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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은 폐기될 수 없다

2018년 2월 2일Leave a comment39호, 레인보우By 박종주

사계

박종주(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충청남도 도민인권 보호 및 증진에 관한 조례를 폐지한다.” 지난 12월 15일 충남도의회에 발의된 〈충청남도 도민인권 보호 및 증진에 관한 조례 폐지조례안〉의 전문이다. 지난 2012년에 제정(2015년 전부개정)된 이른바 ‘인권조례’에 대한 폐지안이다. 자유한국당 김종필 도의원의 주도로 같은 당 소속 23명, 국민의당 소속 1명, 무소속 1명 등 충남도의원 (전체 40명 중) 25명이 발의한 이 안은 말 그대로 기존의 인권조례 폐지 이외엔 아무런 내용도 갖고 있지 않다. 결국 인권 개념 자체를 폐기하려는 시도 이상도 이하도 아닌 셈이다.

발의자들은 “지금까지 도지사는 도민의 인권 증진을 위해 인권위원회와 인권센터 설치, 인권 보호 및 증진사업을 펼치는 노력을 해왔지만, 진정한 인권 증진보다도 도민들 간에 역차별과 부작용 우려에 따른 이견으로 갈등관계가 지속되고 있는 실정”으로 “충남도민 상당수가 본 조례 폐지를 청구 중”이기도 하다며 “도민의 뜻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조례를 폐지하려는 것”이라고 제안 이유를 밝혔다.

저 말은 사실일까? 사실이라면, ‘충남도민 상당수’는 왜 조례 폐지를 요구하고 있는 걸까? 인권조례를 폐기하라는 요구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충남기독교총연합회 등 보수 개신교 세력을 중심으로 조직된 폐지 요구 서명에는 8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서명했다. 이들이 조례 폐지를 요구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들에게 ‘인권’이라는 단어가 (거의 반사적으로) 성소수자의 권리, 그리고 무슬림의 권리라는 것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제안 이유의 “역차별과 부작용 우려”란 결국 성소수자와 이주민의 권리 보장을 가리키는 말일 뿐이다.

충남 인권조례는 ‘인권’을 ‘「대한민국헌법」 및 법률에서 보장하거나 대한민국이 가입·비준한 국제인권조약 및 국제관습법에서 인정하는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및 자유와 권리’로 규정하고 있으며 구체적인 관련 제재 조치를 담고 있지는 않다. 다시 말해 이 조례는 구체적인 반차별 정책을 담고 있지 않은 상징적인 조례로서 폐지한다고 해서 당장 현실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이들이 폐지 운동에 열을 올리는 것은, 보수 개신교든 보수 정당이든 성소수자와 이주민을 희생양 삼아 세력 결집을 꾀하기 위해서다.

현실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폐지돼도 별 상관없는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다. 인권조례는 다분히 상징적이지만, 동시에 인권 관련 기본 정책 계획 수립 방향을 규정하는 것으로 시작해 인권 선언 개발 및 준수, 관련 기관의 설치 등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당장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지 몰라도 미래가 달라지는 것이다. 인권의 개념을 점차 확대하는 데에, 그리고 그것을 선언에서 현실로 끌어오는 데에, 강력한 지침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 2014년 선포된 〈충남도민 인권선언〉은 차별 금지 사유로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 등을 들고 있다. 이런 사유들을 포함하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없는 한국 사회에서, 비록 강제력은 없을지언정 인권조례는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리키는 중요한 이정표로 기능한다. 도의원들이 단순히 세력 결집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표현대로 “능동적으로” 도민의 뜻에 대처하고자 한다면 민주주의의 기본인 인권의 보장 및 증진에 대한 이 이정표를 보수 개신교계의 입김을 좇아 이렇게 뽑아 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여성의 것이든, 아동청소년의 것이든, 노동자의 것이든, 장애인의 것이든, 성소수자나 이주민의 것이든, 인권을 생각하는 이라면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누구의 인권은 보장하고 누구의 인권은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는 인간으로 대접하고 누구는 인간 이하로 취급하겠다는, 결국은 민주주의의 기본을 부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성소수자 인권보장을 이유로 인권조례와 인권선언이 폐기될 수 있다면, 그다음 국면에서 폐기되는 것이 〈근로자 권리 보호 및 증진에 관한 조례〉가 될지 〈장애인 차별금지 및 인권보장에 관한 조례〉가 될지 누가 알겠는가.

1월 한 달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한동대에서는 페미니즘 강연과 성적 정체성을 이유로 학생이 징계위에 회부되었고, 대법원은 동성애 탄압을 사유로 난민 지위 부여를 거부했으며, EBS는 성소수자를 주제로 한 방송에 보수 세력의 항의가 이어지자 성소수자 패널을 하차시켰다. 이런 일들은 단지 개별적인 사건이 아니다. 인권을 폐기하려 드는 이 사회의 움직임이자 사회를 그렇게 만들고 자신들의 세력을 모으려는 보수 세력의 움직임이다. 하나의 거대한 흐름이다. 이 흐름 앞에서 우리는 외쳐야 할 것이다. 인권은 조각조각 나눌 수도, 내키는 대로 폐기할 수 없다고 말이다.

현재 대다수 시도단위에 인권 관련 조례가 있지만, 이런 흐름이라면 언제 폐지 위기에 몰릴지 모를 일이다. 또한 유지된다고 한들 이를 지지해 주는 상위법이 없는 상황에서 그 한계는 분명하다. 차별을 막고 인권을 보장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이를 가능케 하는 법 ― 예컨대 포괄적 차별금지법 ― 을 만들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함께 외쳐야 할 것이다. 인권은 폐기할 수 없는 것일 뿐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세워 가야 한다고 말이다.[워커스 3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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