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덜 힘들겠지 하면서 있어요
9월 20일 아침, 경북 김천시 율곡동에 있는 한국도로공사 본사 2층 로비. 한국도로공사 전국 영업소 톨게이트에서 요금수납 업무를 하던 노동자들이 12일 째 농성을 하고 있다.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자회사에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고돼 석 달 째 투쟁하고 있는 이들은 해고된 1500명의 직접고용과 관련해 사측과 대화를 하기 위해 지난 9월 9일 이곳에 왔다.
“여기 계신 언니들께 하고 싶었던 말은…. 항상 저 잘 챙겨주시느라 고생하시고 수고가 많으신 것 같아 감사하고 죄송합니다. 구호 하나 하고 마치겠습니다.”
“두 개 해도 돼요!”
“직접고용 쟁취하고 집으로 돌아가자!”
박태희 씨가 구호를 외치자 농성 중인 250명의 요금수납노동자가 함께 구호를 외친다. 농성 8일 차가 되던 날 오후, 농성장 막내 노동자인 스물여섯 살 94년생 태희 씨를 만났다.
“힘들긴 한데, 제가 가장 덜 힘든 게 아닐까 생각해요. 다들 나이도 많으시고 가정도 있으신데 저는 그런 게 없으니까 내가 가장 조금 힘든 거겠지 하면서 있어요.”
태희 씨는 처음 투쟁을 시작할 때, 노숙이나 로비 농성을 하게 될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1박하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9월 9일 오전까지도 한국도로공사 본사에 올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이날 이강래 한국도로공사 사장은 세종시 정부세종청사에서 8월 29일 대법원 판결에서 승소한 노동자들에게만 자회사 전환 의사를 확인한 후에 직접고용 인원을 확정할 것이라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했다. 태희 씨는 세종시에 요금수납노동자들의 입장을 밝히는 기자회견을 하기 위해 갔다. 기자회견을 마치고 청와대에 가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버스 안에서 김천 본사로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그때 많이 떨렸다고 했다. 당시만 해도 추석을 이 곳에서 보내게 되리라고는, 그러고 나서도 이렇게 시간이 흐를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거 돈이나 거슬러 주는 일 아니야?
태희 씨는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에 있는 한국도로공사 내촌영업소 톨게이트에서 요금수납원으로 일하다가 7월에 해고됐다. 태희 씨가 이 일을 처음 시작한 것은 2년 6개월 전이다. 홍천에서 일자리를 알아보다가 지인에게 이야기를 들은 게 계기였다. 이 일을 하기 전에 모 뷔페 체인점 베이커리 코너에서 최저시급을 받으며 일을 한 적이 있는데, 많이 힘들었다고 했다.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생활비가 필요해서 처음에는 두 달 동안 알바 한다 생각하고 들어갔어요. 근데 두 달이 지나고 다시 계약서를 쓰게 해줘서 일을 계속 하다 보니 2년이 넘었어요.”
처음에는 3교대도 힘들고, 버스가 3시간에 한 대 다니는 곳이라 출퇴근도 쉽지 않았다. 인근에 사는 직원 도움으로 출퇴근을 하던 태희 씨는 운전면허를 따고 중고차를 사서 직접 출퇴근을 했다.
태희 씨는 요금수납 업무가 재미있고 좋았다. 첫 직장이라 설레기도 했다.
“일하게 해준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했어요. 항상 백만 원은 큰 돈이야’ 하면서 살다가 월급을 받았어요. ‘내가 이렇게 큰돈을 벌다니’ 하면서 좋아했는데, 언니들 말씀을 들으니까 받아야 될 돈이 더 있는데 못 받은 거라고 하더라고요. 돈을 더 많이 벌면 좋겠지만, 그렇다고 적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어요. 첫 직장이다 보니까. 회사 다니고 내 힘으로 돈을 벌어 생활하고 스스로 뭔가 한다는 게 너무 좋았어요. 동료 언니들이 어리다고 많이 봐주시고 이뻐해 주셔서 좋았어요. 언니들은 결혼하셨고 나이도 있으시고 아이도 있으시잖아요. 그래서 업무 얘기 말고는 공감대가 많지 않았는데, 그게 좀 아쉬웠고 나머지는 괜찮았어요.”
‘최저임금’이라는 게 있다는 것도 함께 일하는 언니들을 통해 알게 됐다. 이곳은 들어온 지 한 달된 사람이나 20년 된 사람이나 모두 똑같이 최저임금을 받았다. 신입사원이 연장근무를 많이 하면 20년 근무한 사람보다 더 많은 급여를 받기도 했다.
처음에 태희 씨는 수납업무 하는 게 부끄러워 친구들에게 얘기를 못했다. 태희 씨가 이 일을 한다고 했을 때, 친구들이 많이 놀랐다. 갑자기 홍천에서 톨게이트 일을 하는 것에 한 번 놀랐고, 그 일을 2년 넘게 하고 있다는 것에 또 한 번 놀랐다. 태희 씨는 친구들 중에 사회생활을 빨리 시작한 편이다. 취업을 위해 공부를 하고 있는 한 친구는 ‘에이, 그딴 일 왜 해? 그거 돈이나 거슬러 주는 일 아니야?’라고 말하기도 했다.
“나이 있는 분들이 많이 하시다 보니 제 나이 때 하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잖아요.”
태희 씨가 실제 했던 업무는 ‘돈이나 거슬러 주는 일’이 아니었다. 수납원은 하는 일이 참 많았다. 통행료 받기와 미납 받기, 차량 흐름 관리, 입구에서 적재불량이나 과적차량을 관리 하는 업무도 했다. 청소와 풀 뽑기는 기본이다.
“출구랑 입구랑 겸해서 보고 입구 일 할 때는 청소랑 시설물 관리랑 사무실에서 시키는 심부름도 해요. 또, 출구 근무자가 화장실 가거나 식사·휴식 시간에 교대도 해주고요. 사무실 가면 미납조회 업무, 민원처리, 심사 업무도 했어요. 톨게이트에서 이뤄지는 거의 모든 일을 다 하는 거죠. 나중에는 제가 하는 일이 작은 일이기는 하지만, 자랑스러웠어요. 높은 학력이나 전문적인 기술을 요구하는 일은 아니지만 마을의 입구에서 사람들을 맞이하고 환영해 주는 소중한 일이잖아요.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면서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친구들한테도 추천해주고 싶은 일이에요.”
내촌영업소는 서울 양양 간 새로 개통한 고속도로에서 첫 번째 만나는 톨게이트로, 내촌으로 들어가는 곳이다. 태희 씨가 근무하는 요금소 주변은 다 산과 밭이고, 뒤에는 개천도 있다. 일하다가 가끔 앞에 도로를 쳐다보고 있으면 큰 새가 날아다니고 고라니도 뛰어다닌다고 했다. 한 사람 한 사람 그곳을 지나는 이들을 반갑게 맞이해주는 일은 태희 씨가 그동안 해온 중요한 일 중 하나다.
태희 씨는 자신이 해온 일들을 ‘작은 일’이라고 표현한다. 이 표현에는 태희 씨의 소박함과 겸손함이 담겨있다. 농성장 공용 화장지걸이에 화장지가 떨어지는 걸 보자마자 채워 넣는 사람이 태희 씨다. 하지만, 태희 씨가 해온 일들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었다. 한국도로공사 영업소 업무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요금수납원이었고, 태희 씨가 수행한 업무들은 한국도로공사의 핵심 업무였다. 그 업무(특히 통행료와 미납금 받기 등의 영업 업무) 덕분에 한국도로공사 직원들은 그동안 많은 급여와 성과금을 받아왔다.
▲ 농성 중인 요금수납노동자들이 퍼포먼스로 만든 직접고용 [출처: <노동과 세계> 정종배]
|
수납원으로 일하면 늘상 있는 일?
요금수납 업무를 하면서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갑질과 성희롱을 하는 고객도 있었고, 회사 측의 부당한 행태도 있었다.
“‘죄송합니다. 처리해드리겠습니다’ 말을 하면 더 ‘그렇지. 니가 잘못했지’ 하면서 마음 놓고 더 많이 화를 내세요. 나이가 어리다고 화를 많이 내시는 경우도 많고요. 어떤 때는 ‘아가씨 오빠 보고 싶었어?’라거나 야간에 일하고 있으면 나이 많은 남자들이 ‘안 외로워? 내가 놀아줄까?’ 이런 식으로 말 하는 게 나이가 어려서 막말을 하는 거 같아 불편하고 싫었어요. 그럴 때는 딱히 대처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대꾸하지 않고 ‘안녕히 가세요’ 하고 고개를 돌려요. 대답을 안 하고 쳐다보지 않으면 안가고 기다리는 경우도 있고요.”
사무실에 말해봤자 소용이 없기 때문에 그저 참고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여성 수납노동자들은 ‘수납원으로 일하면 누구나 그 정도는 늘상 있는 일이다’ 생각하며 ‘똥 밟았다’하고 넘길 때가 많았다.
처음 일했던 영업소는 차량이 많은 곳이라 미납 받는 걸 중요시해서 스트레스가 있었다.
“교대를 할 때 제가 받은 미납 적어놓은걸 보고 ‘미납 많이 받았네? 좋겠네? 몇 등 하겠네?’ 얘기하시는 게 굉장히 부담스럽더라고요. 동료 언니들이 본인도 모르게 그 말을 하시는 거지만 말예요.”
등수가 떨어지면 사장에게 불려가서 면담을 해야 하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미납 받기 일등을 하면 상금으로 10만원을 받는데, 그것도 눈치가 보여서 “협조해주신 사장님, 고맙습니다. 팀장님, 고맙습니다” 하면서 과자라도 사서 돌려야 했다.
친구들한테 한국도로공사에서 일한다고 했어요
태희 씨는 한국도로공사와 계약을 맺은 용역업체 소속이었다. 2년 6개월 근무하는 동안 용역업체가 3번 바뀌었다. 그 용역업체는 월급을 통장에 넣어주거나 노동자들에게 갑질 하는 것 말고는 하는 일이 없었다. 태희 씨가 쓰는 컴퓨터와 기계 등 모든 물품에는 ‘한국도로공사’ 표기돼 있었다. 태희 씨가 입사한 2017년에는 ‘근로자지위확인소송’과 관련해 불법파견 증거를 없애기 위해 도로공사 소속 관리자들이 영업소에 상주하지는 않았지만, 직접적인 업무지시와 심사·결재는 계속됐다.
“도로공사 분들이 용역업체 사장님(도로공사 명예퇴직자)한테 ‘선배님, 선배님’ 하더라고요. 도로공사 직원들이 주기적으로 와서 검사하고 확인하고 시킬 거 있으면 시키고 했어요. ‘뭘 봐야겠다. 뭘 가져와라’ 하면 저희가 가서 해달라는 거 해드리고 했어요. 사인도 하고요. 도로공사 차가 수시로 와요. 저는 친구들한테도 ‘나 한국도로공사에서 일해’ 이렇게 말했어요.”
‘비정규직이 뭐지? 알바를 말하는 건가?’ 생각할 때였다. 세상살이가 참 쉽지 않다고 생각하며 비정규직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 계기는 해고통보였다. 태희 씨는 2년 6개월 간 일하면서 4~5번 계약서를 썼다. 요금수납노동자들은 매년 연말과 업체가 바뀔 때 계약서를 새로 써야했다.
“연말에 해고통지서 같은 게 날아 왔어요. 일 계속 시켜주겠다고 했는데, 왜 해고를 하나 했어요. ‘특별한 일 없는 이상 사장님한테 밉보이지 않는 이상 해주실 거야’ 언니들이 말씀하시는데, 되게 걱정되고 불안했어요.”
재계약 하기 전에 사장이 한 사람 씩 불러서 면담을 하는 것도 많이 불안했다. 혹시나 면담 내용 때문에 재계약이 안 되면 어쩌나 싶어서였다. 다행히 태희 씨는 재계약이 됐지만, 다른 요금수납노동자가 사장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재계약이 되지 않았다.
“제가 자리를 뺏은 거 같아 마음이 안 좋았어요. 얼굴 보기도 미안하고.”
그 뒤로 태희 씨는 재계약 할 때가 되면 고용불안에 시달렸다. 지난 해 가을, 한참 한국도로공사가 자회사로 가라며 협박을 하고 다닐 때, 태희 씨는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래서 함께 일하던 언니들과 함께 노동조합에 가입했다.
당연한 걸 주장해도 호락호락하지 않구나
“도로공사에서 자회사를 가든지 직접고용을 선택하든지 하라고 하셨거든요. 물론, 자회사를 선택하라고 협박하고 회유를 많이 했어요. 자회사 선택하면 수납업무를 계속 하게 해주고, 직접고용을 선택하면 다른 일을 하게 해줄 거라고 했어요. ‘다른 일 하는 것도 나는 좋지. 일은 준다고 했으니까.’ 이렇게 생각하면서 해고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랬는데 진짜 해고가 된 거예요.”
하지만, 자회사를 강요하는 도로공사의 협박이 두렵거나 걱정되지는 않았다. 입사할 때부터 수납원이 도로공사 정직원인 것 같다는 생각을 계속 해왔기 때문이다.
“용역이니 파견근로니 이런 말이 뭔지는 잘 몰랐지만, 제가 하는 일을 도로공사가 다 지시했기 때문에 직접고용이 맞는 것 같아 직접고용을 선택했어요.”
태희 씨는 다른 노동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젊은 편이어서 그런지 직접고용 됐을 때 다른 일을 할 수 있다는 협박이 별로 두렵지 않았다고 했다. 새로운 일을 해보는 게 신선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일 할 때는 도로공사가 일 시켜주고 월급 주는 참 좋은 회사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해고당하고 교섭을 하자고 해도 안 나오고 아무 대책도 안 세워줬어요. ‘세상 사는 게 진짜 이런 거구나. 정말 당연한 것을 주장하는 데도 이렇게 호락호락하지 않구나’라고 많이 느껴요. 다른 알바를 해도 또 언제 잘릴지 모르고. 알바는 처우가 더 안 좋잖아요.”
해고가 된 이후 실업급여로 생활하고 있는 태희 씨는 나이와 근무기간 때문에 실업급여를 3개월 밖에 받지 못한다. 동생들의 생활도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라 10월부터는 아르바이트를 해가면서 투쟁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월급을 많이 달라는 것도 아니고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이라도 안정적으로 일하고 싶다는 거잖아요. 번지르르한 일 아니어도 되니까 안정적으로 일하고 싶어요. 당장 생활이 불안한데 직장이 불안해지면 제 생활 가족 모든 게 다 흔들리니까 항상 위험해요.”
자신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태희 씨는 직접고용 투쟁을 하면서 다른 투쟁사업장에 연대를 가거나 연대를 하러오는 이들을 보면서 억압받고 소외된 사람이 많다는 걸 알게 됐다고 했다.
“서울 강남역 철탑 위에 올라가 계신 분(삼성 해고자 김용희 씨)을 뵀는데, 숨이 콱 막히더라고요. 진짜 죽을 각오하고 올라가신 거나 다름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삼성의 좋은 이미지 이면에 이런 모습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많이 놀라기도 했고, 힘없는 노동자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투쟁을 시작하고 나서 특히 이곳 도로공사 본사에 와서 본 경찰들의 모습도 큰 충격이었다.
“경찰은 멋지고 고마운 분들이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여기 와서 ‘사람이 깔렸어요’ 외쳐도 계속 미는 거예요. 방패 없이 밀면 허리가 수그러들면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그냥 깔려버려요.”
도로공사 직원들이 경찰과 팔짱을 끼고 있는 사진을 보면서 경찰이 노동자들의 안전을 지키러 온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몸싸움이 벌어질 때는 무섭기도 하고 자신과 안 맞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 적응하기 힘들다고 느껴질 때가 있기도 했다. 태희 씨는 9월 11일 경찰이 본사에서 농성 중인 노동자들을 강제 진압한다고 했을 때도 굉장히 긴장했다.
“신발 소리만 들어도 무섭고, 방패 드는 소리만 들어도 너무 무섭고. 진짜 바들바들 떨었던 거 같아요. 언니들이 끌려 나가지 않으려고 경찰이랑 도로공사 직원들이 접촉을 못하게 하려고 절규하면서 상의를 벗으셨어요. 너무 안타깝고 마음 아파요. 자신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밖에 할 수 없게 된 그런 상황. 저는 그렇게 할 수 없어서 많이 미안하고…. 다 저희 어머니 같은 분들이신데, 남 같지 않기 때문에 더 마음이 찢어져요. 내 옆에 계시는 어머니 같은 분들을 내가 지켜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솔직히 다시는 그런 거는 안 했으면 좋겠어요.”
태희 씨는 그렇게 했는데도 꿈쩍 안 하는 경찰을 보면서 너무 속상했다고 했다. 하지만, 앞으로는 겁을 먹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연행이 되지 말아야겠지만, 만약 강제로 끌려 나가 연행이 된다면 그냥 조사 잘 받고 나오면 되는 거잖아요.”
직접고용 되면 아버지께 선물을 해드리고 싶어요
태희 씨는 1500명 직접고용 요구를 수용하지 않고 교섭조차 거부하고 있는 한국도로공사를 보면서 한 번 만나 얘기를 들어주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지 의문이 든다고 했다.
“대법원에서 정규직 판결도 났는데, 1500명 직접고용 해달라는 게 이렇게 싸우면서 해야 할 일인가 싶어요. 여기 도로공사 직원들이 우리가 직접고용 되는 걸 싫어하는 것 같아요. 이익을 같이 나누는 게 싫은 거겠죠.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기도 하는데요. 각자의 자리에서 같이 사이좋게 일하면 좋겠어요. 저는 도로공사 입장에 별로 신경 안 써요. 여태까지 힘들었고 어려웠지만, 될 거라고 믿거든요. ‘시간이 좀 걸리네. 꼭 집으로 돌아가야지.’ 그 생각만 해요. 너무 되고 안 되고 하는 걸 신경 쓰다 보면 기운 빠질 거 같으니까.”
태희 씨는 투쟁하면서 지금처럼 힘든 때가 없었다고 했다. 그 전에 3박 4일 씩 투쟁할 때는 집에 한 번 씩 갈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가족들이 많이 보고 싶기도 하고, 스트레스를 풀 수가 없어서요. 집에서는 피아노 치고 놀면서 스트레스를 풀었는데, 지금은 전혀 그런 걸 못하니까요. 정신적으로 스트레스가 쌓여서 힘든 거 같아요. 공동생활이란 게 힘든 거잖아요.”
이곳에서는 휴식시간에 영화를 보거나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푼다. 가족들과의 통화도 위로가 된다. 가족들은 태희 씨가 하는 투쟁이 옳은 것이라 믿고 걱정과 함께 응원을 해주고 있다.
“엄마는 본인이 이렇게 만든 거 같다고 미안하다고 하세요.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서 제가 공부하고 싶은 걸 지원을 많이 못해주고 당장 돈도 벌어야 되고 해서 일을 하게 된 건데, 그 일을 하다가 해고가 됐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셨나 봐요.”
태희 씨는 엄마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엄마의 사랑과 걱정이 느껴져 감동받았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직접고용이 되면 요금수납 업무를 계속하고 싶은지와 앞으로의 각오를 물었다.
“어떤 분들은 너는 나이가 어리니 앞으로 인생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굳이 이 일을 안 할 수도 있지 않겠냐고 하세요. 그것도 맞는 말인데, 저는 끝까지 평생직장으로 다니고 싶어요. 직접고용이 돼서 생활이 안정 되면 가족들을 더 많이 도와주고 싶어요. 각오요? 직접고용 되면 저희 아버지께 해드리고 싶은 선물이 하나 있어요. 아버지께 선물을 해드리는 그 약속을 지키는 좋은 생각을 하면서 투쟁하고 있어요. 그게 저의 작은 각오에요.”
[워커스 5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