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새벽, 사람들의 눈을 피해 호텔에서 몰래 진행된 협의는 ‘사회적 대화’일까. 지난 2월 19일, 대통령 직속 기구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는 탄력적 근로시간제 단위기간 확대를 ‘첫 사회적 합의’라고 발표했다. 사용자들이 노동시간을 마음대로 늘리고 줄일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노동계에서는 노조가 없는 미조직, 비정규직 노동자를 중심으로 탄력근로제가 확산될 것이라며 줄곧 반대 입장을 밝혀 왔다. 하지만 파행을 거듭한 대화는 호텔 밀실에서 속개됐고, 결국 또 다시 ‘야합’이라는 꼬리표를 달게 됐다. 이와 함께 ‘사회주체의 민주적 대화’로 ‘노동존중사회’를 실현하겠다던 경사노위의 목표도 없던 일이 돼 버렸다. 《워커스》가 그간의 경사노위 표류 과정을 짚어봤다.
[출처: 김한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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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력근로제 ‘밀실합의’ 공익위원 “나도 모르는 사이 결과 뒤집어져”
‘첫 사회적 대화’인 탄력근로제 합의는 왜 ‘밀실 야합’이라는 비판을 받게 됐을까. 대체 어떤 ‘사회적 인물’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합의에 이르게 된 것일까. 《워커스》는 공익위원 A씨로부터 탄력근로제 밀실 합의 과정을 들을 수 있었다.
탄력근로제 의제를 다뤘던 회의체는 경사노위 산하 ‘노동시간제도개선위원회(노동시간개선위)’다. 경사노위는 2월 19일 오후 5시 탄력근로제 노사정 합의를 발표하며, 노동시간개선위가 막판 고위급 협의 틀을 가동해 노사정의 ‘대승적 결단’으로 합의에 이르게 됐다고 밝혔다. 경사노위가 언론에 밝힌 합의과정은 이렇다. 2월 18일 오후 4시 30분, 노동시간개선위가 8차 전체 협상을 열고 ‘밤샘 마라톤 집중협상(간사단회의)를 전개’ 했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한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2시 30분에 회의가 종료됐다. 하지만 같은 날 오후 5시, 갑자기 노동시간개선위는 9차 전체회의에서 참석위원 만장일치 박수로 탄력근로제 확대 합의문을 채택했다. 9차 회의를 진행한 시간은 단 30분이었다.
이 때문에 8차와 9차 회의 사이에 노사정이 밀실 야합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퍼졌다. 실제로 노사정 합의 내용은 공식적인 전체회의에서 논의된 것이 아니었다. 경사노위 8차 전체회의 시간 역시 30~40분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체회의 이후 새벽까지 진행된 밤샘 회의는 간사단회의다. 이와 관련해 내부적으로 문제제기도 나왔다. 한 공익위원은 비문건화를 전제로 한 간사단회의 진행에 문제를 제기했다. 이 간사단회의 결과를 놓고 전체회의가 추인만 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사실상 전체회의가 형식적 들러리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다. 실제로 간사단회의 내용은 ‘비활자화’를 전제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사노위 위원조차 해당 내용을 구두로 보고받아야 했다.
공익위원 A씨에 따르면 8차~9차 전체회의 사이, 경사노위 앞 F호텔에서 ‘간사단회의’라는 이름의 밀실 회의가 열렸다. A씨는 “위원도, 간사도 아닌 사람이 (논의 자리에) 많이 있었다. 간사단 회의라는데 간사는 다 빠졌다”며 “간사단회의 명분으로 회의가 아닌 별도 논의를 한 것이다. (탄력근로제 합의에 결단이 필요한) 주역이 경총과 한국노총이었기 때문에 핵심 관계자끼리 조율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간사단회의’는 사실상 비공개 논의를 위한 명분인 셈이었다. A씨는 과거에도 노동시간 개선위가 같은 명분의 ‘간사단회의(비공개)’를 3차례 정도 연 적이 있다고 밝혔다. 19일 오전 3시경 협상이 최종 결렬된 이후. A씨가 경사노위 관계자로부터 다시 연락을 받은 시각은 같은 날 오후 3시경이다. 놀랍게도 노사정이 탄력근로제에 합의했고 이를 발표한다는 소식이었다. A씨는 “(공익위원인) 내가 모르는 사이 벌어진 일”이었다며 “위원이 아닌 사람이 모여 결과를 이렇게 뒤집었는데 꼬리가 몸통을 흔든 격”이라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실제로 합의문에 이름을 올린 인물은 이철수(노동시간제도개선위원회 위원장), 이성경(한국노총 사무총장), 김용근(한국경자총협회 상근부회장), 임서정(고용노동부 차관), 박태주(경사노위 상임위원) 등 총 5명이다. 이들 중 노동시간개선위 위원은 이철수, 김용근 단 2명뿐이다. 위원이 아닌 인물들이 합의 주체가 된 셈이었다.
A씨는 ‘합의 결렬’이 ‘전격 합의’로 뒤집힌 정황을 뒤늦게 확인했다. 19일 새벽 회의 결렬 후, 이들이 아침에 다시 만나 논의를 이어갔다는 것이다. A씨는 “탄근제 ‘2주 전 통보’ 조항 하나를 놓고 (결과가) 뒤집혔다”고 밝혔다. 한국노총의 여러 ‘방어카드’ 중 해당 조항이 받아들여져 합의에 이르게 됐다는 설명이다. A씨는 “합의문에 따르면, 탄력근로제와 무관하게 천재지변이나 기상악화 등에 대응하는 특별연장근로제도가 포함됐다. 이것은 협의만으로 주 단위 노동시간을 변경할 수 있는 독소조항이다. 너무 많이 열어준 셈”이라고 설명했다.
노사관계개선위는 ‘단결권·단체행동권’ 훼손
심지어 경사노위 산하 ‘노사관계제도관행개선위원회(노사관계개선위)’는 재계의 요구에 따라 ‘단결권·단체행동권’을 훼손하는 합의를 밀어붙이고 있다. 애초 노사관계개선위는 ILO(국제노동기구) 핵심 협약 비준을 목적으로 꾸려졌다. 한국정부는 1991년 ILO에 가입한 이래로, 8개 핵심협약 중 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보호에 관한 협약(87호), 단결권 및 단체교섭권에 관한 협약(98호) 등 4가지 협약을 비준하지 않고 있다. 이에 ILO를 비롯한 국제사회는 한국정부에 해당 협약 비준을 지속적으로 요구해 왔다. 하지만 노사관계개선위 공익위원들조차 ILO협약을 비롯한 국제사회 권고에 역행하는 발언을 쏟아내며 회의를 파행으로 몰고 있다. “한국이 ILO 기본협약을 비준하고 결사의 자유위원회 권고를 수용해야 하는 이유가 불명확하다”는 의견부터, “쟁의행위에 대한 처벌 조항도 시급한 개선 대상”이라는 요구까지 이어졌다.
[출처: 김한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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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익위원들은 지난 10월 제출한 ‘노사정합의서(안)’에서 단체교섭 및 쟁의행위에 관한 입법 사항으로 ‘쟁의행위의 대등성을 확보’해야 한다며 파업에 대한 ‘사용자 대항권’ 논의 여지를 열었다. 11월 20일 3차 합의안에는 노동3권을 훼손하는 구체적인 내용들이 포함되기 시작했다. ‘재직 중인 자’가 아닌 조합원은 기업별 노조의 임원·대의원이 될 수 없도록 하고, 근로시간면제(타임오프) 한도를 초과하는 내용의 노사합의는 무효화했다. 현행 공무원노조법 상 노조가입을 금지하는 조항들과, 교사 공무원의 쟁의행위,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현행 조항들은 그대로 유지됐다.
고용노동부 또한 협약 비준을 가로막는 데 힘을 실었다. 류 모 고용노동부 국장은 노사관계개선위 3차 전체회의에서 “명퇴자, 퇴직자를 노조 가입 범위로 확장하면 근로조건 교섭창구로서 (직장협의회의) 역할에 한계가 지적된다”고 밝힌 바 있다. 노동부가 나서 ILO가 권고한 퇴직, 해직자의 노조 가입 권리를 막아선 셈이다. 류 국장은 과거 노조파괴 노무법인으로 알려진 ‘창조컨설팅’의 ‘노조파괴 협조 이메일리스트’에 포함된 인물이다.
이후 경영계의 ‘노동개악’ 요구안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경영계는 지난해 12월 18일 △사업장 점거 금지 △단체협약 유효기간 확대 △대체근로 전면 허용 △부당노동행위 처벌제도 폐지를 골자로 하는 의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했다. 같은 달 21일부터는 이에 대한 본격적인 토론이 이어졌다. 이에 발맞춰 한정애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8일 노조법 개정안을 발표했다. 개정안은 공익위원 합의안보다 훨씬 후퇴해, 비종업원 뿐 아니라 산업별, 지역별 노조 활동과 사내하청 노조의 활동까지도 제한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이와 함께 노조 전임자에게 근로시간면제(타임오프) 한도를 초과해 급여를 지급하는 것을 ‘부당노동행위’로 규율한다는 조항까지 포함시켰다.
뭐 하나 건질 것 없는 경사노위 위원회, ‘사회적 약자’ 배제만
경사노위 산하에 설치된 각종 위원회에서도 사회적 의제 관련 논의를 진행해 왔다. 하지만 사회적 약자에 대한 목소리를 담겠다는 애초 목표가 무색하게, 법의 사각지대에 있는 노동자들의 보호대책이 배제되거나 논의조차 진척되지 않는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
경사노위 산하 의제별위원회인 ‘산업안전보건위원회’는 현재까지 주요하게 장시간 노동 관련 의제를 다뤄왔다. △근로시간 특례업종에 대한 최대허용근로시간 제한 △과로사 방지법 제정 등에 대한 논의다. 그 과정에서 위원회는 최대허용근로시간과 관련해 ‘5인 미만 사업장, 특수고용형태 근로 종사자 등 근로시간 규제의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보호방안은 더 이상 논의하지 않기로 했다. 경계가 해당 논의를 반대한 까닭이다.
실제로 위원회에 참여하는 재계 인사는 회의에서 “5인 미만 사업장에서 심혈관계 질환 사망자가 많은 것은 근로자가 원해 장시간 근로를 하는 경우 등 복합적인 요인이 있어 논의주제로 적절치 않다”고 주장했다. ‘사회안전망개선위원회’도 특수고용노동자 및 예술인들을 고용보험 확대 대상에서 배제했다. 특수고용노동자에게 고용보험을 확대할 경우 노동자성 인정 여부가 쟁점이 될 것이라는 재계 측 우려에 따른 것이다.
산업안전보건위원회는 과로사방지법 제정 등을 권고하는 합의문 도출에도 난항을 겪고 있다. 정부와 재계 모두 과로사방지법 제정에 난색을 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법 제정 권고가 아닌, 정부의 종합대책 수립을 권고하는 선에서 합의가 가능하다고 버티고 있다. 재계 측 위원은 회의에서 “정부와 경계가 과로사방지법 제정에 동의하지 않은 상태에서 합의방향을 정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주장했고, 고용노동부 측도 “과로사방지법 제정이 필요한 것인지 검토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또 다른 의제별 위원회인 ‘디지털 전환과 노동의 미래위원회’에서도 재계의 과도한 요구가 이어졌다. 해당 위원회는 △스마트 공장 등 신기술 도입에 따른 일자리 안정화 △플랫폼 노동에 대한 보호방안 마련 논의 등을 진행 중이다. 그 과정에서 재계 측 위원은 발제문을 통해 정부 측에 △선택적근로시간제, 재량근로시간제 등의 적용 요건 완화 및 적용대상 확대 △제조업 직접 생산공정에 파견근로자 사용 허용 등 파견근로 허용 범위 확대 △주52시간 노동시간 한도 조정 등 노동 및 근로시간제도 유연화 등을 요구했다.
플랫폼 노동자 보호방안에 있어서도, 공익위원과 재계 모두 ‘노동자성. 사용자성 인정’은 힘들지 않겠느냐는 분위기가 강하다. 플랫폼 시장은 기존 노사관계로 접근하기 어렵고, ‘노동자성’ 여부를 가리게 되면 법제도 개선이 진전되기 어렵다는 이유다. 위원회의 한 공익위원은 발제를 통해 “플랫폼 제공 사업자와 노동 공급업 사업체를 사업주로 확장하는 문제로 접근하면 진전된 논의가 어렵다”며 “전속성 중심의 고용보험제도의 틀을 벗어나 플랫폼 노동자의 실업에 공동으로 대처하는 방식의 고용보험제도로 개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민연금개혁과 노후소득보장 특별위원회’도 각계 이견으로 합의도출에 난항을 겪고 있다. 국민연금 소득대체율과 보험료율 인상을 둘러싼 갈등 때문이다. 현재 경영계를 제외한 대다수가 소득대체율 적정 수준 45~50%, 보험료율 적정 부담 2~3%인상을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재계는 보험료율 인상은 불가하고, 소득대체율 인하는 사회적 합의 파기와 다름없다며 현행 유지를 고수하고 있다. 그동안 위원회는 해당 의제를 놓고 5개월간 지지부진한 이견 차이만 확인하고 있어, ‘특위가 학습의 장은 아니지 않느냐’는 볼멘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워커스 5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