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민(문화연구자)
며칠 전 휴일 아침, 미국 하와이에서 긴급문자 한 통이 주민들에게 발송됐다. 대륙간 탄도미사일이 하와이로 날아오고 있으니 즉시 대피소로 피하라는 내용이었다. 훈련 상황이 아니라는 말까지 있었다. 그곳은 순식간에 공포의 도가니로 변했다. 시스템 오작동으로 잘못 발송된 문자였다고 공표하기까지는 38분이 걸렸다. 그동안 하와이 주민들과 여행객들은 곳곳에서 울리는 사이렌 소리를 들으며 북한이 핵미사일을 쐈을 것이라는 공포에 휩싸여 자동차를 몰고 이미 꽉 막힌 고속도로로 나오거나 허둥지둥 근처의 대피소로 숨었다. 지난해부터 이어진 북한의 핵 및 미사일 실험과 미국의 북한 선제타격 주장,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의 숨 막히던 설전은 단순한 시스템의 오작동을 의심해볼 기회는커녕 이 사태가 실전이라고 믿을만한 아주 완벽한 배경을 제공했다.
<시민 케인>으로 유명한 미국의 영화감독 오손 웰스가 20세기 초 라디오 드라마 제작자였던 시절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당시 웰스는 외계인이 침공한 상황을 너무나 실감 나게 방송하는 바람에 수많은 청취자가 대피하고 심지어 총까지 들고 나온 소동이 있었다. 사람들은 화성인의 지구 침략이라는 과학소설(SF)의 소재에 꽤 익숙해졌었고, 긴급속보의 형식을 취한 드라마 양식, 방영 시간 등 여러 요소가 현실과 우연히 섞이면서 대중을 공포 속에 몰아넣는 효과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번 해프닝도 믿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꾸준히 쌓인 일련의 내러티브 덕택에 발생했다.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은 올해 신년사에서 미국 본토가 북핵 타격의 사정권 안에 있으며 자신의 사무실 책상 위에 핵단추가 항상 놓여있다고 말했다. 뒤이어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개인 트위터를 통해 자신의 책상 위에는 더 큰 버튼이 있으며 실제 작동을 한다고 유치하게 대꾸했다. 적대국 지도자 사이의 이러한 도발은 마치 가짜뉴스가 현실에서 힘을 가지듯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 하나의 믿음 체계로 구축돼 갔다.
한 사람에 의한 순간의 선택이 인류 전체를 절멸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대륙간핵탄도미사일에 대한 공포는 동서 냉전 시기에 극대화됐다. 그러나 80년대 말 이후에는 어느새 대중들의 뇌리에서 사라졌던 것이 사실이다. <닥터 스트레인지러브>나 <크림슨타이드> 같은 영화들은 우발적인 사건들이 어떻게 연쇄 작용해 핵전쟁이 발발했는지 보여준다. 한 지도자의 오해나 고집으로 핵미사일을 발사하게 되면 상대국의 지도자도 어쩔 수 없이 적국을 향해 핵미사일 발사를 명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원인이나 결과와는 무관하게 양측 모두 절멸에 이르게 된다. 실제로 기계의 오작동으로 인해서건 인간의 실수에 의해서건 냉전 시대에는 일촉즉발의 위기에 이르렀던 적이 한두 번도 아니었다.
필요한 것은 정치적, 기술적 프로토콜
대통령의 책상 위에 놓여있는 빨간색 단추는 대중들의 상상 속에서 인류의 절멸이라는 위기의 최고조로 나아가는 하나의 상징물로 존재한다.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는 알 수도 없고 그 크기가 미사일의 크기나 폭발의 강도에 비례할 리도 없지만, 허풍선이 지도자들은 마치 그것이 자신들의 손이 닿는 곳에 있는 듯 큰소리친다. 핵 개발과 확산에 반대하고 환경을 염려하는 미국 과학자들의 단체인 ‘참여 과학자 모임’(Union of Concerned Scientists)에 따르면, 미국 대통령에게 손가락으로 누르는 핵무기 발사 단추는 없다고 한다. 대신에 대통령이 되면 핵무기를 발사할 수 있는 어떤 코드(암호)를 부여받는다. 미사일이 미 본토에 도달하는 데 30분이 소요되고 그 안에 대응해야 하므로 대통령 비서진은 늘 ‘풋볼’(football)이라 불리는 가방을 지니고 다닌다. 이 풋볼 안에 핵무기 발사에 사용되는 선택지가 기재된 문서가 들어 있다. 대통령이 부여받은 ‘비스켓’이라는 작은 카드에는 매일 바뀌는 비밀 코드가 적혀있고 그가 발사 명령을 내리면서 암호가 일치한다면 실제로 미사일 발사가 이루어진다. 900기 가량의 핵무기들이 60초 이내에 (잠수함에서는 12분 이내에) 즉각 발사될 수 있다.
상대방의 진의를 알 수 없고 시스템의 오류인지 혹은 인재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핵미사일이 발사된다면 뒤이은 상호 절멸의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위기가 고조되던 남북한 간의 대결 국면이 올해 초부터 대화 국면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남북 사이에는 그런 오해나 오류가 개입될 여지가 없어야 할 것이다. 하와이에서 발생한 오류가 서울에서 발생했다면 어떤 사태가 초래되었을지는 상상하기도 끔찍하다. 우리에게는 판문점에 설치된 남북직통 전화가 있으니 안심해도 될까? 적어도 상대방의 진의를 확인하고 대화 하려는 태도가 유지된다면 상호 평화를 추구할 수 있겠지만, 기술적 시스템은 우리의 뜻과 의지를 잘 포착하고 전달할 수 있을까? 북한의 평창올림픽 참가로 이어지는 남북 화해 무드 속에서 판문점 남북직통 전화 기기의 화면에 보이던 낡은 윈도우즈 XP 운영체제가 눈에 띈다. 우리는 저 시스템을 가지고 서로 대화할 수 있을지, 어떤 획기적인 시스템 업데이트가 필요하지는 않을지 궁금하다. 우리에게 오히려 필요한 것은 적에게 미사일을 날리는 빨간색 단추가 아니라 상대의 전화기를 울릴 다양한 단추들과 적절한 정치적, 기술적 프로토콜에 대한 준비다.[워커스 3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