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박다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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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영등포구 LG전자 본사 앞. 점심시간을 맞아 밖으로 나온 직장인들에게 유인물을 나눠주는 조합원들의 손이 분주하다. A4 1장짜리 유인물은 신영프레시젼분회의 소식지 〈신영아 노조하자〉 특별호다. 원청인 LG가 신영프레시젼의 고용참사 문제와 어떻게 얽혀있는지 설명하는 글이 실려 있다. 하루 중 태양이 가장 높이 떠올라 있는 시간. 아직 초여름이지만 조합원들의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다. 같은 노동자로서, 해고 문제를 다루는 여성 노동자의 이야기를 한번 읽어볼 법도 하지만 내치는 손이 많다. LG전자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 박한 건지, 혹시 회사에 밉보일까봐 두려운 것인지 알 길이 없어 야속한 생각이 든다. 먼저 유인물을 달라고 하며 “고생하십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반가운 단비 같다.
신영프레시젼에서 13년 간 일한 한 조합원은 “LG가 이 높은 건물을 올릴 수 있었던 건, LG의 직원들뿐 아니라 하청업체, 그 하청의 하청업체가 함께 했기 때문이다. 상생기업이라고들 하는데 울화통이 터진다. 단물만 빼먹고 해외로 가면서 하청업체와 상생의 길을 모색한 적 있나 묻고 싶다”고 말했다. 하청업체 노동자들은 동반성장위원회와 공정거래위원회가 주관하는 동반성장지수 평가에서 2015년부터 3년 동안 최우수 등급을 획득한 바 있는 LG전자의 민낯을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와인폰, 아이스크림폰, 초콜릿폰 같은 피처폰부터 V20, 구글픽셀폰2, Q6, G5, 구글넥서스5X, V10, G4, G3 등의 스마트폰까지 LG의 휴대폰은 신영프레시젼 노동자의 손끝을 거쳤다. LG는 신영프레시젼을 ‘우수협력사’라고 하며 그 노고를 여러 번 치하했다. 신영프레시젼 대표이사실에는 ‘LG전자 협력회 최우수 회원사상’ ‘자주개선 BEST PRACTICE 우수상’ ‘우수협력사상’ ‘품질혁신상’ 등 수많은 상들이 진열돼 있다. ‘혁신적 품질개선 및 적기 조달, 비용경쟁력 부문의 탁월한 실적을 창출했기’에 받았다는 이 상들은 사실 신영프레시젼 노동자 개개인이 받아야 할 상이었다.
신영프레시젼 조합원들은 ‘우수협력사’로 선정되기 위해 분주했던 몇 개월의 시간을 기억한다. 독한 용액을 뿌려가며 기계의 찌든 때를 벗기고, 새빨개진 눈을 비비며 ‘불량률 제로’에 도전했다. LG의 높으신 분들의 동선에 방해가 될까 식사 시간, 쉬는 시간도 바꿔가며 일했던 날들이었다. 물량의 ‘적기조달’을 위해 바친 시간은 셀 수가 없다. 물량이 급하다고 하면 퇴근했다가도 다시 돌아와 밤새 일했고, 불량이 났다고 하면 인천공장이든 평택공장이든 뛰어가 며칠을 있다 오곤 했다. 여름휴가 역시 LG의 일정이 정해져야 따라 갈 수 있는 것이었다. 신제품이 명절을 맞아 출시되기에 명절 때도 나와서 일을 해야 했다.
신영프레시젼처럼 사출부터 사상, 코팅, 조립 등 휴대폰 케이스 부품 공정 전체를 운영하는 곳을 EMS(Electronic Manufacturing Services)사라고 부른다. 새로운 스마트폰 모델은 일 년이 채 안 돼서 나오고, 사이클이 짧다보니, LG는 이를 탄력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EMS사를 활용했다. 공정이 외주화 될수록 위험 부담은 낮아졌다.
LG전자의 갑질과 횡포
LG전자의 물량에 따라 수익이 결정 나는 구조에서 LG전자는 온갖 요구를 할 수 있는 지위에 있었다. 파란색이었던 신영프레시젼의 로고가 경쟁사를 떠올리게 한다는 지적에 빨간색으로 바뀐 것은 많은 일화 중 하나에 불과하다.
[출처: 박다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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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는 물량을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만큼 확보하기 위해 1차 하청업체들이 다른 업체와 거래하는 것을 막았다. 1차 신영프레시젼부터 다른 2차 하청업체의 사정을 들어보면 그렇다. 생산 능력(CAPA, 케파)을 100%로 채우려는 게 대표들의 욕심이었지만, 50%를 넘지 못했다. 일이 많을 땐 넘치게 많고, 없을 땐 한없이 없었다. 신영프레시젼분회에 따르면 2012년 말, LG는 신영프레시젼이 사업다각화를 위해 타사와 거래하는 것을 막았다. 사업다각화는 LG 의존도에 따른 심각한 경영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필수적이었지만, LG는 기술유출을 이유로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 사건은 신영프레시젼에서 사업다각화를 추진하던 경영진이 물갈이 되는 것으로 종결됐다.
이희태 신영프레시젼분회장은 “영업다각화를 막지 않았다면 위기가 늦게 오거나 안 왔을 것”이라며 “LG는 끊임없이 자기들 물건만 받도록 강제하고 압박하고 단속했다. 언제든지 물량을 빼겠다는 협박도 있었다”고 말했다.
신영프레시젼이 LG맞춤으로 운영되다보니, 신영프레시젼의 기술도 LG맞춤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LG는 지난 몇 년 동안 EMS사들의 금형 설계 및 가공 비중을 대폭 줄였다. 대신 LG전자가 지정한 업체에서 제작한 금형을 사용하도록 강제했다. 신영프레시젼이 가진 기술력 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금형기술임을 감안하면 LG의 이런 정책으로 신영프레시젼의 기술력은 사장될 수밖에 없었다는 게 노조의 주장이다.
설비 구매를 강제해 피해를 입었다는 정황도 있다. LG 플래그십 스마트폰인 G3는 하단 스피커부에 촘촘히 작은 구멍이 나있는데, 이를 가공하는 레이저 설비를 신영프레시젼을 비롯한 하청 업체에 구매하도록 강제했다는 것이다. 이희태 분회장은 “당시 LG는 이 레이저 공정이후속 모델들에 계속 적용된다고 했지만, 막상 거의 적용되지 않았고 결국 신영프레시젼은 이 장비를 헐값에 팔아야만 했다”고 전했다.
하청의 위기 불구경하듯 바라본 LG
LG원청의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시스템은 2, 3차 하청 업체들의 더 큰 피해로 이어졌다. 2016년 갑을프라스틱의 부도는 여러 가지를 시사한다. 갑을프라스틱은 신영프레시젼, 진원전자, 일야, 우성엠앤피 등과 함께 LG 휴대폰 케이스를 만드는 1차 하청업체였다. 중국에 2개의 대공장을 가동했고, 매출도 1000억 원대를 기록하는 중견기업이었다. 하지만 대표이사가 베트남 부동산에 투자한 350억 원이 증발하면서 문제가 터졌다. 갑을프라스틱은 2016년 6월 30일, 55억여 원의 어음을 막지 못해 부도에 이르렀다. 황종갑 대표이사는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위반(업무상의 횡령과 배임)으로 6년 형을 선고받았다.
문제는 2, 3차 LG의 하청업체들이었다. 갑을프라스틱과 거래하던 280여 개 업체가 260억 원의 외주가공비를 받지 못했다. 휴대폰 부품사부터 퀵서비스 업체들까지 피해업체의 종류도 다양했다. 부품사 180여 곳이 부천시에 집중돼 있어 지역 내 금형산업이 크게 위축될 것이란 우려가 터져 나왔다.
A조립업체 대표 B씨도 당시 큰 피해를 입고 사업을 접었다. B씨가 갑을프라스틱으로부터 받아야할 금액은 10억 원 정도였는데, 이 돈이 은행에 외상매출채권으로 잡혀 있어, 오히려 B씨가 은행에 10억 원을 갚아야 했다. B씨는 “재산이 압류되고 가정까지 파탄났다”라며 “그때 신용불량이 돼서 아직까지 어렵게 살고 있다”고 말했다.
[출처: 박다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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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씨에 따르면 갑을프라스틱 부도 과정에서 LG의 피해는 최소화됐다. 1차 부도가 확실시 됐던 2016년 6월 30일. 갑을프라스틱으로부터 돈을 받지 못한 상황에서도 B씨의 공장은 그날까지 약속한 물량을 댔다. 공장을 계속 가동 시킨 것은 LG 관계자로부터 비용에 대해 확답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는 부도의 전조 증상을 알았더라면 사업 규모를 줄여 피해가 훨씬 줄었을 것이라고 토로했다.
“G5를 생산하고 있었는데 물량이 많고, 계속 독촉을 하니까 직원 100여명을 두고 3교대로 24시간 공장을 돌렸다. 각종 수당이 붙었고, 일손이 모자랄 땐 용역을 불러 철야작업에 나서 인건비가 배로 뛰었다. LG에서 새벽 3시고, 4시고 사람을 보내니 사장인 나도 잠을 못자고, 완전히 전쟁을 치르는 것처럼 일했다. 만약 부도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최소인원만 돌리면서 준비했을 텐데 한 번에 뒤통수를 맞아버렸다. LG 휴대폰을 책임감 있게 만든 대가는 모든 피해를 홀로 지는 것이었다,”
B씨는 LG가 갑을프라스틱의 부도를 미리 알고 있었을 것이라 추측했다.
“LG는 1차 하청업체의 자금 이동을 모니터링한다. 그 역시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일환이다. LG는 갑을에서 들어간 돈이 몇 개월 동안 밖으로 안 나오는 것을 알고 있었고, 황종갑 대표이사가 차용을 몇 번씩이나 요청했기 때문에 모를 수 없었다. LG로선 받을 거 다 받고 끝이 난 것인데 그 아래의 하청업체 직원 2~3000명이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었다. 양심을 가졌다면 도의적으로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손실과 피해는 약한 사람들한테 다 갔다. LG에게 비용을 요구해도 답은 같다. 우리와 직접 계약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댄다. 그 앞에서 할복자살 하지 않는 이상 돈 받을 방법은 없다고 본다.”
B씨 역시 신영프레시젼처럼 LG에서 사업다각화를 막았다고 주장했다. B씨는 한 공장이 하나의 업체하고만 거래할 수 있어서 공장 2개를 따로 운영했다. B씨는 “LG가 중복 거래를 못하게 했다. 내가 우성과 거래하는 공장, 갑을과 거래하는 공장을 따로 운영한 이유다. LG는 ‘관리가 안 된다’ ‘제품이 섞인다’며 인정을 안 했다. 우리는 하청의 하청이니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부천지역에선 갑을 부도 한 달 후, ‘갑을프라스틱 부도관련 협력업체 등 지원방안 회의’를 열고 상황을 공유하는 한편 지원책을 마련했지만 업체들의 피해를 줄이진 못했다. 핵심 대책은 싼 금리로 대출을 받는 것이었는데 사업을 접어야 하는 입장에서 또 돈을 빌려봤자 빚만 될 뿐이어서, 거의 신청한 사람이 없었다.
피해업체들 중 40여개는 ‘갑을프라스틱 채권단 대책위원회’를 만들어 해결책을 모색했지만 유의미한 성과는 얻지 못했다. B씨는 “LG와 거래를 많이 하는 업체들은 거의 채권단에서 빠졌다. 2~30억 씩 피해를 봤으면서 문제제기를 안 했다. 단가를 올려줄 테니, 채권단에서 빠지라는 LG의 종용이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채권단에 들어온 업체들은 주로 갑을하고만 거래해 어떤 출구도 없던 업체들이다”라고 주장했다.
2017년 LG전자의 2차 하청업체 10여 곳이 ‘LG전자갑질피해대책위원회(대책위)’를 꾸린 것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문제다. 대책위는 LG전자의 제품 설계 오류로 대규모 불량이 발생해, 금속 케이스를 공급한 부품업체들이 심각한 자금난을 겪게 됐다며 LG전자에 해결을 요구했다.
이들은 “세계 첫 분리형 금속 케이스 스마트폰인 G5는 LG전자의 설계 오류 등으로 초기 수율(불량 없는 양산 비율)이 20∼25%에 그쳤다”며 “LG전자는 불량에 따른 손해를 1차 하청업체인 한라캐스트와 2차 하청업체들에 전가했다”고 주장했다.
깨진 ‘운명공동체’, 망하는 건 하청 몫
한편 LG전자는 지난 4월, 스마트폰 국내 생산 중단을 전격 발표하며, 모바일·커뮤니케이션(MC) 부문의 생산 거점을 베트남으로 이전하겠다고 밝혔다. 중국, 베트남으로의 이전은 계속 진행돼 왔지만 국내 생산 중단은 큰 파장이 예상되는 일이었다. 앞서 우성엠앤피는 베트남에 공장을 지으면서 인천공장을 닫아 대량 실업이 발생했다. 그곳에서 일했던 한 노동자는 “지난해 초 공장이 폐업했다. 정규직은 퇴직금이라도 챙겼지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퇴직금도 받지 못하고 나와야 했다”고 말했다. 이 노동자 역시 “LG의 물량을 맞추느라 잔업과 야근을 반복했다”고 밝혔다.
당장 신영프레시젼의 하청업체들도 위기에 처해있다. 현재까지 2개의 업체가 폐업한 것으로 확인됐다. 신영프레시젼 하청업체인 S사 관계자는 “2~300명의 직원이 주야 맞교대로 일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휴업 상태”라며 “신영이 메인밴더도 아니고 일을 요구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어서 불가피하게 그렇게 됐다”고 말했다.
LG가 하청업체들의 사업다각화를 막았기에 1, 2차 하청업체들은 자연스레 LG에 의존하는 운명공동체가 될 수밖에 없었다. LG의 수익이 곧 이들의 수익이고, 적자가 곧 이들의 적자로 이어졌다.
LG전자 모바일·커뮤니케이션(MC) 부문의 매출은 지난 시기 등락을 반복했지만 2014년부터는 쭉 하향세를 그리고 있다. 하청업체들의 상황도 비슷하다. 일야, 우성엠앤피, 진원전자, 갑을프라스틱, 신영프레시젼은 매출액이 급감했고 영업이익에선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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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황에서 갑을프라스틱은 2016년 폐업했고, 신영프레시젼은 지난해부터 청산절차에 돌입하겠다며 엄포를 놓고 있다.
이러한 위기는 단지 휴대폰 부품 하청업체만의 문제가 아니다. 재벌기업과 거래하는 하청업체 대부분이 전반적으로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다. 박준도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은 “구미지역도 이와 비슷한데 삼성, LG 등의 기업들이 해외로 빠지면서 토사구팽 당하고 도산하는 업체가 줄을 잇는다는 보도가 10년 전부터 나왔다. 삼성, LG의 1, 2차 하청업체들은 재벌 기업에만 납품하다보니 기술적 자발력이 떨어진다. 재벌 종속성은 커져갔는데 재벌기업이 이들에 대한 책임을 안 지는 게 문제다”라고 꼬집었다.
박 연구원은 전자산업 위기가 조선업과 자동차 산업 위기만큼 심각한데도 이에 대해 별다른 대책이 나오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박 연구원은 “전자산업은 서비스업보다 노동 강도가 세지만, 임금이 높기 때문에 생계를 책임지는 여성노동자들이 많다. 이들을 생계보조자보다는 생계부양자로 보고 심각한 위기로 받아들여야 한다. 고용을 유지하기 위한 정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편, 1차 하청업체들은 LG원청의 피해자이기도 하지만 노조탄압의 가해자이기도 하다. 신영프레시젼은 노조 설립 직후, 정리해고 등을 감행하다 현재는 청산을 밀어붙이고 있다. 갑을프라스틱에선 2002년 노조가 만들어졌지만 2003년 지회장을 내보내며 노조가 와해됐다. 초대 지회장을 맡았던 이혜원 정의당 경기도당 부위원장은 “500원 짜리 빵 하나를 주고 잔업을 시켰다”라며 “여성노동자들이 열악한 조건 속에서 밥도 못 먹고 일하는 것을 보고 노조를 결성하게 됐다”라고 말했다.
이 전 지회장은 “300명 조합원으로 시작했는데 회사의 회유와 협박이 이어졌고, 내가 삭발하고 단식할 때는 30명 정도가 남았었다”라며 “단식 25일차에 쓰러졌는데 그때까지도 교섭이 잘 안 돼 조합원에 대한 손배와 고발을 다 취하하는 조건으로 퇴사했고, 노조도 없어졌다”고 설명했다. 원청은 하청의 단물을, 회사는 노동자의 단물을 빨아먹는 구조 속에서, 가장 힘없는 노동자들은 여전히 거리로 내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