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대화기구’가 ‘노동개악 추진기구’가 된 것은 과연 지금뿐일까. 과거 김대중 정부는 정리해고제|파견제를, 노무현 정부는 비정규직법을 노사정위원회를 통해 밀어붙였다. 모두 ‘민주 정부’에서 일어난 일이다. 《워커스》가 과거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사회적 대화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문재인 정부, ‘탄근제’ 첫 사회적 합의…
건설 현장 “초장시간 노동 일상화”
탄력근로제 개선을 위한 경사노위 노사정 합의문
노사정은 주 최대 52시간제도의 현장 안착을 위해 다음과 같이 합의한다.1. 탄력적 근로시간제의 단위기간을 최대 6개월로 한다.
(…)2019년 2월 19일
“현재 300인 이상 건설사의 탄력근로제 도입 비율은 100%에 육박합니다. 건설기업들이 올해 초부터 주52시간제를 막기 위해 컨설팅을 받은 결과입니다. 조합원들은 탄력근로제 도입 이후, 상시적인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경사노위 확대) 합의가 됐으니, 현장이 얼마나 더 열악해질지 걱정하고 있죠. 탄력근로제 6개월 단위가 도입되면 사용자들이 이를 무조건 활용할 것이 뻔합니다.”
― 건설기업노조 김지용 홍보부장
A건설기업에 탄력근로제가 도입된 건 올해. 이곳 노동자들은 지난해까지 오전 7시에 출근해 오후 6시까지 일했다. 점심 1시간을 제외하고 하루 10시간 노동을 했다. 2주에 한 번 토요일에도 노동을 했다. 1주를 5일로 본다는 고용노동부의 괴상한 해석이 주60시간 노동을 가능케 했다. 지난해 7월부터 주 52시간 근무제가 시행되면 근로기준법 위반 사업장이 될 터였다. 노동자들은 주 5일 노동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실현되지 않았다. 탄력근로제 때문이었다.
A기업의 탄력근로제는 2주 단위다. 노동자의 출퇴근 시간은 그대로 두고, 오전 30분, 오후 30분 휴게시간을 추가해 하루 9시간 체제로 만들었다. 격주 토요일 노동은 유지했는데, 탄력근로제 영향이었다. 특정 주에 토요일까지 주 54시간(9시간×6일) 노동을 해도, 다음 주에 45시간(9시간×5일) 노동을 하니 평균 49.5시간, 주52시간 미만이 된식이다. A기업은 탄력근로제 적용과 동시에 토요일을 휴무일로 지정했다. 휴무일에는 연장근로수당을 지급해야 하는데, 탄력근로제가 적용된 탓에 이마저도 지급받지 못하게 됐다.
B기업 해외 건설 현장의 경우엔 3개월 단위 탄력근로제가 도입됐다. B기업 해외 노동자들은 탄력근로제에 따라 10주 넘게 주 64시간 노동을 했다. 남은 3주는 0시간 노동, 일체 일을 하지 않았다. 이렇게 13주(3개월) 노동을 1주로 평균하면 50시간 정도. 52시간을 넘지 않는다. 만약 앞뒤 교차로 탄력근로제를 활용하면 최대 5개월 이상 주 64시간 노동이 가능하다. 또 노동자들은 0시간 노동을 할 때 국내에 돌아오는데, 연차를 사용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B기업은 노동자의 이런 상황을 이용해 ‘연차촉진제도’를 활용, 연차미사용수당 지급을 회피했다.
한편, 대한건설협회는 지난 3월 15일 국회에 탄력근로제 단위기간을 1년으로 확대해 달라고 요청한 바 있다.
김대중 정부의 첫 사회적 합의 ‘정리해고제’…
대우차 대규모 구조조정 신호탄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협약
① 기업의 경영투명성 확보 및 구조조정 추진(기업의 경영투명성 제고, 기업 재무구조 개선, 책임경영체계 확립, 기업경쟁력 제고)(…)
⑦ 노동시장의 유연성 제고(파견 근로 법률 제정)
1998년 2월 9일
노사정위원회
김대중 정부 시절 노사정위원회는 1998년 2월 9일 정리해고제 도입에 합의했다. 당시 외환위기와 IMF 구제금융을 빌미로 정부와 경영계가 정리해고제를 요구했고, 노동계가 이를 받아들였다. 이 합의로 근로기준법에 ‘경영상 이유에 의한 해고’ 조항이 명문화됐다. 대규모 정리해고의 신호탄은 대우차가 쏘아 올렸다.
“노사정위가 정리해고제에 합의하자 우리는 대우차가 정리해고 시범 대상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예상은 적중했고, 대우차 노동자들이 민주노총, 금속연맹과 투쟁을 벌였습니다. 가열차게 싸웠는데도, 정리해고는 많은 희생을 낳았습니다. 김대중 정부가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집단이라는 것을 여실히 드러낸 사건이었죠. 이때 노동자와 같이 김대중 정부 노사정위에 맞서 싸운 금속연맹 위원장이 현재 경사노위 문성현 위원장입니다.”
― 김일섭 대우차노조 전 위원장
대우차 노동자 1,750명은 2001년 2월 정리해고 통보를 받았다. 1998년 노사정위원회가 정리해고제 도입을 합의한 이후 벌어진 첫 대규모 정리해고였다. 대우그룹은 1999년 7월 구조조정안을 발표했고, 대우차는 1999년 8월 워크아웃에 돌입했다. 2000년 11월엔 인력, 사업구조 전 분야에 걸친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는 동의서도 노동자들에게 받아냈다. 동시에 GM에 매각하는 절차를 밟았다. 노사정 합의 이후 정리해고를 단행하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여 온 셈이었다. 2001년 2월 노동자들이 시위를 벌이자 경찰은 병력 수천 명, 굴삭기, 지게차를 동원해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그런데도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대우차는 정부의 전체적인 구조조정 프로그램의 시금석이 됐다”며 “대우 사례는 한국정부가 노사문제에 대해 법과 원칙에 따라 대응하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고 말했다.
“노사정위의 정리해고 합의는 고통 분담이라는 미명 아래 이뤄졌습니다. 노동자의 반발이 예상되니 네 가지 정리해고 충족 요건을 만들었지요. 요건은 긴박한 경영상의 사유가 있을 때, 기업이 해고 회피 노력을 다했을 경우 등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정리해고 된 사업장을 보면 이에 해당한 사례가 있었습니까? 콜텍은 외환위기에도 많은 돈을 번 흑자 기업인데 정리해고를 단행했습니다. 노사정위원회를 둔 국가기구는 콜텍이라는 자본권력에 정리해고 무기를 선물했고, 양승태 사법 권력과 재판거래도 했습니다. 여기에 사회적 대화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 이인근 금속노조 콜텍지회 지회장
콜텍은 최악의 정리해고 사업장으로 꼽힌다. 2007년, 콜텍 노동자 250명이 대규모 정리해고를 당했을 당시, 콜텍의 당기 순이익은 76억 원이었다. 부채비율도 동종업계와 비교했을 때 5배 낮았다. 법원이 직접 요청한 콜텍 경영 감정 보고서에도 “콜텍의 영업 손실 상황이 경영상의 긴박한 사유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런데도 서울고등법원은 2012년 12월 파기환송심에서 “미래에 다가올 경영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정리해고는 유효하다”고 판결했다. 정리해고제는 미래 경영 상황까지 ‘점’ 치며 13년 넘게 해고자들을 거리로 내몰았다.
이외에도 정리해고제 도입 이후, 한국사회에서는 쌍용자동차(2009년 2,646명), 한진중공업(2010년, 400명), 코오롱(2008년, 78명), 시그네틱스 (2011년, 32명), 하이디스테크놀로지(2015년, 80명) 등 대규모 구조조정이 잇따랐다.
이와 함께 김대중 정부는 노사정위를 통해 파견법을 제정, 불안정 노동의 시대를 열었다. 민주노총에 따르면 파견노동자 수는 2000년 53,218명에서 2006년 66,315명으로 약 1만3천 명이 증가했다. 참여정부가 개정한 파견법이 시행된 2007년엔 75,020명, 2014년 132,148명으로 약 5만 7천 명이 급증했다.
노무현 정부 ‘비정규악법’
‘노사정 논의 경과’ 국회 전달…경사노위 ‘닮은 꼴’
노사관계 선진화를 위한 노사정 대타협 선언문
노사정은 이번 합의에서 직권중재제도 폐지, 대체근로 도입 등 노사관계 제도를 국제 규범에 맞도록 하였을 뿐 아니라, 부당해고 시 벌칙 삭제, 재고용 의무화, 근로계약 및 해고통지 서면화 등 취약 근로자 보호와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제고하도록 하여 (…) 노사정은 현재 국회에 계류되어 있는 비정규직 근로자 관련법의 조속한 통과를 위해 공동 노력하며(…)2006년 9월 11일
노사정위원회
비정규직법 (기간제법 제정, 파견법 개정)
2004년 하반기
노사정위원회 합의 불발
↓
2005년 3월
노사정대표자회의,
국회에 비정규직법 논의 경과 전달
↓
2006년 11월 30일
국회, 비정규직법 통과
노무현 정부는 2003년부터 노사정위원회를 통해 ‘노사관계법 제도 선진화 방안’ 논의를 시작했다. 경영계가 요구한 ‘고용 유연화’가 의제에 포함됐다. 논의는 ‘비정규직법’ 제·개정으로 이어졌다. 비정규직을 2년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기간제법을 제정하고, 파견법의 허용 업종 대상을 확대하는 방향이었다. 노동계 등의 반대로 결국 합의가 불발했지만, 노사정대표자회의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2005년 비정규직법 논의 경과를 국회에 전달했다. 이후 2006년 11월, 국회는 해당 법안을 처리하기에 이른다.
“2006년 말 비정규직법이 통과되기 전에 민주당 우원식 의원이 이랜드 농성 천막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우원식이 ‘비정규직보호법이 완전하지 않지만, 일단 만들어 놓고, 처우를 개선해 나가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비정규직보호법이 대량해고를 부를 것이라고 직감했습니다. 2000년에도 이랜드 파업의 결과로 ‘근로계약 2년이 지난 조합원은 정규직으로 전환한다’는 합의를 도출했는데, 사측은 계약기간 2년을 앞둔 노동자를 계약해지 했었죠. 아니나 다를까, 비정규직 사용 기한을 2년으로 제한한 비정규직법이 똑같은 결과를 낳았습니다. 2007년 비정규직법 시행 직전 이랜드는 비정규직을 대량해고(계약해지)하며 또 다시 투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 홍윤경 이랜드노조 전 위원장
이랜드는 2007년 7월 기간제법 시행을 앞두고 캐셔를 외주화하고, 계약기간이 2년을 초과한 비정규직 350명을 계약해지했다. 이들을 계속 사용하려면 기간제법상 ‘기간의 정함이 없는 근로자’,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랜드 노동자들은 대량해고를 막기 위해 6월부터 공동파업에 돌입했다. 6월 30일엔 월드컵몰점 무기한 점거 농성을 이어갔다. ‘비정규직을 보호하겠다’던 정부는 7월 20일 병력 7천 명을 이끌고 비정규직을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한편에서 노사정위는 파견법 대상 업무도 확대하기로 합의했다. 파견 업무 규정을 ‘전문 지식·기술 또는 경험 등을 필요로 하는 업무로서 대통령령이 정하는 업무’에서 ‘업무의 성질 등을 고려해 적합하다고 판단되는 업무’로 확대한 것이다. 파견허용 업종은 26개에서 32개로 늘어났고, 파견 노동은 산업 전반으로 뻗어 나갔다.
“현대기아차는 파견법, 기간제법이 동시에 악용된 사업장입니다. 현대기아차는 기간제법 도입 이후 ‘쪼개기 계약’을 늘렸습니다. 근로계약 2년 뒤 정규직 전환을 피하려고 6개월, 3개월, 1주일 단위까지 쪼갰습니다. 2013년 울산의 한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는 쪼개기 계약으로 해고돼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또 현대기아차는 개정된 파견법을 악용했지요. 2006년 파견법 개정으로 고용의무(제6조의2, 법 위반 시 사용사업주가 직접고용 해야 한다) 조항이 추가됐는데, 현대기아차는 정규직이 아닌 계약직을 직접 고용했습니다. 파견법, 기간제법은 비정규직의 악순환만 불렀습니다. 지금도 현대기아차는 마치 적법한 파견인 것처럼 불법파견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 김수억 금속노조 기아차비정규직지회 지회장
현대기아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2004년부터 불법파견 투쟁을 벌여왔다. 노동부는 2004년 11월 현대차 127개 업체, 9,234개 공정에 대한 불법파견 판정을 내렸다. 비정규직 노조 투쟁의 첫걸음이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2006년 첫 파업, 2010년 CTS(도어착탈) 점거 파업, 2012년 철탑 고공농성, 2013년 희망버스 등을 이어갔다. 2019년 현재도 서울고용노동청 앞에서 21일째(4월 1일 기준) 농성 중이다. 현행 파견법상 불법파견이 적발된 사용사업주는 처벌이 가능하며, 즉시 해당 노동자를 직접고용해야 한다. 대법원은 2010년 현대차 사내하청이 불법이라 판결했고, 2017년 2월 서울고등법원도 현대기아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불법으로 파견됐다고 인정했다. 그런데도 현대차그룹 정몽구 회장은 여전히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고, 노동자들은 여전히 길거리에서 불법파견 해결을 외치고 있다.[워커스 5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