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박다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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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전, 스물둘에 입사했습니다
스물두 살에 입사했습니다. 벌써 25년 전이네요. 나이가 젊어 2만 원은 더 얹어줄 수 있다고 해서 수락했어요. 물론 결국에는 없던 얘기가 됐지만요. 오전 9시에 출근해 오후 5시 30분에 칼같이 퇴근할 수 있다는 점도 좋았고요. 젊을 때니까 이것저것 해 보고 싶은 게 많았거든요. 그때 월급 48만 원을 받았어요. 비슷한 규모의 사업장에 비해 많지도, 적지도 않은 돈이었죠.
회사는 조금 오래되고 누추해 보이는 건물에 있었어요. 50평정도 됐으려나요. 한 부서에 3~5명씩, 총 30명 정도가 일했습니다. 다들 저 어린 애가 얼마나 버틸까, 그냥 하루 이틀 하다 나가겠지, 했는데 곧잘 버티는 걸 보고 사람들이 놀랐나 봐요. 경리 언니와 직원들이 막내 동생 대하듯 이것저것 챙겨줬고, 나도 언니들을 많이 따랐어요. 작고 허름한 회사에서 직원들이 모두 식구처럼 친하게 지냈었죠. 그때 사장님은, 성실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다고 기억합니다. 물량이 없을 때 직접 영업을 뛰기도 하고, 급하게 나가야 할 물량이 있으면 직접 라인에서 일을 했으니까요. 사람들이 힘들게 잔업하고 있을 때, 몰래 피로회복제를 사다줬던 기억이 많이 남네요.
아, 회사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사장님 집에 초대를 받은 적이 있어요. 사장님 생신이었거든요. 경리 언니랑 사장님 운전기사 차를 타고 그 집엘 갔어요. 단독주택이었는데 딱 들어가니, 마당에 긴 테이블에 음식을 차려 놓고 파티를 하고 있더라고요. 회사 사람들도 모여 있고요. 미리 가 있던 언니들이 음식을 나르다 말고 “OO야 빨리 와서 먹어”라고 손짓하던 생각이 납니다. 그날 사모님은 우리한테 집을 구경시켜줬어요. 우리는 신나서 우르르 쫓아갔죠. 지하 1층의 넓은 헬스실이나, 거실 한편에 자리한 벽난로, 마치 외국처럼 꾸며놓은 침실까지, 온통 처음 보는 것들이었어요. 우리는 그때, 그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서 있었죠.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일이 밀려들기 시작했어요. 옛날에 한창 유행했던 ‘삐삐’ 아시죠? 우리가 펜텍이라는 곳에서 물량을 받아 삐삐를 만들기 시작했거든요. 잔업이 엄청 늘었어요. 일주일에 두 번, 한 달에 여덟 번은 꼬박 잔업을 했지요. 몸이 힘들 긴 했는데, 언니들이 좋으니까 군말 없이 일했어요. 물량은 끝없이 쏟아졌습니다. 50평짜리 공장이 턱없이 부족할 만큼요. 3, 4년 지났을까. 사장님이 독산동과 김포, 충청도에 공장 부지를 알아보러 다니기 시작했어요. 결국 신정동에 있던 회사를 독산동으로 옮기기로 했어요. 주유소 옆에 있던 빨간 건물 한 채가 우리 회사가 된 거였어요. 그곳에 있던 회사도 금형회사였는데 돈을 많이 벌어 이사 간 것이라더군요. 그때는 독산역도 없었을 때였어요. 직원들은 가산역에서 내려 30분을 걸어야 공장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좋았죠. 회사가 나와 함께 커 가고 있는 것 같아서. 나중에 회사에서 통근버스도 마련해줬고, 그 후에 지하철역도 생겼어요.
1997년, 그리고 1998년. 남들한테는 IMF다 뭐다 힘든 세월이었겠지만, 우리는 정신이 없을 정도로 일거리가 넘쳐나던 시절이었어요. 처음에는 우리도 똑같이 힘들 줄 알았습니다. 영업부 과장이 우리에게 ‘한두 달은 월급 받지 말고 일하자’고 했으니까요. 하지만 행운처럼 모토로라와 계약이 성사됐고, 우리는 바깥세상과는 달리 일거리에 파묻혀 살았어요. 회사도 그때 돈을 많이 벌었지요. 물량이 늘어나는 만큼, 사람도 늘어났어요. 야간은 기본이고 철야도 밥 먹듯이 했지요. 아르바이트 직원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도 그때 즈음이에요. 그리고는 모토로라가 해외로 생산을 이전했는데, 우리는 타격이 전혀 없었어요. 1999년에 LG와 계약을 맺게 됐거든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LG 물건만 받았어요. 다른 회사는 여러 원청사 물건을 받기도 하는데, LG가 자신들 물량만 받기를 원했거든요. 회사는 더 많은 돈을 벌었고, 사업 규모는 더욱 커졌지요. 2001년에는 본사 건물을 짓기도 했고요.
‘남편 잘 못 만나’ 노동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회사가 한창 잘 나갈 때는 직원이 600명에 달했어요. 바쁠 때마다 단기 알바를 뽑아 썼거든요. 회사는 자꾸 커지는 게 눈에 보이는데, 직원들의 삶은 별반 달라질 것이 없었지요. 기본급은 고작 500원, 1000원이 올랐으니까요. 변한 것이 있다면, 내 시간이 자꾸 없어져 갔다는 거. 물량이 많아지니 회사는 매일 잔업을 요구했어요. 그래야 물건을 맞출 수 있다고. 주5일이 시행되기 전에는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쉬지 않고 일을 했었죠. 여기 일하는 직원 중에 아이 엄마가 많았는데, 회사에 밉보일까봐, 잔업을 거부하면 그만두라고 할까봐 할 수 없이 일을 했어요. 옛날에는 ‘워킹맘’ 같은 근사한 이름도 없었잖아요. ‘품 안의 자식’이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쓰던 때여서, 미안함과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했을 겁니다.
그렇게 바빴는데도, 회사에서는 직원들 야유회는 꼭 챙기곤 했어요. 팔봉산이나 운학산에 가서 아유회도 하고 체육대회도 하고. 다른 회사들이 부러워 할 정도였죠. 한 번은 관광차 대여섯 대를 불러서 직원들이 놀러간 적이 있어요. 누가 화장실이 가고 싶다고 해, 잠깐 차를 멈추고 밖에 나와 쉬고 있을 때였죠. 사장님이 갑자기 직원들을 불러 모으고는, 대뜸 자기 자랑을 하시는 거예요. 그게 그냥 자랑이었으면 우리도 맞장구를 치며 웃어넘겼겠지만, 누군가를 상처 주는 말이어서 쉽게 잊히지가 않았어요. 그 때 사장님은 ‘나는 이렇게 사업을 잘해서 마누라 바깥에서 일 안 시키고 집에서 살림만 하게 한다. 남편 잘못 만난 사람들이 이렇게 힘들게 나와서 일 하는 것 아니냐’는 식으로 말씀을 하셨죠. 우리가 늦게까지 일하는 이유가 남편을 잘못 만나서, 혹은 남편 능력이 모자라서 라고요. 날씨도 좋고, 기분도 좋았던 그 날. 우리는 아무도 웃지 못했습니다.
일이 많은 날이면, 관리자들은 ‘가정을 버리라’고까지 하며 일을 시키곤 했어요. 과연 우리의 삶은 누군가의 삶보다 소중하지 않거나, 지켜질 만큼의 가치가 없는 걸까, 생각을 하다가도 또 문득 기가 죽기도 했습니다. 가족 같다고 생각했던 회사는 너무 커져 버렸고, 또한 너무 버거워져 있었습니다. 회사는 물량에 맞춰 사람을 늘였다가 줄였고, 수많은 알바들이 들어왔다가 또 떠나곤 했습니다. 정규직은 위층에서, 비정규직은 아래층에서 작업을 하곤 했어요. 물량이 많아 주야 맞교대를 해야 할 때면, 정규직은 주간을, 비정규직은 야간을 맡았지요. 비정규직들은 정규직으로 전환 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에 2년 가까이 야간작업을 하곤 했어요. 정직원인 우리도 물량에 맞춰져 부서를 잃거나, 타 부서로 지원을 나가곤 했지요. 회사가 커지면서, 비정규직 아르바이트도 늘어났어요. 그때 우리는 서로를 다른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한 번인가는 회사 안에 흉흉한 소문이 돌기도 했습니다. 하청업체 직원이 우리 회사에 온 날이었어요. 하청업체에서 우리 회사에 납품한 물건에 불량이 나면, 그쪽 회사 직원이 와서 검사를 해요. 그 직원이 화물용 엘리베이터에 탔다가 발을 헛디뎌 사망했대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직원은 심지어 하청업체 정직원도 아니고, 아르바이트 직원이었던 거예요. 얼마간의 합의금으로 사건을 해결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아이 엄마였다고 하던데. 그 때 우리는 왜 그들에게서 우리를 보지 못했던 걸까요.
우리는 일일이 손으로 하는 작업이 많았습니다. 화이트 제품을 다루다 보면 외관에 점이 박혀 나올 때도 있고, 잡티나 기름때가 낄 때도 있었죠. 그럴 때는 알코올로 소독을 했어요. 독한 냄새 때문에 몸에 안 좋겠거니, 막연한 생각만 했지 그것들이 어떤 약인지는 잘 몰랐지요. 목이 바싹 타고, 숨이 턱 막히고, 머리가 아파도 마스크 하나 지급 안 됐어요. 제품에 잡티를 없애기 위해 사포질도 했는데, 항상 가루가 날렸습니다. 새하얀 가루를 목과 입으로 삼키면서도 우리는 그저 막연한 생각만 했었지요. 누구도 우리에게 알코올의 독성이나 분진에 대해 설명해 주지 않았으니까요.
남녀고용평등상을 받았다는 것
우리 회사가 잘 나갈 때는 100대 기업 안에 들었다고 해요. 여의도에 가면 회장님 석고상도 있대요. 우리 회사 와보셔서 알지요? 대통령이 주는 상, 국무총리가 주는 상, 이러 저러한 상패들이 한가득이죠. 2012년인가, 남녀고용평등 우수상까지 받았어요. 고용노동부 장관상이라고 하더라고요. 2014년에도 대한민국여성경영대상 여성부장관상을 수상했고요. 이런 상이 있다는 것도, 회사가 이런 상을 받았다는 것도 아주 나중에서야 알게 됐습니다. 수상 이유를 찾아보니, 10년 이상 장기근속자가 여성이고, 생리휴가 수당을 지급하고, 여성 휴게시설과 모유 수유실을 운영하기 때문이라더군요.
기사를 보고 사실 깜짝 놀랐습니다. 휴게실이 없어서 우리가 직접 쉬는 공간을 만들었거든요. 빈 공간을 찾아 소파를 갖다놓고 쉬었죠. 비좁은 공간이었어요. 그리고 25년간 회사를 다니면서 한 번도 수유실을 본 적이 없습니다. 쉴 공간도 없는데, 아기 젖 먹일 공간이 어디 있었겠어요. 생리수당은 있었죠. 그런데 금방 없어졌어요. 정부에서 생리수당을 줘도 되고, 안 줘도 되고, 마음대로 하라고 하니 2015년인가 없앴어요. 특별하게 여성친화적인 회사라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무시하면 무시했지, 더 챙겨주는 법은 없었어요.
그중 제조부는 가장 분위기가 험악했습니다. ‘왕전무’라 불렸던 사람이 제조부 여성 직원들을 감시하고 통제하면서부터요. 그 사람은 부서마다 자기 사람을 심어 현장의 모든 정보들을 독점했습니다. 그의 측근들은 사람들을 감시하고, 눈 밖에 난 직원을 따돌리거나 괴롭혔어요. 우리가 ‘채순실’이라고 불렀던 왕전무 측근의 횡포는 유명했죠. 차장도, 부장도, 채순실 반장 앞에서는 벌벌 떨었으니까요. 그는 맨날 문자만 두들기고 있었는데,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왕전무에게 보고하는 거였죠. 라인 배치도 내키는 대로였어요. 스물네 명이 하던 라인을 반으로 쪼갰고, 불량이 나오든 말든 LG에서 정해준 라인 속도를 마음대로 높였어요. 공정은 많아지고 라인은 빨라지고, 그때는 정말 죽을 맛이었습니다. 시급을 차등지급 한다면서, 눈 밖에 난 직원은 월급도 올려주지 않았죠. 군기를 잡듯 윽박질렀고, 모욕적인 말을 내뱉었어요. 회사가 온통 왕전무 중심으로 돌아가는 듯했습니다.
휴가도, 월차도, 내 마음대로 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어요. 우리는 설, 추석 같은 명절 때도 항상 바빴습니다. 한번은 추석을 쇠고 며칠 뒤, 요양원에 계시던 시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빨리 가봐야 하니 신랑이 회사 앞으로 저를 데리러 왔죠. 제가 한참을 나오지 않으니 신랑이 회사에 연락을 했나 봐요. 반장은 그 연락을 받아놓고도 저에게 일언반구 하질 않는 겁니다. 당장 기계에서 손을 떼고 나와야 하는데, 가라는 소릴 안 해요. 반장은 어느샌가 사라져 버리고. 참다못해 조장에게 따졌어요. 시아버지 돌아가셨으니, 빨리 누구 앉힐 사람 찾으라고, 정 없으면 당신이라도 이 자리에 앉아 일을 하라고. 나중에 제가 나가는 것을 보며 반장이 욕을 하더래요. 자신이 가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는데 가 버렸다며.
▲ 신창석 신영프레시젼 회장은 봉사, 납세, 남녀고용평등 실현 등 갖가지 부분에서 정부로부터 상을 받았다. [출처: 박다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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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투더 베이직
회사는 언제나 ‘어렵다’며 앓는 소리를 했습니다. 회사가 어렵다고, 아껴야 한다고요. 관리자들은 ‘백 투더 베이직’, 기본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원래 품질 검사할 때 형광등 두 개를 켜 놓고 작업을 했어요. 환하게 불을 켜야 불량을 잡아낼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회사는 절전을 해야 한다며 형광등 한 개만 켜도록 했어요. 덕분에 작업자들은 어두컴컴해진 자리에 앉아 침침한 눈을 비벼가며 일을 했죠. 이 아이디어를 낸 부장은 회사로부터 상을 받았고요. 관리자들은 화장실까지 쫓아다녔어요. 쓰레기통에 둘둘 말린 휴지가 있으면 사진을 찍어 공지를 했죠. 휴지 낭비하지 말라고요. 그 넓은 작업장에 에어컨이 달랑 한 대인데, 그마저도 절전을 한다며 온도를 있는 대로 높여놔 여름에는 정말 죽을 맛이었어요. 그 흔한 냉방병 걸려보는 것이 소원이었죠.
사상실은 사포질도 하고, 알코올도 만져야 해서 꼭 장갑을 껴야 해요. 처음에는 회사에서 한 달에 네 개씩 장갑을 지급했어요.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장갑을 교체하라고. 그런데 나중에 관리자들이 그것도 막았어요. 헤프게 쓴다면서. 장갑을 교체하려면 구멍 났는지를 보여 달래요. 구멍 나야 그제야 하나 바꿔주고, 우리는 구걸하고. 새까매진 장갑을 빠는 것도 일이었어요. 하루에 두 번은 장갑을 갈아야 해서, 점심시간 쪼개 장갑을 빨고 널었지요. 빳빳했던 장갑이 닳아 매끈해질 때까지 쓰곤 했습니다. 3년에 한 번 교체해 주던 작업복도 교체 주기가 늘어났어요. 작업 도구도 우리가 직접 금형 가공하는 아저씨께 부탁드려서 구매를 했지요.
회사는 계속 커지는데, 왜 항상 어렵다고만 할까. 2004년부터 줄곧 매출액이 1천억이 넘는다는데, 독산동에서 LG 다음으로 큰 회사가 됐다는데, 왜 계속 우리는 힘들어지는 걸까. 의아하긴 했어도 그저 참고 믿었습니다. 바깥에서 보는 회사의 이미지와, 내부 우리의 일상은 많이 달랐어요. 다른 회사 사람들은 우리가 대단히 많은 월급을 받는다고 생각했지요. 20년 넘게 근속한 직원도, 잔업 특근을 빠듯하게 해야 겨우 200만원 남짓을 번다는 사실을, 차마 남들에게는 말하지 못했어요. 사장님이 이곳저곳에 기부왕으로 이름을 알렸지만, 그건 우리의 삶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동화 같은 이야기였습니다.
7년 전 현장에 알음알음 퍼져나갔던, 사장님이 골프장을 만든다더라는 소문들. 그때는 왜 그 이야기를 그저 흘려들었을까요. 우리는 결국 이렇게 시간이 지난 후에야,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나서야 알게 됐지요. 우리가 죽도록 일해서 벌어들인 돈이, 사장 일가의 골프장으로 흘러들어갔다는 사실을요. 우리 앞에서는 매번 회사가 위기라고 겁을 주면서, 뒤로는 470억 원이 훌쩍 넘는 돈들을 골프장으로 쏟아부었죠. 적은 임금을 감내하며 쉬지도 못한 채, 장갑 한 짝에 벌벌 떨며 살아냈던 그 시간들이, 저렇게 허망한 모습으로 나타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노동조합을 만들고 나서야 처음으로 그 골프장엘 갔어요. 그 푸르고 싱싱한 나무와 잔디들이 눈이 부셔 울컥했습니다. 차마 함부로 들어가지 못할 만큼, 아름다운 곳이더군요. 고급스럽고 매끈한 클럽하우스도, 햇빛을 받아 반짝이던 분수도 비현실적이었어요. 25년 전, 사장님 댁에 놀러 갔던 날처럼, 나는 여전히 입을 다물지 못하고 서 있었습니다. 내가 살아온 수십 년의 시간들이 이곳으로 흘러들어, 나에게는 빈약함과 홀쭉함 밖에 남지 않았다는 억울함 때문이었을 겁니다.
다시 걷게 될 출근길
얼마 전, 한창 사춘기인 우리 아이가 텔레비전을 보다가 묻더군요. “우리 주변엔 저런 사람 없지?” 텔레비전 화면에는 노동조합이 시위를 벌이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당황해 말을 얼버무리면서도, 예전의 내 모습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노동조합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내가 그 안에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그 시절. 시간이 지나서 아이에게 어떻게 설명을 할까, 생각을 하다가 2017년 그때의 울분을 떠올렸습니다. 회사는 교대제를 개편한다면서 남자 직원들 임금만을 올려줬었죠. 같은 조건에서, 같은 시간 동안, 똑같은 일을 했는데도 남자들 월급만 올랐어요. 일을 하다가도 문득 차오르는 울분을 꾹꾹 누르고 삼켜야 했습니다. 그런데 억울함과 분함을 꾹꾹 담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였고, 그 울분에 찬 많은 말들 사이로 ‘노동조합’이라는 단어를 들었습니다.
2017년 12월, 우리는 노조를 결성했습니다. 그러자 회사는 며칠 후 명예퇴직 시행을 공고했어요. 그리고 7개월 만인 이듬해 7월 우리를 해고했지요.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회사 사정은 늘 힘들다가도 다시 좋아졌고, 비슷한 위기를 경험해 보지 못한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그때마다 고용유지 지원을 받으며 회사는 계속 커나갔습니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뭘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노조를 만든 ‘괘씸죄’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더군요. 정리해고 대상자의 88%가 여성이라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어요. 우리는 해고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지난해 11월 23일, 서울지방노동위원회는 우리의 부당해고를 인정했습니다. 당연히 이길 것이라 무수히 되뇌던 그 판결이 현실로 다가왔을 때, 말로 할 수 없는 안도감과 기쁨이 차올랐습니다. 한 번도 맞서 볼 생각을 하지 않았던 회사를 상대로 우리가 이겼다니요. 그렇게 우리는 6개월 만에 복직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복직하는 날. 우리가 반년 만에 돌아간 그 현장에서, 회사는 세 시간 만에 다시 명예퇴직 시행을 공고했습니다. 이제는 아예 회사를 청산하겠다더군요. 조합원이 아닌 직원들은 회사 명찰과 작업복을 책상 위에 벗어두고 하나 둘 공장을 떠났습니다. 어째서 그들은 이토록 모든 것이 쉬울까요. 모두가 같이 만들고 쌓았던 삶의 일부를, 왜 그들이 함부로 무너뜨리는 걸까요. 우리는 결국 복직 10일 만에 두 번째 해고 통보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지금 6개월 넘게 공장을 점거하고 있습니다. 겨울과 봄을 공장에서 났지요. 25년의 세월을 쌓아 만든 그 곳을 그저 무너지게 놔둘 수는 없었습니다. 지난 3월, 회사는 우리가 공장을 불법적으로 점거해 손해가 발생하고 있다며 17억 원의 손해배상액을 통보했습니다. 17억 원. 태어나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 돈을 곱씹고 또 곱씹었습니다. 계산을 해 보니, 조합원 한 명이 농성장에서 하루 보낼 때 발생하는 배상액이 17만 원이더군요. 서늘하고 딱딱한 바닥에 누워, 누군가가 밤에 쳐들어올까봐 불안에 떨던 그 낯선 잠자리가 하루에 17만 원짜리라니요.
얼마 전, 농성장에 누워 예전에 봤던 기사를 떠올렸습니다. 우리가 해고됐던 그해. 사장님과 사모님이 골프장 우수 직원들을 데리고 태국으로 해외 워크샵을 떠났다는 기사였습니다. 우리는 매번 ‘우수사원’, ‘모범사원’을 강요받으며 살았습니다. 잔업에 빠지지 않고 관리자 말을 잘 듣는 직원에게 모범사원상을 수여하기도 했지요. 그런데 사장님은, 과연 신창석 사장님은 모범적인 사업주였습니까?
한 번도 불러보지 않았던 투쟁가와, 어색하기만 했던 팔뚝질이 이젠 몸에 익어 갑니다. 쭈뼛거리기만 했던 1인 시위도 이젠 곧잘 하고요. 먼 곳까지 연대를 가는 게 너무 힘들어, 입을 삐죽거렸던 것도 오래 전 일 같아요. 서로 함께 의지하고, 행동한다는 것이 얼마나 눈물 나게 기쁘고 감사한 일인지 이제는 잘 압니다. 우리 46명 조합원들이 함께 있으면 뭔들 못하겠느냐는 배포도 생겼어요. 어제는 LG본사에 시위를 하러 갔습니다. 하필이면 출근시간이었어요. 구로디지털단지에서 환승하려고 버스에서 내렸는데, 출근하는 인파가 큰 파도처럼 밀려오더군요. 그 때 문득, 나도 정말 열심히 살았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내가 가는 이 길이 출근길이었으면 좋겠다, 라는 간절한 마음도 피어올랐습니다. 아직은 막막한 이 길을 계속 걷다보면, 언젠가는 나도 예전처럼 바쁜 출근길을 맞이하고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