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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인생….</b>
일모도원(日暮途遠). ‘날은 저물어 가는데, 갈 길은 멀다’는 뜻이지요. 대개 ‘나이가 들었는데 해야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았을 때’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쓰는데요. 여기서 ‘해야 할 일’을 ‘하고 싶은 일’로 살짝 비틀어보면, ‘하고 싶은 게 많은데 벌써 이렇게 나이를 먹어버렸다’는 한탄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퇴직을 코앞에 둔 부모님을 보며 부쩍 이 말이 떠오릅니다. 지난 30여 년 넘도록 당신과 식구들 건사하느라 본인들이 하고 싶은 일은 접어두고 어떻게든 생계를 꾸려나가려고 악착같이 일했는데, 그 끝에 다다른 지금 ‘이제 나에게 남은 것은 뭔가’ 하고 조금은 허탈해하시는 것 같거든요. 그래서 처음으로 부모님에게 ‘본인들이 젊었을 때, 직장생활하기 전에 본래 하고 싶었던 일은 없었는지’ 물어봤습니다. 두 사람 모두 처음부터 누군가의 부모가 되기 위해, 혹은 하루하루 식구들 먹여 살리려고 살았던 건 아니었을 테니까요. 각자 꿈꿨던 자기 나름의 삶과 소망이 무엇이었을지 듣고 싶었습니다.
대답에서 체념이나 회한이 묻어나지는 않았지만, 이제는 돌아갈 수도 없기에 마치 다른 사람 얘기를 하는듯한 모종의 서글픈 덤덤함이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모친은 원래 대학에 가서 공부를 더 하고 싶었다고 하시더군요. 당시 시대상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간호사가 되는 게 꿈이었다고요. 시골에서 홀로 상경했지만, 결국 학비를 마련할 길이 없어 구로공단의 한 섬유회사에 취직했다고 합니다. 부친은 당시 먹고사는 게 급해 달리 생각할 수 있는 게 없었다며,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일자리를 구하며 직장생활을 시작해 40년간 그렇게 살아오게 됐다고 했습니다.
두 사람의 내력이 남들보다 특별히 더 불우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같은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과 비교해도 그렇고, 지금의 세대와 견줘도 마찬가지죠. 웬만큼 있는 집에서 태어나지 않은 이상, 대부분의 사람은 먹고살려면 취직해서 일해야 합니다. 그게 자신이 꿈꾸던 일이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죠. 그렇게 직장생활을 시작하는 순간, 조금이라도 더 안정적인 생계를 유지하려면 하루 8시간 이상의 노동을 감내해야 합니다. 그마저도 집을 마련하고, 아이들 학비 대고, 식비에다 교통비 통신비 빼고, 노후 대책까지 세우려면 아득할 따름입니다. 약간의 여유라도 누리고 싶다면 더 많은 시간 일할 수밖에 없고, 그만큼 ‘나의 시간’은 사라져갑니다. 나의 시간이 사라진다는 건 곧 ‘내 삶’이 희미해진다는 것이기도 하겠죠.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자본주의 이후 새롭게 만들어야 할 사회는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라고 적었습니다. 생계를 이어가려면 하루에 8시간 이상을 일해야 하는 곳에서,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은 불가능합니다. 먹고살기 위해 생의 활력이 넘치는 시간을 자신의 꿈과 관계없는 일에 쏟아붓도록 만드는 이 자본주의는, 황혼의 길가에서 ‘그래도 열심히 살았다’는 자기 위안과 함께 만시지탄에 젖는 ‘각자의 비극’을 빨아들여 스스로를 유지합니다. 그렇기에 노동시간에 대한 통제는 과로를 막아야 한다는 절박한 문제임과 함께, 각자가 단 한 번뿐인 자신의 삶을 온전히 누리고 즐길 수 있느냐의 인생 문제입니다. 동시에, 사회가 구성원 각자의 그 자유로운 인생을 물질적으로 보장할 수 있느냐의 문제, 곧 체제의 문제와 직결하는 것입니다.
<b>#2. 하루에 2시간만 일해도 된다면?</b>
단도직입적으로, 하루에 2~3시간씩만 일해도 생계를 꾸려나가기 충분한 보수를 받는다면 당신의 삶은 어떻게 변할까요? 못다 한 공부를 더 할 수도 있고, 배우고 싶은 기술을 익힐 수도 있고, 영화를 보거나 전시회를 가는 등 문화생활을 즐길 수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과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도 있겠죠. 일을 통해 자신을 실현하는 욕구가 강한 사람은 생계 걱정, 시간 걱정 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다른 일에 뛰어들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는 방에 틀어박혀 온종일 전자오락에 열중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만 않는다면야 그 역시 본인의 자유로운 선택입니다. 분명한 것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각자가 자신의 삶을 훨씬 더 풍성하게 꾸릴 자유로운 가능성이 열린다는 거죠.
각자의 노동시간을 이렇게 대폭 줄이고, 그만큼 고용 인원을 늘리면서, 그동안 자본가들이 이윤으로 가져갔던 몫을 일하는 사람에게 온전히 배분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게다가 자본주의는 각각의 자본이 생존을 위해서라도 경쟁에서 승리해야 하기에 만성적인 과잉생산과 그에 따른 초과노동의 강요(그러면서도 비용절감을 위해 고용을 줄여 실업자를 양산하죠)를 야기하죠. 반면, 사회주의는 구성원들의 필요에 따라 재화와 서비스 생산을 적정 수준으로 조정하기 때문에 노동시간은 줄이면서 모두의 생활 수요를 만족시키는 데 초점을 둡니다.
근래에는 기술발전에 따른 일자리 감소를 많이들 걱정하는데요. 노동력 지출을 줄이는 기술의 발전은 자본주의에서는 고용을 줄이는 공포를 불러일으키지만, 사회주의에서는 생계 걱정 없이 노동시간을 줄이면서 모두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기여하게 됩니다. 자본주의에서 기술발전은 더 큰 이윤을 생산하는 데 복무해야 하기 때문에, 기술개발에 성공한 자본가나 기업주에게는 막대한 초과이윤을 가져다주죠. 하지만 이 기술을 활용해 재화나 서비스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고용을 최소화함으로써 일자리를 얻지 못하는 노동자들은 생계의 위기를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기술개발비보다 더 값싸게 노동자를 부려먹는데, 이 때문에 노동자의 안전을 위한 기술이나 위험하고 열악한 공정을 기계화하는 기술은 각광을 받지 못합니다.
사회주의에서는 기술발전의 결과를 사회 전체가 함께 공유합니다. 가령 특정 양의 재화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시간과 노동력을 줄이는 기술을 개발한다면, 노동시간은 줄어들면서도 노동자와 사회 구성원은 여전히 이전과 같은 수준의 생산물을 누리게 되는 거죠. 또한 반복적이고 지루한 노동이나 위험하고 열악한 근무환경에 대해서는 수지타산에 얽매이지 않고 적극적으로 비용을 투입해 자동화·기계화함으로써, 노동자의 안전을 우선적으로 보장하는 한편 노동자들은 단순노동에서 벗어나 더 창조적인 활동(혹은 자신이 희망하는 무언가)에 더 많은 시간을 쓸 수 있게 될 겁니다.
앞서 하루에 2~3시간을 일하게 되는 미래를 상상해보자고 했는데, 물론 처음부터 이 정도 수준으로 노동시간을 단축하지는 못할지도 모릅니다. 현재의 기술조건을 전제로 사회적 필요를 충족하려면 2~3시간보다는 좀 더 일해야 할 수도 있겠죠(다만 경쟁적인 과잉생산이 없고 모두에게 일할 기회를 제공하는 만큼, 지금보다는 노동시간이 분명 줄겠지만요). 하지만 사회주의에서는 노동자들 스스로 노동시간을 계속 줄여나가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작업환경에서 어떤 기술이 필요한지를 결정하는 주체이기 때문이죠. 기술발전이 노동자의 생계를 위협하지 않으면서 노동시간을 줄이고 그만큼 노동자 자신들이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을 늘리니, 노동자들은 더욱 경쟁적으로 기술발전에 박차를 가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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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3. 당신은 왜 돈을 버나요?</b>
한편, 세상이 바뀌어도 불가피하게 연속적으로 긴 시간을 일해야 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가령, 소방관이 근무시간 끝났다고 불 끄던 도중에 퇴근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그 일을 정말 사랑해서 몇 시간이고 계속 일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수 있죠. 또한 사회주의에서도 더 열심히, 더 많이 일한 사람에게는 그들이 노동한 만큼 더 많은 보수를 제공하는 기제가 작동할 겁니다. 이는 장시간 노동을 조장하기 위함이 아니라, 더 일한 사람에게 각자의 노동에 합당한 대가를 보장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격차가 자본주의에서처럼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극복할 수 없는 수준’이 돼선 안 되겠죠. 직종별로 차이는 있겠지만, 특정 시간 이상으로 일한 대가를 어떻게, 얼마만큼 보상할지는 구성원들이 함께 결정할 문제입니다. 예컨대, 대개 오늘날 잔업·특근에 대해 기본급보다 높은 임금을 매겨 초과노동을 부추긴다면, 사회주의에서는 특정 시간 이상의 노동에 추가하는 보상 비율을 역으로 줄임으로써 가급적 초과노동을 자제하도록 만들 수도 있겠죠.
‘아무리 보상체계가 바뀐다 한들, 더 일해서 조금이라도 더 가져갈 수 있다면 장시간노동은 근절되지 않고 그대로 남는 것 아닐까’ 의구심을 품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차이가 드러나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져보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왜 돈을 벌려고 할까요? 일단, 당장 먹고 살려면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겠죠. 나아가 더 좋은 집, 더 괜찮은 교육, 더 맛있는 음식, 더 나은 물건들, 좀 더 길게 생각하면 노후 대비까지. 일생의 모든 순간에 항상 돈이 빠질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사회주의에서는 ‘무조건 더 많이 벌어야 할’ 이유가 상당 부분 사라집니다. 주택은 더 이상 매매의 대상이 아니라 공적으로 보장하는 양질의 공공(영구)임대주택으로 변하죠. 학교의 서열 없이, 공부하고 싶은 사람이면 대학 교육까지 보편적 권리로 제공합니다. 교통에서 통신, 보육부터 의료, 노후에 이르기까지 공동체 책임 하에 차별 없는 서비스를 공급하죠. 이렇게 개인의 삶에서 필요한 기반 서비스를 공적으로 제공하면, ‘각자가 알아서 벌어야 할’ 부분은 크게 줄어듭니다. 물론 갖고 싶은 물건이 많다면, 그만큼 더 일해야겠죠. 하지만 생산수단이 사회화돼 있어 자본주의와 같은 사적 매매와 소유가 불가하니, 많이 벌어서 쌓아놓는다고 한들 딱히 쓸 만한 곳도 없어 의미가 없습니다. 개인 항공기 같은 걸 목표로 하지 않는 바에야 말이죠. 모두를 상시적인 초과노동으로 몰아세우는 유인은 사라집니다. 여유로운 생활을 누리는 수준에서 일은 멈추고 하루 대부분을 색다른 자기 삶으로 꾸리는 데 쓸지, 아니면 (규모는 제한적이지만) 좀 더 많은 재화와 서비스를 향유하기 위해 자기 시간을 포기하고 더 일할지, 각자의 상황에 맞는 각자의 선택이 있을 뿐입니다.
<b>#4. 사회주의, 노동자를 위한 노동자의 유연성</b>
맨 처음에 거론했던 ‘일모도원’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면, 얼마 전 스스로 이 말에 격하게 공감한 일이 있었습니다. 물론 저는 젊습니다. 나이를 먹었다는 슬픔은 딱히 느껴본 적이 없죠. 다만, 정말 물리적으로, 해가 떨어지는데 아직도 갈 길을 한참 남겨둔 채 꽉 막힌 도로 위에 멈춰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방에서 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는데, 하필 퇴근시간대와 겹치는 바람에 예상시간보다 1시간을 더 길에서 가만히 보내야 했죠.
처음에는 짜증이 났습니다. 도로를 가득 메운 수많은 차량에 분노가 치밀었죠. 그런데, (버스 안에서 딱히 할 일도 없어서) 조금 더 생각해보니 ‘왜 꼭 이렇게 많은 사람이 특정 시간대에 한꺼번에 출근하고 퇴근해야 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사람마다 다소 차이는 있겠으나, 야간노동을 하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대개 아침에 출근해서 9~10시간 정도를 직장에서 보내고 저녁 어스름 무렵 퇴근하기 때문이겠죠. 사회주의에서는 어떨까요? 각자의 노동시간이 대폭 줄어든다면, 교대하는 방식을 통해 서로 다른 시간에 출퇴근할 수 있겠죠. 누구는 지금처럼 아침에 출근했다가 점심 먹기 전쯤 퇴근하고, 다른 누군가는 점심때쯤 일하러 나갔다가 애매한 오후 시간대에 일을 마치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렇게 노동시간이 획기적으로 줄어들면 노동자들이 작업 공정을 고려해 동료들과 협의하되 자신의 사정에 맞게 노동시간 배치의 탄력성을 발휘하면서, 소소하게는(?) 교통체증으로 인한 스트레스와 시간낭비도 최소화하고,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일을 하면서 시간 활용의 만족도를 높이죠.
최근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탄력근로제 확대를 주문한 데 이어, 어제까지 서로 죽일 듯 싸우던 여야가 ‘탄력근로제 확대는 비쟁점 사안’이라며 곧바로 국회에서 처리하겠다고 합의했습니다. 저들이 말하는 ‘탄력성’은 언제나 노동자들에게 더 많은 일을 시키면서 어떻게든 임금은 깎아보려는 게 불변의 핵심이었죠. 자본을 위한 ‘탄력성’은 그저 ‘시키고 싶은 대로 일 시키고, 주고 싶은 대로 주겠다’라는 뜻일 뿐입니다.
사회주의는 정확히 그 반대입니다. 어떻게든 여유로운 생활을 보장하면서 노동시간을 줄이고, 노동자들이 스스로를 위해 탄력적이고 유연하게 노동시간을 배치할 권한을 직접 갖는 것. 그 누구도 생계형 노동에 치어 자기 꿈을 포기하지 않도록,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시간과 자원을 충분히 제공하는 것. 한 번 사는 인생, 마음대로 살아보고 싶은 당신에겐 사회주의가 어울립니다. [워커스 6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