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뮐러(가명) 씨는 수년 째 백수 신세다. 실업수당 하르츠Ⅳ를 받지만 방세를 제외하면 409유로(약 52만원)으로 한 달을 버텨야 한다. 지갑이 얇은 건 그만이 아니다. 독일에선 현재 640만 명이 비슷한 실업수당을 받는다. 2명 중 1명은 4년 이상 수당을 받고 있다. 일을 해도 거기서 거기인 경우가 많다. 독일연방노동청에 따르면, 올 3월 기준 320만 명이 ‘워킹 푸어’로 2개 이상의 직장을 전전했다. ‘워킹 푸어’는 10년 동안 약 100만 명이 늘었다. 독일 정부는 최근 경제 활동 인구가 사상 최대인 4,420만 명에 달했다고 유난을 떨었다. 하지만 알고 보면 영 실속이 없다. 이러다보니 사회복지센터에는 항상 헐벗은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진다. 독일 인구의 5명 중 1명이 빈곤하거나 빈곤에 위협받고 있으며 어린이 5명 중 1명의 부모는 지난 4년 내내 가난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한부모나 이주민 가정의 생계는 더욱 막막하다. 이 연구를 수행한 베르텔스만재단은 주된 이유로 하르츠개혁을 지목했다.”1)
“독일노총(DGB)은 하르츠Ⅳ의 제재조치가 기본권을 침해하며 정책적으로도 잘못됐다고 본다.” 독일 총선을 앞두고 현지 노동운동 포털 <레이버넷>에 23쪽 짜리 문서가 폭로되자 독일 노동계가 발칵 뒤집혔다. 문서는 하르츠Ⅳ에 대한 독일노총의 입장서였다. 위헌소송을 제기한 한 판사 덕분에 관련 당사자로서 의견서를 내야 했던 것인데, 독일노총이 이 예기치 못한 홍역을 치른 이유는 그들이 하르츠Ⅳ를 지금처럼 강력하게 비난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입장서에는 하르츠Ⅳ가 어떻게 임금노동자의 권리를 제한하면서 의도적으로 저임금 분야를 조성했는지를 낱낱이 밝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독일노총이 이 문서를 수개월이나 비밀에 부쳤다는 사실이 함께 드러나면서 논란은 더욱 뜨거웠다. 실직노동자들을 대변하는 통합서비스노조(Ver.di) 실직자위원회는 이 문제로 독일노총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2)
기층노동자 외면한 합의주의
사실 독일노총이 하르츠개혁 비판을 반길 리는 없었다. 독일노총 또한 하르츠개혁으로 손에 피를 묻혔기 때문이다. 원래 2005년 1월 1일에 발효된 하르츠Ⅳ는 독일의 4단계 노동시장 개혁 방안 중 마지막 ‘아젠다 2010’ 개혁안 중의 하나이다. 적녹연정③을 이끌던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는 당시 실업률이 10%에 달하던 침체 속에서 경제를 활성화하고 실업률을 축소한다는 명목으로 2003년 이를 입안했다. 그러나 아젠다 2010은 해고 규제를 완화하고 노동과 복지를 연계하여 자격을 제한하는 한편 실업수당 및 연금을 삭감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이었다. 특히 하르츠Ⅳ는 실업수당 기간과 비용을 줄이고 제재안까지 도입하면서 논란이 컸다.
당시 슈뢰더는 노사정 합의 형식의 사회적 대타협을 기반으로 이를 도입했는데 그 당사자 중 하나가 독일노총이었다. 독일노총 산하 금속노조와 통합서비스노조 담당자가 아젠다 2010을 고안한 하르츠위원회에 참가해 협력했다. 페터 하르츠 폴크스바겐 노무이사가 주도한 이 테이블에선 노동유연화 방식이나 실업수당까지 협의하여 아젠다 2010을 완성했다.
그런데 독일노총은 아젠다 2010으로 적녹연정이 총선에서 패배4)하고 대연정이나 우파연정이 집권한 뒤에도 계속해서 양보안을 받아들였다. 대표적으로 2008년 경제위기 당시 단축노동제5), 기업 단위의 노동시간 유연화, 폐차 보상금제, 임금 인상률 제한 등이 그것이다. 이 제도들은 정규직 노동자들에게도 희생을 전제했지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경제위기의 완충 지대로
내몰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경제 위기 후 사정이 개선되기는 했으나 당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재계약에 실패하고 다수의 파견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었다.6)
독일 좌파당 공동대표 베른트 리싱어는 이 같은 노조 지도부의 양보에 “그들은 대연정7)과 일종의 불가침협약에 단단히 묶여 있다”며 “정부가 전면적인 사회정치적 폭력을 자제하는 대가로, 노조 지도부는 정치적 투쟁에 단결하고 불안정 노동이나 노동계약을 후퇴시키는 기업에 맞선 정치 투쟁을 삼가고 있다. 신자유주의 정치와의 보다 광범위한 대결에서 벗어나 있다”고 비판한다.8)
반발하는 노동자들 그리고 새로운 계급 정치
독일노총은 아젠다 2010에 대한 사회적 합의에 참가한 한편, 하르츠법 반대 시위도 지지하지 않는 입장을 폈다. 그러나 기층 노동자나 사회운동의 반발은 거셌다. 통독의 도화선이 된 라이프찌히 시민들의 월요 시위가 2003년부터 시작됐으며 대중 시위에는 전후 최대인 50만 명까지 참가했다. 급기야 이 시위를 이끌었던 독일통합노조와 독일금속노조 기층조합원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좌파당 창당 운동까지 벌어졌다. 결국 2007년 사민당 내 좌파 선거대안(WASG)과 구동독 공산당의 개혁당 후신인 민사당(PDS)이 연합해 좌파당(die Linke, 디링케)을 창당했다. 당시 78만 명의 전 사민당 유권자들이 이 새 정당으로 돌아섰으며 2009년 첫 번째 선거에서 76명의 의석을 확보할 만큼 반향이 컸다.
좌파당이 창당하면서 독일노총은 선거 때마다 사민당을 공식적으로 지지할 수 없게 됐다. 또 좌파당이 주도하여 최저임금 제도를 도입하는 등의 성과도 남겼다. 그러나 이들의 지지율은 10년 전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2005년 창당 전 8.5%, 2009년 첫 번째 총선에서 11.9%, 2013년 총선에서 8.6%, 2017년 총선에서 9.2%으로 최근 다시 선전했으나 초기 성과에서 정체하고 있다. 오히려 최근 창당한 반난민, 인종주의의 극우 독일대안당(AfD)이 독일 노동자계급의 지지를 급속히 빨아들이고 있다. 지난 총선에서 블루칼라 노동자의 33%, 실업자의 29%,
자영업자의 27%가 이 정당을 지지했다. 그 중에서도 주로 남성(25%), 저학력층(28%), 35-44세(24%)와 45-59세(23%)의 비율이 컸다. 이들이 독일대안당을 선택한 이유는 주로 난민과 이주민 유입에 대한 반대 때문이었다. 독일대안당은 인종주의를 부추기며 노동자계급의 불만을 모았지만 좌파당은 이 점에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독일 좌파당 내에서도 이에 대한 고민이 많다. 그 중 2012년을 기점으로 ‘연결하는 정당’이라는 혁신 전략이 주되게 논의되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분열과 규율에 맞서, 실업자, 다양한 형태의 불안정 노동자 사이에서 동맹을 찾아 연결한다는 것이다. 좌파당 공동대표 베른트 리싱어는 “좌파당의 임무는 다양한 계급, 계층의 이해를 동일시하고 연대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한편, 노동운동 내에서는 새로운 파업운동이 일어나며 주목을 모으고 있다. 미조직 노동자가 많은 새로운 산업부문 특히, 콜센터, 식품 생산과 서비스, 청소, 교육과 병원에서의 간호서비스, 보안업 등에서 조직되고 있는데 여성과 이주노동자의 참여가 높다. 그 중에서도 지난해 4월 베를린 샤리떼병원 간호사노조가 파업을 통해 병원 직원 수를 늘려 노동 강도를 줄인다는 사항을 담은 첫 번째 단협을 성공적으로 체결하면서 이를 모델로 간호사들의 파업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들은 ‘우리가 더 많으면 모두에게 좋다’는 식의 ‘모두를 위한 일자리를 위한 투쟁’으로 선전했고 또한 복지가 후퇴되는 것이 난민이 아니라 정부의 문제임을 드러내면서 성공적인 투쟁 모델로 주목되고 있다.
이렇게 독일 노동자들은 아젠다 2010의 실패를 딛고 빼앗긴 자들의 새로운 투쟁을 조직하고 있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 취임 이후 국내 언론들은 부쩍 철 지나간 아젠다 2010을 다시 꺼내들곤 독일에서 배워야 한다고 호들갑을 떤다. 하지만 과연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무엇일까? 노동자의 양보를 강제하며 사회를 후퇴시키는 ‘합의’일까 아니면 모두를 위한 노동자들의 투쟁일까?[워커스 37호]
[각주]
1) 독일 좌파 일간지 <융에벨트> 9월 21일자 보도
2) 독일 사회주의 일간지 <노이에스도이칠란트> 10월 20일자 보도
3) 사민당과 녹색당 간의 연립정부
4) 사민당은 1960년대 이후 최소 33% 이상의 콘크리트 지지층을 유지했다. 그러나 아젠다2010을 도입한 뒤 실시된 2005년 총선에서 패배했고, 2009년 총선에선 득표율 20%대로 곤두박질치곤 돌이키지 못하고 있다.
5) 최대 24개월까지 실업수당과 동일한 수준의 단축 노동 급여를 받으면서 기존의 노동계약을 유지
6) 독일의 노동조합, 프리드리히에버트재단, 2014
7) 기민/기사당연합과 사민당 간의 연립정부
8) 베른트 리싱어, 연결하는 정당(The Connective Party), <자코뱅>, 201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