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은(전국공공운수노조 정책기획차장)
대한민국의 가계소비 위축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경제 전문가, 정치인, 언론마다 가계소비가 늘어야 돈이 돌고 경제가 풀릴 거란다. 얼마 전 발표된 전년도 가계동향 통계에 대해서도 소비 감소에 주목하는 분석 기사가 줄을 이었다. 기본소득의 화제성도 식을 줄 모른다.
흔히 돈이 돈다는 것은 자본의 생산적 소비(투자)가 잘 되는 상황 묘사로 통했다. 그런데 이제 가계소비 때문에 돈이 안 돈다니. 나라 경제에서 재벌보다 평범한 자들의 지갑 사정이 더 중요하단 걸 갑자기 깨닫기라도 한 걸까? 하기야 월세, 자녀 교육비, 부모님 병원비를 다 대기엔 본인의 능력도 노력도 아닌 딱 월급이 부족하다고 불평하는 게 바로 요즘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가계소비가 문제라는 잇단 진단은 우리네 월급 얘기로 접수될 게 분명하다.
동시에 가계소비를 강조하는 어떤 말들은 한사코 월급 얘기를 우회하려 한다. 박근혜 정부만 봐도 그렇다. 가계소비 진작을 꾀하며 박근혜 정부가 만들어낸 것은 체계적인 임금 소득 증가책이 아닌 임시공휴일과 ‘블랙 프라이데이’였다. 이 이벤트들로 반짝 매출 증가라는 긴급 수혈을 받아낸 재계는, 동시에 노동자가 돈 쓸 여유가 있어야 경제가 살아난다는 걸 알아챈 국민들이 임금 인상과 노동시간 단축까지 요구하고 나설까봐 전전긍긍했을 터다. 아니나 다를까 박근혜 정부는 해외 수주가 급감해 자본 수익률이 떨어진단 선전을 늦추지 않았고, 관련 업계 대량해고 대책도 세우지 않았다. 오히려 공공부문에서부터 직간접적 임금 삭감 시도들로 가득 찬 ‘노동 개악’을 밀어붙였다.
가계소비가 늘어야 한다더니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애초 ‘소비’라는 것에 함정이 있진 않나 생각해 볼만하다. 소비 자체에 목표가 맞춰질수록 소비할 돈의 출처나 장기적 효과는 덜 중요해지니 말이다.
사실 노동자들 지갑에 여윳돈이 없는 게 문제라면, 정부가 그때그때 뚝딱뚝딱 여윳돈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꼭 현금을 쥐어 줄 필요는 없다. 공공요금을 깎거나 라면 값, 고기 값 인상을 제지하는 등 전반적인 생활 소비자 물가를 낮춰주는 것으로도 유사한 효과를 낼 수 있다. 소득 증대 없이도 돈을 남겨주는 방식이다. 문제는 그게 누구의 이득으로 돌아갈 것인가이다.
소비 진작 의지가 물가 하락과 손잡는 경제 방침은 노동 현장이나 사회 서비스를 악화시키는 부메랑이 될 수 있다. 예컨대 택배비가 더 싸질 수 있다. 학교 급식실의 인원이 줄고 식자재비가 주저앉을 수 있으며, 생활폐기물 처리나 지하철 안전 업무가 더 값싸고 위험해질 수 있다. 임금 상승이 억제 못될 것도 없다. 영세 자영업자들에겐 시급이야말로 가장 민감한 ‘소비자 가격’이 아니던가.
결국 지갑을 열기 위해 임금부터 받쳐줘야 한다는 것은 노동자 계급에게나 합리적인 이치요 상식이다. 자본가들에게는 기껏 ‘불편한 진실’이고 말이다. 그러니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 계급적 이해에 맞춰 한국 경제의 지향점을 ‘가계소비 진작’이 아닌 ‘임금 인상’에 정조준하는 게 자연스럽다. 그리고 그 시도는 최저임금 투쟁과 참 잘 어울린다.
최저임금. 진보 진영엔 이 네 글자를 꺼리는 사람도 있다. 최저급 인력이자 최저 생활을 연상시키는 부정적 뉘앙스 때문이겠다. 최소한의 생계를 감당할 테니 보장만 해 달라는 수동적 호소로 비춰질까봐 우려도 할 테다. 그러나 ‘최소한의 생계’란 것이 자연적으로 정해져 있을 리 없다. 연구나 토론을 통해 깔끔히 합의되는 것도 아니다. 그보단 사회적으로 만들어진다고 봐야 하는 게 그 최소한이다.
임금 크기도 마찬가지다. <자본론>에서 사회적 관계들에 주목해 자본주의의 원리를 분석한 마르크스는 임금을 노동자가 노동의 대가로 받는 돈이 아닌, 노동자와 그 가족의 삶이 재생산(이른바 노동력이란 상품의 재생산)되는 데 드는 비용으로 분석했다. 얼핏 그게 그것인 얘기처럼 들리겠지만, 이러한 이해를 받아들인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임금은 노동자가 시장에서 몸소 소비되거나 직접 소비하는 돈의 문제만이 아니게 된다. 그보다 임금은 노동 현장의 온갖 문제들, 그리고 복지 사회와도 밀접한 무언가로 고찰된다. 예컨대 임금이 일터에서 소진된 노동력을 회복하며 다음 출근을 준비하는 데 드는 비용이라면, 임금 투쟁은 그 노동력 소진 정도에 직접 영향을 미칠 노동시간, 노동조건, 노동조직을 둘러싼 투쟁들과도 결코 별개일 수 없다. 그렇다면 임금 투쟁은 우리가 일터를 떠나 지갑을 열며 노동의 시름을 달래려 할 때만이 아니라, 바로 그 일터에서 노동하는 과정에서도 더 인간다울 수 있기 위한 싸움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마르크스는 임금 크기가 한 사회의 안녕과 노동자 계급의 요구 투쟁을 반영한다고 보기도 했다.
연장선에서 임금은 노동자의 (비록 실태 반영이 제대로 되지 않은 허울뿐일지언정) 식대, 위험수당, 근속수당, 주휴수당, 노후 보장비 등이 사회적으로 더 요구되고 또 인정될 때 비로소 인상되는 것이기도 하다. 사회보험도 마찬가지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력을 보전하기 위해 제때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으려면, 그 사회는 양질의 보건 의료 체계가 작동하고 있어야 한다. 어떤 사회에서는 그러한 서비스가 무상이어야 한다는 합의를 바탕으로 전 국민의 임금액에 의료보험료가 포함되기도 한다. 사람마다 기여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보건 의료비가 인간의 삶에 필수 비용임이 인정되는 것이다.
어디 노동자뿐이랴. 자녀와 부모, 가정주부, 노인, 장애인, 은퇴자, 실업자 등 자본에 직접 고용되지 않은 사람들과 소위 사회적 약자들에게 돌아갈 수당들도 임금을 통해 지급되거나 기금화되고 있다. 다소 이론적이지만, 이로써 한 사회의 총임금은 노동자 계급과 공동체의 요구가 자본 측에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관철됨으로써 몸집을 불리는 것으로 상상할 수 있다. 노동자들이 원하는 복지 사회의 실현도 바로 그 총임금에 달려 있다.
이쯤이면 최저임금의 의미도 다르게 음미될 수 있다. 임금이 담는 것이 우리의 생활과 생애, 사회 전체라면 생계의 ‘최소한’과 임금의 ‘최저’는 계급투쟁의 가장 높은 곳과 다름없다. 내가 ‘최저임금 1만원’ 투쟁을 여러 한계와 비판에도 불구하고 한국 경제에 대한 관점을 자본에서 노동으로 돌려놓기 위한 대담한 선포로 보는 이유다. 이미 더 물러날 곳 없는 노동자 서민들 귀에 대고 고작 ‘가계소비’나 읊조리고 있는 자본가와 그 친구들 앞에서 말이다.
최저임금 1만원. 물론 거저 얻어지진 않을 것이다. 국가와 정치권의 전향적 자세보다도, 매일의 노동 현장에서 노동자 계급이 강해지고 뭉치고 연대하는 게 더 중요한 싸움이다. 그러니 함께 외치고 상상하는 걸로 시작해 보자. “소비 진작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임금이고, 삶이다. 더 나은 노동이 있는 사회다!”[워커스 2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