등해 보이죠. 문제는 경찰, 검찰, 법원 같은 수사 기관입니다. 사건에 있어 고도의 정치적 판단을 하는 관행이 문제인 거죠.”
지난 2011년 5월. 자동차 부품 업체 유성기업에서 뺑소니 테러 사건이 발생했다. 회사가 고용한 용역 직원들이 카니발 차량으로 노동조합 조합원들을 향해 돌진했다. 13명의 노동자가 차에 치여 중경상을 입었다. 가해자는 처벌받지 않았다. 폭력은 이어졌다. 결국 지난달 17일, 유성기업 노동자 한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조합원들이 상복을 입고 서울시청 광장으로 상경했다. 또 다른 폭력이 시작됐다. 가해자가 바뀐 채로. 자본과 공권력은 이미 한 배를 탔다.
(워커스 5호 2016.0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