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영(성과재생산포럼)
‘성’을 ‘권리’로서 이야기할 수 있을까? 권리로서의 성은 어떠한 내용으로 구성될 수 있을까?
2013년, 십대섹슈얼리티인권모임은 1장 ‘자신의 몸을 긍정적으로 경험할 권리’에서부터 5장 ‘자신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권리’까지 총 5장 16개 조로 작성된 ‘청소년 성적 권리 선언’을 발표했다. 선언문에 따르면 청소년은 2차 성징에 따른 몸의 변화를 수치심 없이 경험할 권리, 자신의 몸에 대해 자긍심을 가질 권리, 자신의 몸 상태에 따른 배려와 지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교육당국은 청소년이 자신의 몸에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충분한 교육을 제공해야 하고, 언론에서는 획일화된 미적 기준과 정상 기준을 퍼뜨리는 행위를 중단해야 하며, 학교와 지역사회에서는 청소년이 몸에 따른 차별을 받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섭식장애 등 사회가 강요하는 기준에 자신의 몸이 맞지 않아 고통을 겪는 청소년, 자신의 몸을 성별정체성에 맞게 바꾸기를 원하는 청소년은 필요한 의료 지원을 받을 권리와 함께 그 과정에서 사회적 지지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
이어서 4조에서는 청소년이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본인의 의사에 따라 자신의 몸을 활용해 성적 만족을 얻을 권리, 본인이 원하지 않는 몸의 활용을 거부할 권리, 타인으로부터 몸을 침범당하지 않을 권리를 명시하고 있다. 5조에서는 성관계, 피임, 임신, 임신 중지, 출산 등에 관한 정보와 자원에 접근할 권리, 자신의 결정을 존중하고 차별당하지 않을 권리, 필요한 의료지원을 받을 권리, 학업이나 노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지원과 보장을 받을 권리를 포함한다. 6조에서는 최적의 성 건강을 유지할 권리를 명시한다.
또한 청소년은 자신의 정체성을 자유롭게 탐구하고 존중받을 권리, 타인의 정체성을 존중할 권리를 가지며, 정부와 교육 당국은 청소년이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을 존중할 수 있도록 교육을 제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각 장에서 성적 권리의 내용들을 매우 통합적이면서도 상세하게 다루고 있는 점도 좋지만, 이 선언문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부분은 이러한 권리들을 실질적으로 실현할 조건으로서 ‘본인이 원하는 노동을 할 권리’와 ‘자신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권리’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권리가 단순한 언명이나 일방적인 보호로서 보장될 수 없으며, 권리의 주체가 이를 주체적이고 자율적으로, 차별 없이 실현할 수 있는 조건이 함께 보장돼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반영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적 권리’는 아직 우리에게 낯선 개념이지만 ‘성’은 우리의 몸과 삶에서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그에 관한 권리를 구체화하고 보장하는 것은 결코 낯설게만 여길 일이 아니다. 일례로 WHO(세계보건기구)의 경우 성적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성 건강 유지에 직결되는 문제라는 점을 인식하고 이를 여러 의료, 상담 가이드라인과 프로토콜에 반영해 왔다. 또한 세계적으로 여러 여성단체와 성소수자 단체들도 여성과 성소수자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차별, 신체에 대한 부당한 침해, 섹슈얼리티에 대한 통제와 처벌 등을 해결해 나가고자 성적 권리를 구체화해 왔다.
하지만 성적 권리는 어떠한 폭력이나 위험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몸과 정체성, 욕구와 욕망 등을 충분한 정보와 편견 없는 조건 속에서 폭력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자유롭게 탐색하고 긍정하며 실현할 권리이며, 이를 바탕으로 평등한 관계를 만들어나갈 권리이다. 나의 몸과 욕구를 제대로 탐색해보고 긍정할 수 있는 조건이 주어지지 못한다면, 혹은 그 조건이 사회경제적, 문화적으로 불평등하게 주어져 있다면 관계 역시 불평등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사람과, 원하는 때에,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방식으로 성관계를 맺고 피임, 임신, 임신중지, 출산, 파트너십, 가족구성 등을 강요나 처벌의 위험 없이 결정할 수 있어야 하며, 필요한 지원을 보장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권리들은 국가의 목적에 의해, 혹은 가족, 시설, 직장, 학교 등에 의해 함부로 침해당해서는 안 된다. 아울러 국가는 교육, 노동, 주거, 의료, 문화 등 사회 전반의 영역에서 이 권리들이 제대로 실현될 수 있도록 보장할 책임이 있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우리는 성적 권리를 얼마나 보장받고 있을까?
흥미롭게도(?) 종종 강의에서 성적 권리에 대해 “이 권리가 침해되고 있는 경우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라고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외로 잘 떠올리지 못하거나 성폭력 등 특정한 사례만을 이야기하고는 한다.
하지만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다. 오늘 나는 성별에 따른 옷차림을 요구하는 직장, 학교의 규정과 문화,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불편한 옷차림을 해야 하지는 않았나? 나에게는 나의 몸, 나의 성적지향이나 성별정체성에 대해 과연 제대로 탐색해 볼 기회가 있었을까? 나는 나에게 필요한 피임도구를 잘 찾아 구할 수 있고 성 관련 질병이 생겼을 때 편하게 병원에 찾아갈 수 있나? 나는 내가 원하는 파트너를 찾을 수 있고, 상대방과 평등하고 만족스러운 성관계를 맺을 수 있나? 나는 이런 모든 것들을 교육 과정을 통해 배울 수 있었나? 하고 자문해 보면 곧 답이 나올 것이다.
성적 권리는 우리의 삶을 위한 기본권이다. ‘성’을 부끄러운 것, 위험한 것으로서가 아니라 평등한 사회를 위한 권리로서 이야기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성적 권리의 보장을 요구해보자. 학교, 직장, 가족, 병원 곳곳에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