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볼턴 안보보좌관을 전격 경질했지만, 이에 큰 기대를 두는 사람은 별로 없다. 본인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트럼프의 정치스타일이 이제는 익숙하기 때문이다. 후임 국가안보보좌관을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그가 대답한 말도 이를 확인해준다. 그는 “나와 함께 일하는 것은 매우 쉽다. 왜 쉬운지 아는가? 내가 모든 결정을 내리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했다.1)
다만 그가 리비아 방식을 비판하며 ‘새로운 방식’을 언급했기에 기대와 우려가 교차했다. ‘리비아 방식’은 북한이 먼저 비핵화를 하면 미국이 제재완화·안전보장 등 상응조처를 하는 방식이다. 볼턴이 지속해서 주장해온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트럼프가 리비아 방식을 포기하고 새로운 협상안을 들고 나갈 용의를 밝혔으니 당연히 관심과 기대감이 커질 수밖에 없다. 스티브 비건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도 유연하고 창의적인 접근을 주장하며 이를 뒷받침했다. 하지만 새로운 방식에 대해 구체적인 징후는커녕 뉘앙스조차 풍기지 않아, 북미 실무협상이 순탄할 것인지는 장담할 수 없다.
그러한 우려 때문에 북한은 10월 2일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 (SLBM)을 발사하며 실무협상에서의 원만한 합의를 위해 새로운 방안을 갖고 나오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보냈다. SLBM은 북한이 올해 발사한 10차례의 단거리 미사일·신형 방사포 등과는 차원이 다른 전략무기다. 이는 미국의 태도 변화가 확인되지 않으면 대결적 국면으로 갈 수 있다는 신호다.
미국의 기존 방식에 대한 반발
결국 10월 5일 스톡홀름에서의 북미 실무협상은 결렬되고 말았다. 지난 2월 하노이 2차 정상회담 결렬 이후 8개월 만에 재개된 실무협상이 다음 협상 날짜도 잡지 못한 채 종료됐다. 북미 실무협상 결렬 이후 양측으로부터 전혀 상반된 평가가 나왔다. 김명길 북한 외무성 순회대사가 낭독한 성명과 취재진과의 질의응답을 살펴보면 몇 가지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첫째, 북한은 ‘안전보장’이 매우 중요하고도 우선적인 사안이라는 것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북한은 성명에서 “조선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는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고 발전을 저해하는 모든 장애물이 깨끗하고 의심할 여지없이 제거될 때”라고 했다. 취재진의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도 “우리가 요구하는 계산법은 미국이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고 우리의 발전을 위협하는 모든 제도적 장치들을 완전무결하게 제거하려는 조처를 할 때”라고 강조하고 있다. 북한의 요구는 비핵화 대 안전보장이며, 미국의 새로운 방식은 무엇보다 안전보장이 우선돼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안전보장은 북한이 과거부터 지속해서 요구해온 일관된 주장으로 새롭지 않은 핵심적인 사안이다.
둘째, 실무협상에서 미국은 기존 입장인 선 비핵화 조치를 의제로 제안했다. 북한은 이에 “미국의 위협을 그대로 두고 우리가 먼저 핵 억제력을 포기해야 생존권과 발전권이 보장된다는 주장은 말 앞에 수레를 놓아야 한다는 소리와 마찬가지”라고 밝혔다. 취재진의 질문에도 “미국이 독선적이고 일방적이고 고담에 구태의연한 입장에 매달린다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마주 앉아도 대화가 의미 없다”고 답변했다.
북한이 협상에서 제시한 선결조건은 한·미 군사훈련 중단, 최신예 무기 및 핵무기 탑재 가능한 전략 폭격기 등 미국의 전략자산 한반도 전개 금지, 그리고 제재 완화 약속 등이다. 따라서 미국의 새로운 방식이나 창의적 제안은 북한의 선결조건에 대해 화답하는 것이어야 했다.
나중에 밝혀진 내용을 보면, 미국의 창의적인 제안은 북한에 대한 석탄, 섬유 수출금지의 일부 보류였다. 그것도 2가지 조건부 보류였다. 우선 북한이 보유하는 모든 핵무기와 핵물질을 미국에 인도하고 북한의 핵시설과 생화학 무기, 탄도미사일 등 관련 시설을 완전히 해체하는 것을 약속하라고 요구했다. 그 위에 영변 핵시설을 완전 폐기하고 우라늄 농축활동을 중단하는 실질적인 조치, 이른바 ‘영변+α’의 실시를 요구했다.2)
미국은 북한이 이러한 조건을 이행하면 제재 일부 완화, 인도적 지원 그리고 종전선언까지 고려하겠다고 했다. 기존 북한의 전형적인 단계적 접근법 대 미국의 포괄적 합의 구도에서 절대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 입장은 하노이 결렬 이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비핵화 최종 상태에 대한 명확한 규정과 비핵화 로드맵, 그리고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모든 핵 활동 동결 등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결국 이러한 요구 조건은 북한의 심기를 건드리면서 심한 반발을 불러왔다.
셋째, 북한은 이번 실무협상의 결렬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새로운 방식과 창의적인 제안을 구체적으로 내놓지 않자 기존 방식으로 접근할 것을 예상한 것 같다. 김명길 대사가 오후 협상이 끝난 뒤 북한대사관으로 돌아가 15분 만에 회담 결렬 성명을 발표했다는 것은 최소한 오전 협상이 끝나고 준비했거나 아니면 그 이전부터 대비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다면 북측은 결렬 성명을 미리 준비할 정도로 애초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셈이다.
동일한 패턴의 반복
그런데 이번 미국의 협상 태도도 하노이 2차 북미정상회담에서의 패턴과 동일하다. 당시 정상회담이 합의에 이르지 못한 원인 중 하나가 미 국내정치 때문이었다. 회담 당일 트럼프의 옛 개인 변호사인 마이클 코언이 의회 청문회에 출석해 트럼프의 의혹을 폭로하자 의도적으로 회담을 결렬시켰다는 것이다. 앞서 1994년 제네바 합의, 2000년 10월의 북미 공동코뮈니케도 미 국내정치의 영향으로 그 동력을 상실하거나 파기돼버린 경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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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트럼프는 온통 내년 대선에만 집중하고 있다. 트럼프에게는 대선이 탄핵 정국과 맞물려 펼쳐지기 때문에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북한 문제가 미국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치는 사안은 아니지만 신중할 수밖에 없다. 협상 결렬 후 북한의 성명 발표와 미국의 반박도 하노이 정상회담 당시 상황과 유사하다.
북한 외무성이 10월 6일 발표한 담화에서도 “미국은 이번 협상을 위해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으며 저들의 국내정치 일정에 조미 대화를 도용해보려는 정치적 목적을 추구하려 했다”며 결렬의 원인을 미 국내정치에서 찾았다. 그 원인을 미 대선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이 미 국내정치 문제를 협상 결렬의 원인으로 지적한 것은 이례적이다. 그것도 공식적·공개적으로. 그만큼 미국의 태도를 의도적·목적의식적이라고 비난하면서 불신하고 있다. 북한으로서는 트럼프가 언급한 새로운 방식은 정치적 레토릭에 불과하며, 오히려 재선을 위한 정치적 동기로 북한을 관리하고 협상을 활용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김정은의 중대결심과 불확실한 전망
북·미 비핵화 협상에 대한 전망은 엇갈린다. 트럼프가 탄핵 정국을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 적극적으로 북미협상을 추진해 커다란 성과를 만들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아무래도 탄핵 방어에 주력하느라 북·미 협상이 속도를 내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확실한 것은 미국 대외관계의 불확실성이 이전보다 커졌다는 점이다. 다만 탄핵정국이 내년 대선까지 이어지면 트럼프의 정책 수행에 제동이 걸릴 가능성은 매우 높다.
이번 실무협상 후 북한이 거듭해서 협상 시한을 ‘연말’로 정한 것도 미국의 정치일정과 의도를 간파했기 때문이다. 더 이상 동일한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따라서 추가 실무협상을 염두에 둔다면 미국을 압박하는 강경한 대응은 필수적이다. 이는 표정 관리가 안 될 정도로 조급하고 초조하다는 의미다.
다만 북한이 자신의 의도대로 입장을 관철할지는 미지수다. 비핵화 해법에 대한 북·미 간 간극이 큰 데다, 탄핵 조사에 직면한 트럼프가 북한 요구대로 양보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김정은 위원장의 최근 행보가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백마를 타고 당 지도부와 함께 백두산에 올랐던 김정은의 ‘중대 결심’이 과연 무엇일까? 연말까지 무력시위의 강도를 높일 수도 있다. 〈노동신문〉은 10월 23일 남북관계에 대한 결단에 대해 보도한 바 있다. 김정은 위원장은 남북협력의 상징인 금강산의 남측 시설물에 대한 철거를 주문하는 등 금강산관광을 강하게 비판했다. 또 현대적인 시설들을 북한식으로 새로 건설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선임자들의 의존정책이 매우 잘못됐다”라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비판하는 생소한 광경도 연출했다. 그만큼 남한 정부에 대한 불만과 격렬한 분노를 표출한 것이다.
이 와중에 북한은 전통 우방국인 중국과 러시아와의 군사 협력을 강화하는 모습이다. 10월 14일 북한 군부 서열 1위인 김수길 인민군 총정치국장이 먀오화(苗華)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정치공작부 주임과 만나 북중 간 ‘혈맹’ 관계를 강조했다. 김수길 국장과 먀오화 주임은 모두 북중 군부의 핵심 인사다.
얼마 전에는 북한이 중국과 러시아 등 7개 국가가 참여하는 ‘젠뜨르(중부)-2019’ 대규모 합동훈련에 군사 참관단을 보냈다. 이 훈련은 러시아군의 역대 최대 군사훈련으로 병력 12만 8000명, 전투기와 헬기 등 항공기 600대, 군함 15척, 탱크 250대, 이스칸데르 미사일 등 각종 무기와 장비 2만여 대가 동원됐다고 한다. 훈련의 목적은 미군과 나토군을 견제하기 위해서다. 북한이 군사 참관단을 보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비핵화 상응 조치로 미국에 안전보장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협상 지렛대를 강화하고 타결 실패 안전판까지 확보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그럼에도 문재인 정부는 한가롭게 원론적인 입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정부 관계자는 “지금으로선 대화 모멘텀을 유지하는 것이 급선무”란다. 북한이 몰수·동결한 금강산 시설물은 인정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법적으로 취할 방법이 없단다. 얼마 전에는 11월 부산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에 김정은의 참석 가능성도 제기했다. 이게 문재인 정부의 현실 인식 수준이다.
한반도 평화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한두 번의 협상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협상 말고 다른 선택지를 상상하기란 어렵다. 그렇다면 협상에 어떻게 임하고, 협상에서 무엇을 이끌어 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서로의 목표가 다르면 그 사이에 정밀한 전략과 치열한 조율이 필요하다. 그 과정이 생략된 채 평화 메시지만 발신한다면 그것은 정책이 아니다.
<각주>
1) 김재중, “[특파원칼럼]‘100%’ 트럼프표 외교시대”, 〈경향신문〉,2019. 9. 25.
2) 김진우, “미국이 북한에 제안한 ‘창의적 아이디어’는 석탄·섬유수출금지 유보”, 〈경향신문〉, 2019.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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