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미국의 래퍼 랩소디가 세 번째 정규 앨범 ‘이브’를 발표했다. 평론가들의 극찬을 받고 있는 이 여성 래퍼의 작품은 여러 모로 흥미롭다. 랩소디 스스로 “모든 흑인 여성에게 보내는 러브레터”라고 소개한 앨범의 모든 수록곡에는 이집트의 파라오 하트셉수트와 영부인 미셸 오바마 등 흑인 여성들의 이름이 붙었다. 가사와 뮤직비디오에서 보이는 블랙팬서 당에 대한 오마주와 의상에 부착한 앤절라 데이비스의 배지처럼 급진적 흑인 운동의 역사를 존중하는 모습 또한 특징적이다. 이런 주제들은 단순하기보다는 단호하고 선동적이기보다는 진지한 사유를 촉구하는 의식 있는 가사와 합쳐져 깊은 울림을 준다.
앨범에서 랩소디가 한 차례 슬쩍 언급하는 인물도 그에게 꽤나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흑인 여성 작가 로레인 핸스베리다. 그는 수록곡에 이름이 붙은 가수 니나 시몬의 친구였고, 뮤직비디오에서 달고 나온 배지에 얼굴이 실린 배우 필리서 러샤드의 대표 작품을 쓴 인물이다. 사실 전작에서도 랩소디는 시몬이 핸스베리에게 헌정한 곡을 샘플링한 바 있었다. 핸스베리는 흔히 ‘태양 아래의 건포도(A Raisin in the Sun)’라는 연극을 쓴 작가로만 알려져 있지만 사실 자유와 평등을 위한 투쟁들에 앞장섰던 운동가이기도 했다. 시민권 운동가, 흑인 민족주의자, 범아프리카주의자, 공산주의자, 평화주의자, 페미니스트, 동성애자 권리 옹호자 등 그를 묘사하는 다양한 수식어들은 그가 짧은 생애 속에서 얼마나 열정적으로 활동해 왔는지를 잘 보여준다.
핸스베리는 1930년 시카고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동산 중개업 등으로 재산을 모은 그의 아버지는 1938년 가족과 함께 흑인에게 주택 판매를 제한하는 규칙이 있던 백인 거주 지역으로 이사했다. 백인 이웃들의 위협 등 문제가 발생하자 아버지 칼은 사건을 법정으로 가져갔고, 결국 대법원이 핸스베리 가족의 주거권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이 사건은 당대의 중요 시민권 소송 사건으로 널리 알려졌고 이 경험은 훗날 핸스베리의 작품에도 반영됐다.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NAACP)나 전국도시연맹(NUL)같은 시민권 운동 단체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아버지 덕분에 핸스베리의 집에는 재즈 음악가 듀크 엘링턴이나 시인 랭스턴 휴스 같은 흑인 명사들도 드나들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 그의 오빠는 인종 격리 관습을 유지하는 미군에 자신을 징집하는 것은 위법하다며 국가에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런 환경에서 자라난 핸스베리가 사회운동에 빠져든 것은 자연스런 수순이었다. 위스콘신대학에 입학한 그는 1948년 진보당 대선 후보 헨리 월리스의 선거 운동에 가담했다. 부통령과 상무부 장관을 지낸 월리스는 냉전을 심화시키는 트루먼 정부의 대외정책에 반대해 민주당을 탈당했고 진보적인 흑인들의 지지를 얻고 있었다. 핸스베리가 공산주의자들에게 공감하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이었고, 그가 사망할 때까지 계속된 연방수사국(FBI)의 감시 역시 같은 시기에 시작됐다.
그는 1950년 대학을 떠나 뉴욕 할렘으로 향했고 막 생겨난 흑인 신문 ‘프리덤’에 입사했다. 신문의 발행인은 유명 가수이자 배우로 미국의 한국 전쟁 개입에 반대해 출국을 금지당한 폴 로브슨이었고, 곧 반역죄로 미국 정부와 다투게 될 노학자 두보이스를 비롯한 흑인 공산주의자들이 신문에 글을 실었다. 당시 미국에서 가장 비난받던 흑인들이 세계의 피억압 민중을 대변한 신문사에서 핸스베리는 잡무 처리부터 편집자까지 다양한 역할을 담당했고, 한국전쟁 반대, 흑인 징병 거부자 옹호, 핵무기 반대와 같은 인기 없는 주장들을 펼치며 반제국주의적 언론인으로서의 역량을 키워 나갔다. 1952년 그는 출국을 금지당한 로브슨을 대신해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서 열린 대륙 간 평화회의에 참석해 미국 정부의 눈 밖에 났고, 귀국 후 로브슨과 마찬가지로 여권을 취소당했다. 이듬해에는 소련에 핵무기 정보를 넘긴 혐의로 사형당한 로젠버그 부부의 구명운동에 나섰다. 이때까지도 20대 중반에 불과했던 그는 곧 사라질 미국의 사회주의적이고 국제주의적인 흑인 운동이 배출한 마지막 인물이었다.
신문사는 1955년 재정난으로 문을 닫았지만 핸스베리에게는 신문 편집을 능가하는 재능이 있었다. 본격적으로 집필 활동에 나선 그는 몇 편의 단편을 발표한 후 대표작 ‘태양 아래의 건포도’를 완성했다. 랭스턴 휴스의 시에서 제목을 따온 이 연극은 1959년 흑인 여성의 작품으로는 처음으로 브로드웨이 극장에서 공연됐다. 거의 대부분의 배우가 흑인이라는 점도 당시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 작품은 흥행과 비평 양측에서 성공을 거두며 핸스베리를 유명 작가의 반열에 올렸는데, 노동계급 흑인 가정의 문제와 미래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려던 원작자의 의도와 달리 흑인 가정의 계층 이동 욕구를 보여준 체제순응적인 작품으로 받아들여진 것도 성공에 한몫했다. 하지만 해석의 차이에도 이 작품이 깊은 사회적 의미를 담은 완성도 높은 작품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이 연극은 이후 영화, 뮤지컬 등으로 수차례 각색됐고, 배우이자 시민권 운동가로 유명한 시드니 프와티에부터 힙합계의 거물 션 컴스에 이르는 유명인사들이 이 작품을 거쳤다.
작품의 성공 이후 핸스베리는 계속 집필을 이어나갔고 여성운동과 동성애자 권리 운동에도 가담했다. 이는 남편과 별거 상태로 지내며 개인적인 자리에서는 자신이 동성애자라고 고백하기도 한 그의 개인사와도 관계가 있었다. 하지만 작가로서 성공한 후에도 그는 이전처럼 급진적인 운동에 거리낌 없이 가담했다. 1961년 막 독립한 콩고민주공화국의 총리 파트리스 루뭄바가 쿠데타로 처형되자 핸스베리와 동료 작가 마야 앤절루 등은 뉴욕의 유엔 건물 앞에서 미국 정부의 책임을 추궁하며 항의에 나섰다. 그는 미사일 위기 시기 미국의 쿠바 봉쇄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고,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SNCC)와 같은 시민권 운동 단체 후원에도 적극적이었다. 같은 시기 그는 식민주의와 아프리카 혁명을 다룬 ‘레 블랑’이나 아이티 혁명의 지도자 투생 루베르퇴르에 관한 작품을 써 나갔지만 불행히도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았다.
핸스베리는 1965년 췌장암으로 34세의 생을 마감했다. 장례식에서는 친구 니나 시몬이 노래를 불렀고 폴 로브슨이 조사를 읽었으며 얼마 후 암살당할 맬컴 엑스도 참석했다. 1970년에는 시몬이 핸스베리에게 헌정하는 ‘젊고 재능 있는 흑인이 되는 것(To Be Young, Gifted and Black)’을 발표했다. 이 곡은 곧 시민권 운동을 대표하는 노래가 됐다. 힙합에서도 랩소디뿐 아니라 라 디가, 루페 피아스코, 갱스타, 미시 엘리엇, 커먼 등 수많은 음악인들이 이 곡을 샘플링하거나 가사를 인용해 왔다. 오늘날까지 명곡으로 기억되는 이 곡의 제목은 원래 핸스베리가 흑인 작가들을 격려한 말에서 나왔다. “젊고 재능 있는 사람이 되는 건 흥분되고 환호할 일이겠지요. 하지만 젊고 재능 있는 흑인이 된다는 건 그보다 두 배는 역동적인 일입니다.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는 일을 보세요.”[워커스 5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