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아픔’ 때문에 아파한다. 내가 아파서, 남에게 민폐를 끼친 것 같아서, 동료에게 짐을 맡긴 것 같아서 또 아파한다. 질병은 죄책감이란 다른 아픔을 남긴다. 하지만 질병은 들숨과 날숨에서 우리와 만났다가 헤어지곤 한다. 질병은 언제나 우리의 생활 속에서 공존한다. 누구나 아플 수 있고, 누구나 아플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죄책감’이라는 또 다른 아픔을 만들어내기보다는, 질병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은 어떨까.
조한진희(반다) 씨는 자신의 책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조한진희, 동녘, 2019.5.27)에서 질병권, ‘잘 아플 권리’를 주장한다. 질병을 악惡으로 규정한 사회. 아픈 몸은 패배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으니, 스스로 건강권을 쟁취하라고 강요하는 사회. 이 같은 폭력적인 구조 안에서, 조한진희 씨는 질병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자고 제언한다. 그는 질병 자체가 비극이 아니라, 그것을 온전히 자신의 삶으로 겪어내지 못할 때 비극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질병을 삶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선 어떤 것들이 필요할까. 조한진희 씨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출처: 김한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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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이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다. 사실 많은 사람이 ‘아픔’에 미안해한다. 본인도 그랬나?
당연하다. 2011년경 나는 서 있다가도 쓰러지고, 버스조차 타지 못하는 몸 상태가 됐다. 2009년 팔레스타인에 머문지 3개월 정도 됐을 때부터 몸이 아프기 시작했는데, 상태가 점점 심각해진 것이다. 당시 나는 팔레스타인 난민 가족 이야기를 담은 영상 작업을 하고 있었다. 편집을 80~90%까지 한 상태였는데 이러다 죽겠다 싶어 휴직했다. 정말 일을 더 하면 죽을 것만 같았다. 모두가 그 영상을 기다리고 있던 때였다. 무슬림이자 난민인 가족이 어렵게 출연을 결정한 영상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완성하지 못한 것에 대한 괴로움이 상당했다. 또한 동료에게 약속을 지키지 못한 미안함에 아팠다. 나의 휴직으로 영상 수입이 끊겨 당장 사무실 월세, 활동비 지급에도 문제가 생겼다. 복잡한 마음에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행복한 삶은 질병을 ‘극복’하지 않아도, 자신의 몸을 정상으로 교정하지 않아도 자책감에 시달리지 않고 존중받는 사회에서 가능하다.” (12쪽)
그리고 한참을 질병과 싸운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다 질병과의 싸움을 멈췄다고 했다. 질병과 ‘싸우는’ 삶과 질병을 ‘수용하는’ 삶은 어떻게 다른가?
사실 건강이 어느 정도 호전됐기 때문에 할 수 있던 말이기도 하다. 몸이 아팠던 몇 년 동안 나는 정해진 스케줄에 따라 산길을 걷고, 신선한 음식을 먹으며, 낮잠을 자고, 자기 전에 족욕을 했다. 하루하루, 모든 생활이 건강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이렇게 살면 70대 중반까지는 살겠지 싶었다. 그러한 삶에서 ‘현재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주변에 많은 친구가 세상을 떠났다. 질병도 죽음과 같이 인생의 좌절이 아닌 삶의 과정인 건 아닐까 생각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질병에 대한 두려움을 하나씩 내려놓으며 아픔을 수용했다. ‘잘 아플 권리’를 찾으며 사회에 조금씩 복귀하기 시작했다. 건강을 중심으로 살지 않고 내 의지대로 살겠다고 마음먹으니 인생이 선명해졌다. 완치 이후로 유예됐던 내 삶이 돌아왔다.
아픈 몸을 향한 간섭과 통제, 즉 잔소리는 당연한 것으로 인식된다. 간섭과 배려는 어떻게 다른가?
한국 사회는 심사와 평가에 익숙하다. 음악, 여행, 음식 관련 TV 프로그램 모두 서바이벌을 기반으로 한다. 모두가 심사위원, 혹은 감시자의 위치다. 대상이 무엇이든 ‘통제’하려 든다. 건강도 그렇다. 한국에서 건강은 스펙으로 작용한다. 아픈 사람을 스펙을 잃은 패배자로 본다. 더욱이 간섭과 통제의 대상이 되기 쉽다. 아프니까 ‘이건 하지 말라’, ‘여기까지만 하라’, ‘빨리 나으라’는 말까지도 비슷한 맥락이다. 심사위원, 감시자의 시선이 아닌 조력자의 시선으로 아픈 몸을 바라봐야 한다.
내겐 중증 장애인 친구가 한 명 있다. 내가 몸이 아팠을 때 그 친구에게 무언가를 부탁하며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그러자 친구가 “네가 미안하면 나는 죽어야겠네?”라고 말했다. 내 사고가 ‘정상성’을 기반에 두고 있었기에 나온 말이었다. 이후 내가 미안하고 민폐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그 친구 말을 떠올린다. 의존하는 사람을 견디지 못한다는 것 자체가 특권적 사고방식이다. 우리는 모두 의존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배려는 그렇게 시작한다.
“차별 때문에 질병을 말할 수 없는 순간이 오거나, 아픈 사람이 미안해하는 현실을 목격할 때도 아팠다. 슬픔, 분노, 쓸쓸함 같은 것들이 몸에서 소용돌이쳤고, 숨을 고르기 위해 가만히 엎드려 있어야 했다.” (15쪽)
아픈 이와 관계는 어떻게 맺어야 할까? 아픈 이의 ‘잘 아플 권리’를 위해 어떤 역할이 필요한가?
사람들은 내게 ‘괜찮냐’, ‘빨리 나으라’ 같은 말들을 많이 했다. 나는 ‘괜찮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들 모두 선의에서 한 말임을 나는 안다. 이후 페미니즘 저널 <일다>에 “반다의 질병관통기” 연재를 하면서, 아픈 이에 대한 간섭과 통제 문화를 지적했다. 그랬더니 그 이후 사람들이 내 건강에 침묵으로 일관했다. 마치 성폭력 문제에서 2차 가해에 대한 자기검열로 토론하지 않는 것과 비슷했다. 어떻게 보면 또 다른 나쁜 결과를 초래했다. 내 말은 아픈 사람도 이런 삶을 원한다, 아파서 못하는 건 민폐가 아니라는 게 핵심이었다. 그래서 아픈 이에게 더욱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기도 했다. 내가 아픈 이를 위해 어떤 배려를 할 수 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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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특히 건강에 대한 정보가 넘쳐난다. 이것은 저자가 말하는 ‘질병을 공유하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종편(종합편성채널)에 하루 종일 의사가 나와 건강 이야기만 하더라. 보다보면 질병이 마치 ‘악’으로 느껴지곤 한다. 그리고선 TV 속 의사 말을 따라 이 질병엔 이 음식을 먹고, 저 질병엔 저 운동을 한다. 많은 이들이 질병이라는 악을 이기기 위해 수많은 정보를 흡수한다. 이런 사회에서 건강 관련 종편 프로그램은 사람들에게 ‘건강 판타지’를 심어준다. 문제는 여기에 건강에 대한 사유가 없다는 것이다. 건강하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모른다. 마치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력만 하면 성공한다는 착각과 비슷하다. 이 같은 배경에서 건강은 우리의 삶을 볼모로 잡고 있다. ‘건강 식민지’에서 우리는 많은 것들을 잃고 산다. 질병을 공유하자는 것은 건강을 벗고 질병을 입자는 말이 아니라, 건강 강박에서 벗어나 몸을 사유하자는 말이다.
“요즘에는 죽음에 대한 주도권을 그 죽음의 주인이 아닌 의료가 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우리가 어떻게 죽느냐에 따라 죽음은 삶의 완성일 수 있다. 죽음을 삶의 일부로 다시 들여와야 하는 이유다.” (243쪽)
건강을 강요하는 자는 누구인가?
자본과 정부다. 많은 이들이 건강에 신경 쓰면 쓸수록 돈이 되기 때문이다. 자본이 주도하는 사회는 건강 기준을 해마다 높인다. 기준에서 탈락한 사람들은 ‘비정상’에 포함됐다는 위기감으로 약을 먹기 시작한다. 고혈압, 당뇨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사람을 환자의 범주로 넣고 진단, 처방, 제약한다. 그런데 또 이들을 위한 약은 완치가 아닌 관리·유지가 목적이다. 의료 자본의 입장에서 평생 약을 먹게 하는 게 이익이기 때문이다. 정부 입장에서도 국민이 건강보험료를 꼬박 꼬박 내면서, 건강은 개인이 알아서 챙기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질병의 개인화와 악마화가 국민건강보험에 20조 흑자를 안겨준 셈이다.
사회는 병명이 없는 질병을 무시하거나 정신적인 문제로 치부한다. 병가를 내려고 해도 ‘병명’이 쓰인 진단서를 요구하곤 한다. 우리 사회가 ‘병명’을 넘어 질병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보나
과도한 의료화가 부른 비극이다. 병명 부여는 의료 권력에 아프다는 상태를 인정을 받는 것이다. 반면 의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아픔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취급된다. 의료 발전으로 삶의 많은 부분이 나아진 것은 분명하나, 발전에 따른 의료 권력화로 모든 고통을 증명받아야 하는 문제가 생겼다. 모든 과학은 오류 안에서 성장한다. 나의 아픔을 과학이 증명하지 못하는 것은 과학의 한계다. 왜 과학의 한계를 나한테 묻느냐고 오히려 따져야 한다.
사회적 약자는 질병에서 어떤 차별을 받는가?
중증장애인 친구는 병원을 잘 가지 않는다. 병원을 가도 검사를 제대로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위급한 상황일 경우 큰 병원에서 CT나 MRI 같은 정밀검진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내 친구는 그러지 못한다. 휠체어를 이용하는데 이 장비 위에 누울 수 있는 자세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자세 때문에 정밀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부위는 손목뿐이다. 손목 사진으론 ‘급여 약’을 얻지 못한다. 비장애인을 중심으로 갖춰진 의료 체계는 소수자를 매일 같이 차별한다.
여성은 특히 ‘잘 아플 권리’에 취약하다. 여성은 아픈 와중에도 돌봄, 가사노동을 쉬지 않는다. 정작 여성이 아파서 돌봐줄 이가 필요할 때는 아무도 없다. 그래서 여성이 아프면 평소보다 더 바쁘다고들 한다. 또 질병을 둘러싼 시스템 자체가 여성의 돌봄을 바탕으로 한다. 한국의 보호자 간병 문화가 그렇다. 보호자 간병 문화가 남아있는 곳은 한국과 대만뿐이다. 간병은 기본적으로 병원에서 해야 할 역할이다.
“그는 의심이 담긴 시선이 제일 싫다. 중고생 시절, 월경통으로 도저히 앉아 있을 수 없어 양호실에 가겠다고 하면 교사들은 꾀병 아니냐는 눈길을 보냈다. (…) 자신의 통증을 이해받지 못한다는 고립감이 큰 괴로움을 준다.” (101쪽)
내 몸에 대해, 나의 질병을 잘 들여다보기 위해선 무엇이 가장 필요한가?
몸 일지를 쓰는 것이 가장 좋다. 일지를 쓰다보면 내 몸이 언제 격하게 반응하는지, 언제 삐거덕거리는지 확인할 수 있다. 나는 가끔씩 기면증 수준으로 쓰러져 잠이 드는데, 몸 일지를 확인하니 배란기간에 이 증상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또 내 몸이 날씨, 특정한 감정에 매우 예민하다는 것을 발견하기도 했다. 나 같은 경우엔 억울하다는 감정에 신체가 굉장히 격하게 반응했다. 이런 기록은 질병뿐 아니라 자신을 아는 데도 많은 도움을 준다.
저자가 말하는 ‘질병의 언어’는 무엇인가?
성폭력 피해자의 언어와 비슷하다. 과거에 한 여성이 호감 있는 남성의 집에 놀러 갔다가 강간을 당했다면, 이 여성은 강간을 주장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성적자기결정권’이라는 언어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언어가 생기며 비로소 ‘그 집에 놀러 간 게 내가 섹스하고 싶다는 뜻은 아니다’라는 설명이 가능해졌다. 질병도 마찬가지다. 질병의 언어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아픈데도 미안하고, 그래서 또 억울한 감정을 복합적으로 겪는다. 그래서 ‘아플 만해서 아프다’, ‘아파도 미안하지 않다’라는 말을 설명할 언어가 필요한 것이다. 질병의 언어가 생겼을 때 우리는 질병을 따라오는 미안함, 억울함을 분리해 볼 수 있다.
저자는 박종필 추모사업회 집행위원장이기도 하다. 활동가 건강권을 제안했다고 하는데.
7월이면 박종필(영상 활동가, 2017년 7월 28일 간암으로 별세, 향년 51년) 2주기다. 다들 열악한 환경에서 사회 운동을 하다 보니, 많이들 아프고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도 한다. 나의 경우도 2009년 팔레스타인에 현장 홛동 과정에서 아프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팔레스타인평화연대’ 활동가이자, ‘다큐인’ 영상활동가로서 연대 활동과 영상 작업을 위해 팔레스타인에 갔었다. 현장 활동 속에서 몸이 아프기 시작하더니 몇 년 동안 여러 질병을 진단 받기 시작했다. 원인을 찾을 수 없는 이상 증세도 많았다. 의료인들은 내가 팔레스타인에 있을 때 독성물질에 노출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아프고 나서 주변 활동가들이 돈을 모금해서 주기도 하고, 귀농한 활동가들이 농산물을 보내주며 연대를 표하기도 했다. 모두 고마운 일이었지만, 언제까지 활동가 개인들의 선함에 의존해서 살아야 할까, 라는 고민이 들었다.
나 뿐 아니라, 많은 이들이 사회 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아프게 된다. 90년대부터 함께 사회운동을 하던 동지들을 수 없이 질병과 죽음으로 잃었다. 운동사회에서 활동가의 건강과 안전을 위한 복지체계는 여전히 거의 없는 것 같다. 복지는커녕 활동가 스스로 미안함에 말도 꺼내지 못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건강권, 한편으로 ‘잘 아플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박종필추모사업회에서 활동가 건강권을 터놓고 얘기하고, ‘잘 아플 권리’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고자 한다.
“사람들에게 늘 말해왔다. 질병이 몸의 자정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지금 질병 덕분에 살아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375쪽)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말은?
이 책을 노동자들이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어떻게 보면 노동자는 건강을 강요하는 사회의 주된 피해자다. 노동 생산성 향상을 위해 건강을 관리당하고, 노동 생산성을 높이다가 산재를 당하기 때문이다. 사회를 노동 중심으로 보는 이들이 질병권을 논의했으면 좋겠다. 노동자들은 노동 강도가 높아서 아프고, 여성은 성차별로 아프고, 장애인은 ‘정상’ 중심 사회를 견디느라 아프다. 노동자, 여성, 장애인은 분리 된 정체성이 아니다. 한 존재 안의 여러 정체성과 교차된 현실을 노동자의 눈으로 보고, 사회를 바꾸는 데 질병권이 매개로 쓰이면 기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