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ad is good”, 금리 인상의 역설
좀처럼 납득하기 힘든 일이 요즘 자주 벌어진다. “the bad is good”, 즉 나쁜 게 좋은 거라는 이 역설적인 말이 요동치는 세계 금융 시장에 딱 들어맞는 말인 듯하다. 지난 3일 미국의 고용 지표가 나쁘게 나오자 미국 중앙은행인 연준 의장은 6월 금리 인상 연기 가능성을 피력했다. 그러자 곧 전 세계 주가와 채권 가격이 급등했다. 한국의 코스피도 외국인들의 적극적인 매수로 2,000선을 넘어섰다. 어느 증권사의 연구원은 “이번 고용 쇼크는 긍정적인 부분이 더 많다”고 밝혔다.
그런데 고용 지표가 나쁘게 나왔다는 건 경기가 다시 침체 상황에 빠질 수 있다는 걸 의미하는데, 어떻게 주가와 채권 가격이 오를 수 있는지 납득이 잘 안 된다. 이런 상황이라면, 미국의 경제 지표가 계속 나쁘게 나오는 게 세계 경제의 평화를 위해 가장 좋은 일인 듯 싶다. 정말 이해하기 힘든 역설이다. 그리고 이 역설을 대부분의 언론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쓰고 있다.
여기서 이 상황을 설명하는 한 가지 논리는 이렇다. 금리 인상이 연기되면 금리와 반비례인 채권 가격이 떨어지지 않고 유지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자 부담이 늘지 않아 채무자의 부채 부담이 증가하지 않는데, 이로써 시중에 풀린 돈(신용 통화)이 계속 금융 시장에 유통될 수 있으니 금융 상품의 가격을 뒷받침해 줄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으로 볼 때, 확실히 “the bad is good”의 역설은 금융 시장의 이해관계가 철저히 반영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이렇게 금리 인상 연기 소식으로 전 세계 주식 시장과 채권 시장 모두가 흥겨워할 수 있고 안정을 찾을 수 있다면, 아예 영원히 올리지 않겠다고 하는 게 맞는 게 아닐까? 왜 굳이 금리를 올리겠다고 해서 수년 동안 이 난리를 치는 것일까? 혹자는 인플레이션 상승을 거론할 수도 있을 것이다. 풀린 돈이 물가를 상승시킬 수 있으니 금리를 올려야 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미국의 물가 상승률은 1.7%에 그친다. 심지어 지난 수년 동안 임대료가 상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 물가 상승률은 되레 떨어지고 있다. 2년 전 100달러가 넘던 유가도 현재 반 토막이 나서 40~50달러 수준에 머물고 있다. 오히려 IMF와 같은 국제 기구는 인플레이션이 아닌 디플레이션의 공포를 강조하면서 정부의 확장적 재정 정책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여러 가지 객관적인 지표와 공신력 있는 분석을 들여다보면, 물가 상승 때문이라는 주장은 별로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그러면 미국 연준은 올리지 않아도 될 금리를 올리겠다고 거짓말하는 것인가? 낯이 두꺼운 건지 아니면 우리가 모르는 비밀이 숨겨져 있는지 매우 궁금하다.
중앙은행 커뮤니케이션 전략의 한계
한 가지 분명한건, 미국 연준의 결정에 전 세계 모든 언론이 언제나 귀를 쫑긋 세우고 있다는 점이다. 금융 시장의 분석가들은 연준 의장의 기자 회견문에 나오는 문구 하나 하나가 어떤 의미이고, 지난번 회의록과 비교해 단어 선택에 어떤 변화가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무얼 뜻하는 건지 분석한다. 예전엔 중앙은행장의 애매한 말을 두고 금융 시장 분석가끼리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서로 갑론을박했다. 그런데 요즘은 비교적 중앙은행이 명확하게 목표와 기준을 제시하고, 이에 맞게 시장이 움직이도록 관리하고 있다. 일종의 중앙은행이 펼치는 커뮤니케이션 전략인 셈이다. 이런 커뮤니케이션 전략은 지난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주목받기 시작했다. 금융 위기가 남긴 후유증이 커 전통적으로 중앙은행이 취하는 금리 정책과 공개 시장 조작만으로 금융 시장을 움직이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금리 인상을 두고 벌이는 논란과 역설도 이 커뮤니케이션 전략의 과정에서 빚어진 것이 아닌가라고 제기할 수 있다. 그동안 연준은 미국 경제가 지속적으로 개선되고 있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해 왔다. 그러면서 출구 전략의 일환으로 금리 인상을 개시할 수 있다는 점을 수차례 강조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지난 2년여 동안 세계 경제는 연준의 말 한마디에 웃고 우는 촌극이 벌어지곤 했다. 약속한 실업률 지표가 호전되어 금리 인상 날짜가 다가오자, 금융 시장은 자금 이탈을 우려하면서 긴장했다. 미국 경제 지표가 좋게 나오는 게 금융 시장엔 나쁘게 받아들여지는, “the good is bad”인 셈이다. 그러다가 연준은 갑자기 중국의 경착륙과 같은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을 들어 금리 인상을 연기하곤 했다. 그러면 다시 금융 시장은 반색을 하며 주가와 채권 가격이 급등했다. 다시 “the bad is good”가 발동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가운데에서도 연준은 미국 경제가 계속 좋아지고 있어서 금리 인상 시나리오가 연기되었을 뿐, 조만간 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다 보니 반복되는 금리 인상 연기가, 실제로는 미국 경제가 좋은 게 아니라 나빠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게 아니냐는 반론도 제기되었다. 즉 연준이 ‘사기’ 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경제가 나빠서 금리를 못 올리겠다는 말하는 것보다, 미국 경제는 좋은데 일시적인 불안 요소가 있어서 금리 인상에 신중한 행보를 취한다는 메시지를 심어 주는 게 더 좋은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난해 말 연준은 호전되고 있다는 미국 경제에 대한 분석이 허언이 아님을 보이기 위해서라도, 금리 인상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렸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중앙은행이 신뢰를 잃지 않으려다 보니, 그동안 자신이 했던 말이 함정이 되어 스스로 거기에 빠져 버린 것이다.
중앙은행 전성시대
그러나 아무리 이런 한계에 빠져 있다고 해도, 시장은 중앙은행의 행보와 말 한마디에 다시금 귀를 기울인다. 왜냐하면 지금의 혼란을 지휘 통솔할 주체가 중앙은행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동안 중앙은행이 양적 완화로 늘려 온 자산 규모를 봐도 확인할 수 있다. 전 세계의 주요 중앙은행이 사들이는 자산의 규모와 대상만 보면, 가히 중앙은행 ‘전성시대’이다.
특히 최근 뒤늦게 양적 완화 대열에 뛰어든 유럽중앙은행의 행보는 거침없다. 지난 3월 기준 금리를 0%로 낮췄을 뿐만 아니라, 중앙은행 예치금 금리를 –0.4%로 한 차례 더 낮췄다. 양적 완화 규모도 매월 600억 유로에서 800억 유로로 확대했다. 심지어 회사채도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6월부터 4년 만기 목표물 장기 대출 프로그램(TLTRO) 시즌 2도 가동하기로 했다. 이 대출 프로그램은 기업과 가계 대출에 자금을 빌려주는 것으로서 애초 6월 종료될 예정이었다. 거의 ‘총동원형’이라 불릴 만큼 모든 완화적 통화 정책을 펼치고 있다.
일본 중앙은행도 이미 2013년부터 ‘아베노믹스’를 배경으로 대대적인 양적 완화를 시작했다. 심지어 매입 대상에 국채뿐 아니라 주식까지 포함시켰다. 상장 지수 펀드(ETF), 부동산 투자 신탁(REIT)을 각 연간 1조 엔, 300억 엔씩 사들였다. 그리고 다음해 2차 양적 완화를 개시하면서 자산 매입을 80조 엔(800조 원)으로 늘렸다. 상장 지수 펀드와 부동산 투자 신탁 매입량도 3배 늘렸다. 그리고 올해 초엔 기준 금리를 –0.1%로 낮추기까지 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소량의 주식 매입을 하고 있던 스위스, 이스라엘, 홍콩 등의 중앙은행도 보다 적극적인 주식 매입을 할 가능성이 커졌다. ‘주식 양적 완화’라는 말이 생길 정도이다.
이렇게 중앙은행이 자산 매입을 늘리는 상황이다 보니, 금융 시장 기능이 소멸되는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이미 국채 거래 시장은 중앙은행의 과도한 매집 현상으로 거래가 급감하는 사례가 빈번해지고 있다. 심지어 마이너스 금리 국채 규모가 10조 달러(1경 1000조 원)를 넘어섰다. 일본에선 일본은행이 매입하고 있는 상장 지수 펀드 규모가 전체 60%를 넘어서다 보니 시장 기능이 작동하지 않는다. 유럽중앙은행도 유로존 회원국이 발행한 국채의 25%를 보유하고 있다. 여기엔 재정 위기를 겪었던 국가의 국채도 대거 포함되어 있다. 유럽중앙은행이 재정 위기의 소방수 역할을 톡톡히 했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JP모건은 유럽중앙은행이 주식 매입에도 나설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하면서, 그 규모는 약 6조 유로의 상장 지수 펀드 형태가 될 것이라 밝혔다.
중앙은행발 국유화 논란과 시대에 뒤처진 한국판 양적 완화 논쟁
중앙은행이 주식 매입을 한다는 것은 과거 전통적인 통화 정책이 금융 위기 이후 수명을 다했으며, 그 후 등장한 비전통적 정책 수단도 이미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을 방증한다. 그러다 보니 정부가 직접 공공 지출로 공중에서 현금을 살포한다는 의미인 소위 ‘헬리콥터 머니’가 올해 초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그래서 오히려 ‘헬리콥터 머니’보다 상대적으로 약해 보이는 중앙은행의 주식 매입이 선택 가능한 대안으로 제기되는 것이다. 일부 비평가는 중앙은행이 대량의 주식을 보유하는 건 과도한 위험을 떠안는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또한 이것이 기업 국유화로 넘어가는 위험한 행보라고도 말한다.
하지만 이미 금융 시장은 이것을 받아들이고 있다. “the bad is good”이 통용되는 시대에 주가가 오를 수만 있다면 국유화 따위는 별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확실히 신자유주의는 위기를 맞았고, 그 위기는 우리를 새로운 시대로 달려가게 하고 있다. 그것이 위기를 진정으로 해결할 수 있는가는 전혀 다른 문제다. 오히려 중앙은행의 의존도가 커지고, 중앙은행 스스로 함정에 빠져 진퇴양난하는 모습을 보면, 위기는 심화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전통에 기댄 문제 해법이 점점 사장 되고 있음은 확실해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판 양적 완화 논쟁에서 드러나는 신자유주의적 쟁점(중앙은행 독립성)에 대한 몰입은 우리가 달라진 이 시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보여 준다. 중앙은행의 전성시대든 함정에 빠진 중앙은행이든 어쨌든 중앙은행이 역사의 주인공으로 우뚝 선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워커스14호 2016.0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