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석(서울과학기술대 교수)
알파고 대국을 통해 구글은 딥러닝 기술의 프로모션에 성공한 듯싶다. 국내 인공지능의 사회적 관심이 꽤 최근까지 과열됐으니 말이다. 그나마 국내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그 관심은 기세가 한풀 꺾였다. 그 와중에 중국 하이테크 관련 무역전시회에서 벌어진 작은 에피소드가 우리의 눈길을 끌었다. 전시 참관객들에게 재롱을 떨고 안내를 맡았던 인공지능 로봇 ‘샤오팡’이, 순간 제멋대로 오작동을 일으켜 ‘난동’을 부리고 사람이 다치는 일이 생겼다. 이 사건은 전투용 로봇도 아닌 겉보기에 유순해 보이는 안내서비스 자동 로봇조차 인간에게 큰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점을 확인시켰다. 알파고와 샤오팡과 같은 로봇이 앞으로 하이테크 기술의 희망 섞인 미래 플랜이자 동시에 불운한 인공지능의 징후들이라 보면 지나친 상상일까? 하지만, 선택의 시간은 도래하지 않은 채 인공지능 기술은 저 멀리 달음질쳐 갈 것이다.
대부분의 인공지능 이슈가 전문가와 기업만의 암흑 상자(블랙박스) 안에서 움직인 데 비해, 일자리 효과 문제는 아직도 대중의 큰 관심과 논쟁을 야기하고 있다. 대다수 노동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미래 생존과 먹거리 문제는 단연 큰 관심사기 때문이다. 현재 주요 논의는 인공지능에 의한 일자리의 대체와 실업률의 속도에 쏠린다. 지배적 정서는 인공지능 기계에 의한 노동 대체 속도가 새로운 일자리 창출보다 현저히 커서 궁극에는 거의 모든 인간의 노동을 흡수해 자동 기계화할 것이란 비관이다. 이를 입증하려는 연구 보고서는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온다. 2013년 옥스퍼드 대학교수들의 연구에 따르면, 향후 20여 년 안에 전 세계 일자리 50% 정도가 소멸할 것으로 시뮬레이션 예측을 하고 있다. 세계경제포럼의 ‘직업의 미래’ 보고서 또한 2020년까지 710만 개 일자리가 사라지는 대신 신규 직업은 200만 개로 점치고 있다. 독일 노동부도 향후 2025년까지 자동화로 150만 명의 일자리가 독일에서 사라질 것으로 전망하는 보고서를 발간했다. 미래사회학자 제레미 리프킨 또한 이미 <한계비용제로사회>에서 이와 흡사하게 ‘노동의 종말’을 예측한 적이 있다. 결국 이런 많은 예측은 산업 공장굴뚝시대의 산업예비군의 의도적 양산과 다른, 기술의 고도화에 따른 ‘기술 실업’(technological unemployment)이자 ‘노동 공황’의 도래를 설명한다.
‘기술 실업’의 미래에도 불구하고 향후 일자리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아 보인다. 그 정반대의 기류도 함께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실상 4차 산업혁명의 중요한 기술로 언급되는 인공지능이 급속히 ‘노동의 종말’을 낳는 원인 제공자이기도 하지만, 공유경제나 메이커(maker) 운동 등 새롭게 부상하는 다른 기술 변수가 기술 고용을 다른 방식으로 촉진하기도 한다. 4차 산업혁명이 정보, 생명과 지능 영역에서 동시다발적 기술 혁명의 출현임을 감안하면, 이들 새로운 기술 변수가 자가(DIY) 수공업적 제작 문화와 자기 고용 형태의 노동과 일자리 형성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일부에서 기술 실업을 만들기도 하지만, 많은 부분은 새로운 산업 영역을 형성하면서 하이테크형 수공업으로 먹고사는 자영업자를 양산할 공산이 크다.
무엇보다 플랫폼 비정규직 노동경제로 불리는 최근의 ‘긱’(gig) 경제에서 플랫폼 노동을 제공할 수많은 불안정 프리랜서들의 숫자 또한 ‘노동의 종말’을 상쇄할 여러 비정규 일자리를 만들어낼 것이다. 4차 산업혁명에서 이들은, 마치 우버의 프리랜서 운전자나 아마존닷컴의 무수한 ‘크라우드 노동자’(cloud worker)라 불리는 이들만큼이나 많은 익명의 고용 없는 노동자층을 형성할 확률이 높다. 메이커 운동의 자가 고용직업군이나 플랫폼 경제의 거의 모든 잠재적 프리랜서들은, 사실상 현재의 일자리 부족 예측과는 달리 새로운 형태의 광대한 ‘비정규’직 노동의 일상적 고착을 불러올 수 있다. 이는 인공지능 자동화에 따른 일자리 소멸이라기보단, 새로운 일자리가 폭넓게 부상하되 인류 대다수에게 매우 척박하고 불안정한 비정규 고용 시장이 보편화할 것임을 시사한다.
또 중요한 변수 하나가 있다. 작업장 내 기계 자동화의 도입 조건은 여전히 생산비용이나 기업가-노동자 사이의 생산관계에 따라 조절될 확률이 높다. 즉, 노동 단가의 문제, 비용 절감의 문제, 전문 기술 혹은 단순 반복업무의 조건 등 기술 대체 효과, 시장 외부 상황 등에 따라 자동화의 진전 혹은 인공지능의 도입에 대한 완급을 조절하는 일이 이뤄질 수밖에 없다. 이미 이렇게 기술도입 비용, 노동자의 노조 전투력, 조직적 사회적 변수에 따라 인공지능에 의한 노동력 대체의 수위가 달라지는 것은 자본주의의 생산 기계 도입의 중요한 근거였다. 역사적으로 자본주의 생산은 자동화 기술 도입을 통해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높이려 했지만, 무엇보다 자본가와 노동자와의 힘겨루기 때문에 그 구성비는 끊임없이 조절됐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독일의 일부 기업에서는 최근 노사가 사업장 내 자동화 로봇 도입의 적정 수준을 합의하는 테이블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도 생산 현장에서만큼은 인공지능 등 자동화 도입의 수위 조절을 논의할 때이다.
대규모 사업장 고용에 있어 인공지능이나 자동화 로봇을 차라리 인간 노동자로 대체하려는 역진화 현상도 주목할 만하다. 일본 도요타 자동차 회사의 경우에는, 최근 ‘카미사마’(Kami-sama; 神様), 즉 신이라 불리는 자동차 조립 공정의 전문 장인들의 복귀를 서두르고 있다. 역사적으로 ‘적시’(just-in) 생산 등 일본 자동차업계 내 광범위한 로봇 시스템의 도입과 확장으로 직장을 잃었던 카미사마들에게, 도요타는 이제 다시 새로운 컴백의 기회를 부여하고 있다. 이로부터 도요타는 자동차 생산의 쾌속 생산이나 비용 효율성이나 절감 효과보다는 좀 더 근본으로 돌아가 안정적 고용 관계와 일자리 확보를 통해 사업 이윤을 도모하고자 한다.
우린 이들 몇 가지 역진하는 조건들이 인공지능의 도입에 따른 비관적 예측과 달리 기술 실업 속도의 완급을 조절하는 역할을 하리라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는 먼 미래에 자동화와 인공지능에 의한 노동대체가 거의 현실화될 공산이 크다. 노동의 종말이 쉽게 도래하지 않을 미래라 하더라도, 여전히 ‘고용 없는 성장’의 난감한 미래 상황에 대한 준비는 필요해 보인다. 그렇다면 우린 지금 당장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 극단적으로 인공지능 파괴와 같은 제2의 네오-러다이트운동을 펼쳐야 하는가? 아니면 시장에서 앞으로 살아남을 이들만을 위한 소프트웨어 코딩과 알고리즘 교육이나 받아야 하는가? 이보다 본질적인 사회적 대안을 마련하려는 움직임이 필요한 시점이다.
실리콘밸리와 기본소득
최근 노동의 자동화에 따른 글로벌 기술 실업의 문제에 대한 해법으로 ‘기본소득’(basic income)이 중요한 화두로 떠오른다. 애초 기본소득은 자산이나 소득, 경제적 능력, 고용 상태에 상관없이 매달 일정 금액을 국가에서 일괄적으로 각 국민에게 균등하게 지급 보조하는 제도로 제기되었다. 기본소득의 핵심은 생존의 기본 조건을 보장하는 취지이기도 하지만, 소비나 구매 능력 없는 다수 노동자를 배양해 시장을 살리고 이들의 실업 빈곤 범죄를 예방하는 효과를 얻으려 한다. 최근에는 기본소득의 도입이 기술 실업에 따른 경제적 궁핍을 겪을 노동자들의 우울한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서 정부와 기업이 고민해야 할 근본 구제책으로 제시되고 있다. 예를 들어, 미국 오바마 대통령조차 디지털 문화 잡지 <와이어드>의 2016년 11월 특집호 인터뷰에서 미국 내 기본소득 도입을 우호적으로 피력한 바 있다.
흥미로운 지점은 그 어느 단위보다 최근 열렬하게 기본소득의 도입을 설파하는 집단이 실리콘밸리 기업이라는 점이다. 실리콘밸리가 정보통신기술을 매개한 자본주의 진화의 주요 근거지임을 고려한다면, 기본소득을 소리 높여 외치는 실리콘밸리 기업들의 행보를 좀 더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다만 실리콘밸리에 그리 우호적이지 않은 트럼프의 대선 승리로 인해 노동의 자동화와 인공지능의 도입이 지금처럼 빠르게 진행될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 요약 건대, 전기자동차 테슬라의 창업자 엘론 머스크, 벤처자본가 마크 안드레센, 기술전문가팀 오라일리, 벤처창업 투자기업 Y콤비네이터 회장 샘 알트만 등이 실리콘밸리 안팎에서 기본소득의 전면적 도입을 주장하는 대표적 인물들로 알려져 있다. 예를 들자면, 스위스, 독일, 핀란드 등 국가 단위의 기본소득 도입 움직임에 자극받은, Y콤비네이터는 실제 뉴질랜드 오클랜드 지역 100개 가구에 6~12개월 동안 1,000달러에서 2,000달러의 최소 임금을 조건 없이 지급하는 파일럿 실험을 시도하고 있다. 그 규모나 액수는 아주 적지만, 이것이 기존의 시도와 다른 것은 닷컴 기업 자신이 직접 나서서 인간 노동이 기술로 대체된 이후의 미래 대비 실험을 구상하는 데 있다.
Y콤비네이터는 주민들이 노동의 종말 이후에 창의적 여가 활용에 기여하는 길과 기술-인간의 공존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 이 기본소득 프로젝트의 목적이라 주장한다. 하지만, 허울 좋은 공유경제와 대중 모두를 불안정한 비정규직 노동자로 만드는 ‘긱’ 경제와의 실질적 결합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테크노 자본주의 혹은 실리콘밸리 이데올로기의 현대적 비전으로 ‘기본소득’이 활용될 우려가 커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즉 실리콘밸리의 기본소득 제안은 최소 수준에서 실업수당을 보존하는 선에서, 인공지능 기술의 전면화로 인한 기술 실업을 우리가 미래 현실에서 ‘참을만한 것’이자 노동자들의 큰 저항 없이 용인 받으려는 선제 제스처로 볼 수 있다. 이것이 기우이길 바라지만, 사실상 이런 우려에 대한 심증을 굳힐 수밖에 없는 것은 현재 실리콘밸리 내부에 하청노동 등이 다른 어떤 산업영역에 비해 꽤 보편화됐다는 사실이다. 특히 흑인이나 라틴계 노동자들의 고용 불평등 문제가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다. 이런 위계화 된 노동문화를 암암리에 후원하는 실리콘밸리 노동문화가 기본소득을 적극 도입해 어떤 고용 안정이나 다른 사회적 ‘일’의 가치를 독려하리란 점은 믿기 어렵다. 그렇게 보자면, 실리콘밸리의 기본소득 주장은 일종의 노동의 종말 이후 생존배당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사실상 이도 또 다른 미국 서안의 자유주의 기술혁신론, ‘실리콘밸리 이데올로기’의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풀어야 할 문제들
사실상 일반인이 지금 당장 느끼는 제4차 산업혁명의 본질은 대부분의 세계 인구가 스마트기기를 갖고 수행하는 데이터 활동에 기반 해 이윤을 꾀하는 동시대 데이터 사회의 모습이다. 기본소득의 도입 근거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다. 일상 속 ‘데이터 부스러기’(data exhaust) 활동이 기업의 수익으로 수취되는 새로운 빅데이터 시대는 다종다양한 플랫폼에서 수행하는 일반 대중의 데이터 노동과 데이터 생산을 일반화한다. 문제는 대중이 만들어내지만 그들 자신의 수익으로 귀속되지 못하고 플랫폼 업자에게 대부분 재전유되어 데이터 결과물에 대한 사회적 보상이 소실되는 데 있다. 자발적으로 온라인 ‘잉여’ 활동을 수행하는, 무직자를 포함한 대다수 대중의 ‘부불 노동’(free labor)에 대한 적절한 ‘사회적 증여’(gift)나 사회적 보상책이 기본소득을 통해 마련될 필요가 있다. 대중의 점증하는 데이터 생산 활동에 대해 직접 찾아다니며 이의 노동 대가를 지불하기 어렵다면, 정부가 나서 시민들이 매일매일 수행하는 온라인 혹은 모바일 데이터 노동 결과물에 대한 사회적 보상안을 마련하고 이를 기본소득으로 책정해 지급하는 일을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이렇듯 데이터노동의 보편성에 대한 사회적 보상 주장이나 인공지능으로 인한 기술 실업을 대비하기 위한 실리콘밸리 주축의 기본소득 도입 주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본소득의 도입이나 문제 해결은 쉽지 않다. 우선은 기본소득의 책정 범위다. 현존하는 사회복지의 재원을 대체하는 수준에서 기본소득이 책정되어 쓰인다면 그저 생색내기이자 단순히 경기 부양 효과에 그칠 공산이 크다. 제대로 된 기본소득의 도입이 현실화되려면, ‘노동의 종말’ 이후 인간 자율의 ‘일’을 후원하기 위해서라도 도시생활 노동자 평균 임금 수준에서 조건 없는 기본소득 지급이 필요하다. 장차 이런 기본소득의 재원을 어디서 마련할 것인가의 문제도 중요하다. 노동자 자신의 고용 수입에 대한 기존 세금으로부터 이를 걷어 다시 그들에게 재분배하는 것은 부정적이고 퇴행적 방식이다. 오히려 부자 누진세로부터 공통의 재원을 마련하고, 보다 직접적으로는 기술 실업에 상당수 책임을 지닌 첨단 기업들에서 로봇세(인공지능세 혹은 자동화세)를 거두는 것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물론 핵심은 기본소득을 만병통치로 보는 것을 피해야 한다. 기본소득을 인간 존엄과 품위 유지를 위한 최소 수준의 사회적 안전망 역할로 접근해야 한다. 현실의 경제적 불평등 구조를 온전히 놔둔 상황에서 기본소득은 일종의 현실의 모순을 잊는 진통제 같은 효과만을 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기본소득은 출발이지 궁극의 목표가 돼서는 곤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