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랫폼은 어원상 주변보다 약간 높게 위치한 수평의 평면을 가리킨다. 기차역에서 선로보다 조금 높아 승객이 기차에 타거나 내릴 수 있는 장소인 승강장으로 우리는 흔히 기억한다. 플랫폼은 청중들의 위치보다 다소 높은 곳에 있는 연설자의 단상을 가리키기도 한다. 영어권에서는 선거에 출마하는 정치인이나 정당이 내세우는 정견이나 공약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요즘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플랫폼은 디지털 미디어나 네트워크를 사용하는 비즈니스 모델이다. ‘카카오톡’은 메시지 플랫폼이고 ‘요기요’ 같은 앱은 음식배달 플랫폼이며 ‘카카오드라이버’는 대리운전 플랫폼이다. 물론 우리가 흔히 플랫폼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러한 것에만 한정되지는 않는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미디어 플랫폼인 유튜브, 페이스북, 트위터, 위키피디아에서부터 소매업 회사인 아마존과 알리바바, 온라인 공개강좌인 무크(MOOC) 시스템, 교통을 매개하는 우버, 여행 및 숙박임대를 위한 에어비엔비는 비교적 잘 알려진 플랫폼 중심 기업과 서비스다.
이런 낯익은 영역에서뿐 아니라 에너지나 금융, 의료와 농업, 자동차나 중공업의 영역에서도 플랫폼 비즈니스로 산업 형태와 기업 경영 방식이 재편되고 있다. 말하자면 우리가 플랫폼이라고 부르는 것은 몇몇 미디어 기업이나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사업에 한정되지 않으며 산업과 경제활동의 전반적인 변화를 추동하고 있다. 아마도 곧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플랫폼의 영향 아래에 들지 않는 것이 없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이제 플랫폼은 모든 것들의 ‘판’을 바꾸어 놓게 될 어떤 것이라고 생각해보자.
플랫폼이라는 새로운 ‘판’의 등장
플랫폼은 어떤 특성으로 새로운 ‘판’을 짜는 매개체가 되고 있을까? 기본적으로 플랫폼에는 생산자가 공장이나 사무실 내부에 있지 않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그 말은 기업이 생산자 혹은 노동자를 고용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다. 플랫폼 기업 외부의 생산자들은 역시 외부의 소비자들과 플랫폼을 통해 상호작용하면서 각자 원하는 가치를 창출하거나 목적을 달성한다.
플랫폼 기업은 플랫폼(모바일 앱이 될 수도 있고 기업의 경영 형태나 신기술일 수도 있다)을 마련하고 그 ‘판’을 열어 둠으로써 누구나 소비자 혹은 생산자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렇게 되면 플랫폼 기업은 우선 내부의 생산자, 즉 노동자를 직접 고용하지 않음으로써 4대 보험과 같은 각종 부대비용과 고용주로서의 다양한 책임을 면할 수 있다. 노동자들이 머무르고 일할 장소를 마련할 비용도 절약할 수 있고 노동환경 개선이나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노동조합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 생산자나 소비자의 입장에서도 손해보는 것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여유 시간에 앱을 통해 자신의 노동력이나 기술이 필요한 장소에서 일을 하고 그만큼의 대가를 받을 수 있다. 서비스 구매자 혹은 소비자의 경우에도 필요한 시간과 장소에서 즉각적인 상품이나 서비스의 구매가 가능하다. 이 플랫폼이라는 체계 내에서는 마치 어느 누구도 질 수 없는 환상적인 게임을 벌이고 있는 것만 같다. 흔히 유토피아라고 부를, 완벽하게 자급자족이 가능한 어떤 이상적인 공동체의 ‘판’이 실현되는 것처럼 보인다.
플랫폼 자본주의에서 크라우드 워커로 존재하기
이처럼 생산과 소비가 하나의 열린 체계 안에서 해결되는 이상적인 거버넌스를 플랫폼의 ‘생태계’라고 부른다는 점은 어쩌면 그 ‘판’의 실체를 밝히는 데 힌트를 줄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때 플랫폼의 ‘생태계’는 먹이 사슬이 아닌 ‘가치 사슬’로 복잡하게 얽혀있는데, 그 사슬은 순환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포식자와 피식자의 관계, 에너지(혹은 가치) 생산자와 소비자의 관계가 유지된다. 일면 자유로워 보이는 플랫폼 생태계 내의 수많은 생산자 개인의 노동은 가치 사슬의 가장 근본적인 단계에서 플랫폼 전체를 먹여 살리는 역할을 한다. 구성원 모두가 윈윈인 것처럼 보이는 구조 속에는, 사실 물리적이고(때로는 비물질적이고) 생체적인 노동이 그 구조 전체를 지속시키기 위해 포식(착취)되고 있는 셈이다.
이 ‘판’에서 피식자인 노동자 혹은 생산자의 위치는 위태롭기 짝이 없다. 플랫폼 형식으로 경제 전반이 운영되는 ‘플랫폼 자본주의’ 내에서 노동자는 ‘크라우드 워커’(crowd worker)가 된다. 명목상으로는 현대 사회의 자유로운 산업예비군이지만 실질적으로 비정규직 및 실업자에 해당한다. 이들 ‘크라우드 워커’의 존재는 우리나라에서라면 배달 노동자나 대리 운전자로 이해될 수 있다. 음식 배달이든 차량 운전이든 수요가 있는 곳에 적시에 공급될 수 있도록 크라우드 워커는 플랫폼 앱을 장착한 모바일 기기들(스마트폰)을 소지한 채 곳곳에 흩어진 군중처럼 움직인다. 플랫폼을 통해 직접 혹은 대행업체를 거쳐 주문(콜)이 들어오면 이들은 자신이 위치한 장소를 중심으로 주문을 받고 그 주문을 ‘수행’한다. 고객은 플랫폼 앱을 열고 주문의 내용과 장소를 입력하고 지불하기만 하면 된다. 플랫폼 업체는 앱을 수시로 업데이트하고 고객의 평가와 크라우드 워커들에 대한 별점만 관리하면 된다.
그러나 소비자(고객)에게 서비스를 제공할 뿐 그 어디에도 소속되거나 고용되지 않고 오로지 모바일 플랫폼 앱을 통해서만 부여된 업무를 수행하기만 하면 되는 크라우드 워커는 노동 과정에서 필요로 하는 모든 부대비용을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 플랫폼이 우리의 경제를 ‘틀’짓고 새로운 삶의 ‘판’을 짜는 세상에서는 마치 모두가 손가락 클릭 몇 번으로 (플랫폼과 상호작용만으로) 서비스와 상품의 거래를 완료할 수 있는 단순하고 깔끔하게 자동화된 ‘생태계’가 성립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플랫폼 자본주의 아래에서 우리는 누구도 크라우드 워커의 운명을 피할 수 없다. 아니 우리는 이미 플랫폼이 제공하는 ‘틀’ 속에서 크라우드로 존재하며 단순하고 깔끔하지만 위태로운 비정규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