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문재인 대통령의 방문과 부산-헬싱키 직항노선 발표로 화제가 된 핀란드는 한국에는 낯선 국가다. 사우나와 치아에 좋은 껌, 혹은 TV프로그램에 등장한 핀란드 청년들 정도가 보통의 한국인들이 기억하는 핀란드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누군가는 (이제는 그 위상을 잃었지만) 한때 전 세계 휴대폰 시장의 강자로 군림했던 핀란드 기업 ‘노키아’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기업 공급망까지 인권침해 확인을 의무화
문재인 대통령의 방문을 앞둔 6월 초, 핀란드 정부는 자국 기업에 공급망에까지 인권침해 여부를 확인(Check)하는 것을 의무화하는 법안 도입을 발표했다. 법안 도입을 위해 관련 이해당사자들을 대상으로 의견을 묻는 작업을 시작했으며, 관련 연구가 마무리 되는 대로 의회에서 법안을 논의할 것으로 보인다. 만약 핀란드에서 이 법안이 통과되면 프랑스에 이어 ‘인권실천점검의무(Human Rights Due Diligence)’를 자국 기업들에 의무화 하는 두 번째 국가가 된다. 특히 핀란드가 올해 7월부터 EU 의장국을 맡는 다는 점에서, EU 차원에서 논의가 확산될 가능성도 크다.1)
[출처: 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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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국가들이 기업들로 하여금 공급망에도 인권침해 확인 의무를 부여하려는 시도는 2011년에 제정된 ‘유엔 기업과 인권 이행 원칙’ 때문이다. 이 이행 원칙을 통해 ‘인권실천점검의무’란 개념이 도입됐다. 이것은 기업들이 인권 침해를 일으킬 소지를 미리 확인하고, 확인된 문제를 시정 조치하고, 이행여부를 감시하고, 보고하는 것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국내에선 ‘인권 실사’란 말로도 번역되는데, 단순히 기업들에게 예방 차원의 확인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 인권 침해 위험에 대한 시정 조치 의무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국가인권위원회는 ‘인권실천점검의무’로 번역해 사용하고 있다. 아직 한국에서는 공식적인 번역 용어가 확립되지 않은 낯선 개념이지만, 이러한 기업의 의무가 공급망에까지 적용된다는 원칙을 확립했다는 점에서 반드시 주목해야 할 용어다.
인권실천점검의무가 유엔과 OECD에서 채택된 2011년 이후, EU국가를 중심으로 이를 법률로 구체화하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지난 《워커스》를 통해 소개했던 프랑스의 법안이다.2) 이외에도 영국에 진출한 기업들이 공급망에서도 인신매매 등의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고하도록 의무화한 영국의 현대판노예방지법(Modern Slavery Act)도 인권실천점검의무를 도입한 사례다. 이 법에 따라 삼성전자도 보고서를 제출했다.3)
이뿐만이 아니라 네덜란드에서는 기업의 공급망까지 아동노동 금지에 관한 인권실천점검의무를 도입하는 법안이 논의 중이다. 독일 정부와 덴마크 의회도 프랑스와 유사한 법안 도입을 위한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당장 EU 차원에서 한국기업을 포함해 EU에 진출한 기업들에 인권실천점검의무를 의무화하지는 않겠지만, 대기업과 관계 맺는 모든 공급망에 최소한 아동노동, 인신매매, 강제노동 등 이슈에 대해 점검하고 조치 이행 의무를 부여하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된 것은 확실하다.
한국정부와 기업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핀란드에 법이 도입되면 노키아는 자사 핸드폰 부품의 원료에서부터 부품을 공급하는 전 세계 협력업체와 자사 해외생산공장에 이르기까지, 핸드폰 제조 과정에서 노동권을 침해하지는 않았는지, 부품조달 과정에서 무력분쟁과 아동노동에 연루되지는 않았는지, 생산 과정에서 주민들의 환경권을 침해하지 않았는지 확인하는 의무를 부여 받는다. 이는 다른 핸드폰 제조업체인 삼성과 엘지도 결국 해당 기준에 따른 보고서를 반드시 작성해야 한다는 국제적 압력과 마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삼성의 경우, 삼성의 하청업체까지 갈 것도 없이 삼성이 직접 운영하는 해외공장에서 ‘노동권을 포함한 인권침해가 없다’는 말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삼성만이 문제가 아니다. 국내 대기업들의 국내외 협력업체와 부품 공급업체까지 인권실천점검의무를 실시했을 때, 당장 노동권 문제만 하더라도 자신 있게 보고서를 공개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리고 보고서를 공개했을 때, 유럽의 기업들이 자신들보다 낮은 기준을 적용하는 한국기업들을 상대로 문제를 제기할 것은 쉽게 예상되는 일이다.
그런 측면에서 왜 EU가 한·EU FTA를 근거로 한국정부에 국제노동기구 핵심협약을 비준할 것을 요구하는지 이해가 된다. 한국 정부의 ILO핵심협약 비준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면, 한국기업은 의무는 다하지 않으면서 돈만 벌어가는 기업으로 낙인찍히게 될 테다. 본국인 한국에서 국제기준을 지키지 못하는 기업이, 해외 사업장과 공급업체 및 협력업체들에 노동권 침해 예방 조치를 제대로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 정부는 ILO핵심협약 비준은 물론이고 최소한 아동노동 및 인신매매, 강제노동에 한국기업과 그 공급망이 연루되지 않도록 인권실천점검의무를 의무화하는 법안을 준비해야 한다. 부질없을지라도, 문재인 대통령의 북유럽 방문이 이런 시대의 변화를 인식하는 계기가 됐기를 기대하는 것도 이런 이유이다.
<각주>
1) 이 글은 기업인권리소스센터의 사무국장인 필 블로머 글(Europe takes a big step towards companies having ‘duty of care’ on #HumanRights)을 인용 및 참고하여 작성됐다. 원문은 https://www.eureporter.co/ economy/2019/06/12/europe-takes-a-big-steptowards-companies-having-duty-of-care-onhumanrights/
2) http://www.newscham.net/news/ view.php?board=news&nid=102134
3)https://www.modernslaveryregistry.org/companies/9094-samsung-electronics-uk-limited/ statements/30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