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하림 / 정리 신나리 기자
작가 고등어는 도망가지 않는다. 자신이 겪은 구토, 욕망, 몸을 기억하며 이를 캔버스 위에 풀어낸다. 자신을 탐구한 시간은 타인과 세상을 돌아볼 여유를 선물했다. 나의 불안을 넘어 세상을 바라보며 세상에 놓인 자신, 그리고 당신. 우리의 몸을 이야기하는 작가. 하림이 고등어를 만났다.
하림(하) 어떻게 지내나.
고등어(고) 작년에 개인전만 하고 3월에 이곳(인천 아트플랫폼, 인천광역시가 구도심 재생사업의 일환으로 진행하는 복합 문화 예술 공간.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시각 예술을 비롯한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와 연구자들이 창작과 연구 활동을 하고 있다)에 들어왔다. 작업할만한 소스가 많아 인천이 좋다. 지난 3월에 입주해 내년 2월까지 머문다.
하 많이 밝아진 거 같다.
고 그런 얘기 많이 들었다. 에너지가 건강해졌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이곳에서 작가들을 많이 만나고 동료들이 많다는 게 작업에 도움이 된다. 입주 작가 중에 80년대 중반생이 많아 학교 기숙사 같은 느낌도 있다. 나를 열어 두는 시기가 필요한 것 같아 지금은 이 생활을 즐기고 있다.
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이유가 있나.
고 식이 장애가 있었다. 먹고 토해내는 과정을 반복했다. 심각할 때는 몸무게가 40킬로그램 나간 적도 있었다. 그래도 다이어트를 멈추지 못하고 불안에 시달렸다. 이런 몸으로 살아도 괜찮은 건가 하면서. 여자의 몸에 대한 사회적 편견에 시달리고 내 가치관이 정립되지 않았을 때다. 마르고 예뻐야 한다는 강박적인 마음만 가득했는데, 한 친구가 《달빛 아래서의 만찬》이라는 책을 권했다. 거식증과 폭식증을 오가는 현대 여성의 고통에 관한 책이었다. 고통을 겪는 여성들이 시를 쓰고 상담하고 그림을 그리며 치료를 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책을 읽고 미술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혼자 드로잉을 하기도 했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 1년이 채 안 됐을 때 블로그에 그림을 올렸다. 운이 좋게도 그 블로그를 우연히 보고 전시를 해 보자는 권유가 들어와 첫 개인전을 하게 됐다. 그 이후에 국립 현대미술관에서도 연락이 와서 전시에 참가했다. 2010년에는 고양시에서 하는 레지던스에 들어갔다. 전에 식이 장애를 겪었던 게 이즈음에 독이 돼 몸에 이상한 반응이 생기기 시작했다. 5년 넘게 식이 장애가 있었는데 그 당시에는 아픈 게 없었다. 겉보기에는 멀쩡했는데 시간이 지나니까 몸에 염증이 생기고 얼굴에 여드름이 나고 위경련이 생겼다. 아름다운 몸을 갖고 싶어서 다이어트를 했는데 내 시절 중 제일 추한 얼굴을 갖게 됐다. 스트레스도 많았다. 불안이나 식이 장애를 겪고 그걸 그림으로 표현한 것으로 알려지다 보니 히스테리, 멜랑콜리의 범주로만 소비된다는 생각이 들어 스트레스를 받았다.
하 나도 그랬다. 자유로운 영혼의 이미지가 관심이 있었던 적도 있는데, 그건 소스로서의 관심이었다. 내가 누군가의 자유를 대신 연구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걸 인정하고 나니 좀 편해졌다.
고 나도 그게 참 싫었다. 내가 나를 치유하기 위해 시작한 그림이었고 재밌었는데, 어느 순간 그려 내야 하는 상황이 됐다. 나중에는 예정된 작업도 취소했다. 2년 정도 그림을 안 그렸다. 연애하고, 드로잉 하고 책을 만들며 시간을 보냈다. 그 이후 몸이 관심사가 됐다. 아프면서 깨달은 게 많았다. 나를 컨트롤 할 수 없었다. 내 몸인데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거지. 병원도 많이 다니고 다 해봤는데 기다려야 한다고 하더라. 7년 주기로 몸이 도는데, 염증 질환은 스트레스 많이 받고 불안이 심해서 생긴다더라. 의사는 스트레스 받지 말고 불안해하지 말라 하는데 그게 어디 쉬운가.
하 고등어가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면 머리가 좋다는 생각이 든다. 오랜 시간 사람들이 고민하고 이야기해 왔던 걸 고등어는 스스로 해낸다.
고 (웃으며) 설마. 다만 몸을 내가 컨트롤 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고 나서 내 신체가 내 것이 아니라 사회 안에서 보이는 신체 안에 매여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섹스로 인해서 만들어지는 신체에 대해 생각했다. 성행위를 통해 만들어진 ‘두 번째 신체’에 대해 생각하고 작업하게 된 것이다. 사람이 내 신체 말고 다른 신체를 경험하는 순간이 있다면 그게 성 아닐까. 연애나 사랑을 할 때, 타인에게 나를 가장 열어 보이는 것 같다. 그때 만들어지는 신체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노동도 만들어지는 신체다. 3학년 1학기 즈음에 학교를 그만뒀다. 그 후 노동을 계속했는데, 노동자의 신체가 사회를 통해 만들어진 신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나를 컨트롤 할 수 없다는 걸 노동을 통해 다시 확인했다.
하 고등어는 면적에 접촉하는 모든 것들에 신경을 곤두세워서 세상과 나의 영혼 접촉면을 갖고 서로 소통하는 것 같다. 그런 고민을 노동, 여성에 대한 과정으로 10년 가까이 겪고 있는데 결론을 찾은 게 있나.
고 지금 식이 장애는 없다. 건강해졌다. 심리적으로 안정된 상태이기도 하고. 운동이 많은 도움이 됐다. 노동으로 만들어진 몸이 아니라, 나 스스로 움직여서 얻는 신체의 즐거움을 운동을 통해 깨달았다. 한강에서 1년간 일주일에 20~25킬로미터를 달렸다. 스스로의 몸을 사랑하게 된 기간이다. 몸이 건강해지니까 그림에서도 좋아진 게 드러났다. 내 그림의 출발이 불안, 히스테리, 멜랑콜리이다 보니 그동안 내가 내 안에만 있던 것 같은 생각이 들었는데, 몸이 좋아지고 이 과정을 경험하다 보니까 스스로 서게 됐다. 나를 객관화시켜 보고 작업도 객관화 시켜 보게 된 점이 제일 큰 발전이다. 전에는 스스로 작가라 생각하지도 않았고 작가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다. 최근에야 다양한 경험과 시크릿 액션(예술가들이 인권과 관련된 다양한 사례를 고민하고 그 이슈를 소재로 작품 활동을 한 프로젝트) 같은 작업을 하며 작가는 스스로 질문을 만들고 답을 찾아가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슬퍼요’ ‘나는 화나요’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대상을 내가 죽을 때까지 탐구해 나가고 싶은 것. 그래서 찾은 게 ‘두 번째 신체’라는 작업이다. 사람이 내 몸 외에 다른 사람 몸을 탐구할 수 있다면 생이 조금 가벼워지지 않을까 하는 질문을 품고 작가관이 조금 세워졌다.
하 욕망에서 자유로워진 거 같다. 예술을 통해서 달라진 건가.
고 눈을 외부로 돌리며 달라진 점이 생겼다. 일상적으로 내가 사용하는 신체, 몸이 있지 않나. 내 생각에 사람이 자신의 몸을 자각하는 게 딱 두 번인 거 같다. 고통을 겪을 때와 쾌락을 느낄 때. 타인에게 몸을 보일 때는 아픈 곳이 있을 때 아닌가. 그 부위를 드러내야 하고. 또 하나 몸을 보이며 스스로 자각할 때가 섹스할 때다. 그때는 내 몸이 다른 몸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 움직임도 다르고 근육도 다르고. 몸이 고통이나 아픔에 노출되는 것은 노동 때문일 수도 있다. 노동 환경에 따라서 경직되고 그 환경, 조건에 맞춰지는 것이다. 그에 따라 직업병도 생기게 되고. 다른 쪽으로 몸이 확장되는 건 섹스를 할 때, 내 몸과 타인의 몸이 접촉할 때다. 혼자서는 할 수 없고 타인이 있어야 하고 서로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관계를 통해 소통을 통해 쌓아가는 게 생기는 거다. 연애할 때랑 원나잇 할 때는 다르지 않나. 사랑에 기반을 두고 하는 성행위랑 즐기기 위해 하는 건 좀 다른 것 같다.
하 연애는 소통인데 시간과 몸과 돈이 서로 다르게 굴러가는 식으로 요즘의 연애가 이루어진다. 왜 그럴까.
고 관계에 있어 책임지기 싫어하는 게 유행이 되는 거 같다. 누군가와 연애를 한다는 건 그 사람과 내가 시간을 같이 쓰기 시작하는 거다. 그걸 감당하는 관계이기도 하고. 그런데 요즘 사람들이 불안해지다 보니 이 관계를 맺는 것에 관해 부담을 느끼는 것 같다. 스스로에 대한 지지대가 약해지고 불안이 커지다 보니까 다른 사람을 여기에 끌어들여 그걸 같이 감당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서로 연애를 안 하며 가볍게 즐기고 마는 관계. 연애 비슷한 걸 하긴 하는데 책임은 지기 싫어하면서 내가 욕망의 대상이 되는 걸 확인하기만 하고 말기도 한다. 우리의 욕망을 같이 구현하는 것보다 내가 욕망의 대상이 된다는 걸 확인하고 마는 것 같다. 자존감이 약해지다 보니까. 사실 내가 누굴 좋아하는 지가 중요한 건데, 이게 약해지다 보니까 내가 매력적인지 아닌지 어필할 수 있는지에만 혈안 되는 거 같다.
하 노동을 주제로 ‘노동요’라는 전시도 했다.
고 2년 전에 했다. 3년 동안 웨이트리스 일을 했던 곳에 대한 것을 풀어냈다. 당시 최저임금을 받았는데 가끔 재료보다 내 임금이 쌀 때도 있었다. 유기농 토마토보다 내 임금이 낮은 순간이 있더라. 웨이트리스가 하는 노동에 비해 대우 받지 못한다는 걸 철저히 깨달았다. 다만 가치가 비슷하고 그게 맞는 사람들이 모여 있어 돈독한 힘이 있어 그걸로 버텼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 전시가 히스테릭, 멜랑콜리에 대한 것으로만 비치는 게 싫어 알량한 마음으로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원래 다루지 않던 것을 다루다 보니까 어설퍼지는 부분이 있었다. 내가 일을 했고 내 친구들이 여전히 일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노동의 민낯을 더 드러내고 싶은데 그게 좀 어려웠다. 전시가 열리는 곳도 그 식당이고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그대로 노출된다. 사람들이 밥을 먹으며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을 다 보게 되는 것이다. 그게 풍경처럼 펼쳐지다 보니 여전히 일하는 사람들을 고려하게 되더라. 개인적으로는 아쉬움이 있는 전시였지만 앞으로 할 프로젝트에 대해 도움이 돼 좋은 부분도 있었다.
하 개인적으로 회화를 좋아한다. 상상을 펼치기도 쉽고 매력적이다. 고등어에게 회화는 어떤 의미인가.
고 회화가 제일 어렵고 제일 재밌다. 악마 같다. 마력적이다. 입체로 만들거나 영상, 다른 작업을 했을 때는 어느 정도 내가 생각한 것을 그대로 구현할 수 있었다. 그런데 평면은 내가 경험한 입체적인 것을 펼쳐놓기 쉽지 않았다. 그걸 구현하려고 바라보고 있을 때, 그림이랑 단둘이 놓여 있을 때, 이 세상 무엇도 필요 없는 순간이 온다. 둘이 대면하고 있는 느낌인데 외롭지 않고 고독하지도 않고 완전해지는 느낌이 든다. 누구도 보지 못했던 걸 내가 보고 만들어 가고 있다는 것에 대한 쾌감도 있다. 너무 어렵고 그래서 좋다. 물감이나 색연필을 만졌을 때, 시시각각 변하는 것을 마주할 때 내 몸이 살아 있는 걸 깨닫는다.
하 앞으로의 작업은 어떤 게 예정되어 있나.
고 이곳이 동일방직 근처다. 지금은 폐건물로 있는데, 한 기업이 1년에 한 번 그 공장에서 행사를 하며 개방한다고 들었다. 직접 보지는 못했는데, 예전 모습 그대로라 하더라. 일제 강점기에 여성 노동자들이 군복을 만들고 1960년대 넘어서 섬유업을 하다 노동 문제로 유명해진 곳이 동일방직 아닌가. 여성 노동자 1,300여 명이 일했는데 인권적으로 탄압받았다고 들었다. 최초 여성 노동위원장이 만들어진 곳이기도 하고. 노동자로서 억압이 심하니까 여성 노동자들이 알몸 시위도 했다. 회사에서는 똥물을 부으며 대응하고, 그게 세상에 공개되지 않았나. <위로공단>이라는 다큐에 이분들이 나오는데, 보면 그때 노동운동하던 분들이 지금 나의 엄마 세대, 50년대 생이 많았다. 회사에서는 당시의 동일방직이 화자 되기 싫어서 공장 운영도 하지 않고 문을 닫아 놓은 것으로 알고 있다. 공장문을 닫기 직전에는 이주노동자가 와서 일했는데, 그 사람들의 물건도 그대로 있다고 들었다. 기숙사 사물함에 붙였던 스티커도 그대로 다 있고, 그게 참 매력적인 공간으로 다가왔다. 아트 플랫폼에서 협업프로젝트를 한다. 연말에 전시하는 건데, 팀을 꾸려서 동일방직 관련 전시를 했으면 좋겠다는 큐레이터의 제의를 받았고 참여할 계획이다. 올해는 리서치, 조사 작업을 하려고 한다. 동일방직이라는 공간은 역사적으로 보존해야 할 의미가 있지 않나.
하림 – 음악가이자 화가 그리고 기획자. 자기만의 음악색이 또렷해 보헤미안 뮤지션, 한국의 히피라는 호칭이 붙는다.
고등어 – 화가. 몸을 탐구하는 작가. 사회, 노동이 만든 나의 몸과 타인을 통해 만들어진 나의 몸을 풀어내려 한다. (워커스 19호. 2016.07.18)
헬스장 다닐 때 골고루 근육을 키워야지 팔운동만 하면 팔 근육이 비대해진다고 하더라고요
팔 힘줄과 근육 정도를 보면 건설노동자를 구분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하더라고요
노동으로 만들어진 신체는 흥미로운 주제네요
좋은 인터뷰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