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인 것(the social)이란 무엇일까?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는 말이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모호하기 짝이 없는 말이기도 하다. 사회 운동(social movement)에서 사회와 사회 붕괴(social collapse)에서 사회는 과연 같은 말일까? 시민 사회(civil society)에서 사회와 한국 사회(Korean society)에서 사회는 같은 말일까? 잘 생각해보라. 어딘가 미묘하게 다른 느낌이 있을 것이다.
사회라는 말의 쓰임새는 다양하다. 개인성을 넘어서는 어떤 과정이나 형식이기도 하고, 정치나 경제와 구별되는 특정 영역이나 부문이기도 하다. 그뿐만 아니라 때에 따라서는 정치와 경제를 모두 아우르는 전체 사회라는 맥락을 가리키기도 한다. 심지어 사회성(sociability)이나 사교 클럽(social club)처럼 개인들의 친교적 성격을 뜻하는 경우까지 감안하면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
이 말을 짚고 넘어가야 하는 이유는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다. 2000년대 후반부터 마치 붐처럼 나타난 사회적인 것들 때문이다. 사회적 경제, 사회적 기업, 기업의 사회적 책임, 사회책임경영, 사회혁신채권, …. 경제와 행정 등 각종 제도에 ‘사회적’이라는 형용사가 붙기 시작했다. 반드시 사회라는 말이 들어가야 하는 것은 아니어서 유사 기표들도 돌아다녔다. 공정무역, 윤리적 소비, 마을만들기, 소셜 미디어, 생활문화와 생활예술, 관계미학, 공동체 재생 등등. 이런 식으로 우리의 제도와 습속 거의 모든 곳에 ‘사회적인’ 새로운 흐름들이 나타났다.
이 흐름을 한 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열거한 것처럼 사례들이 꽤 많고 부문별로 보더라도 다양한 사람과 집단이 얽혀 있기 때문이다. 이 영역을 두고 사회적 경제 ‘생태계’ 운운하는 것도 괜한 말은 아닌 셈이다. 노동과 일상 모두를 아우를 정도로 작지 않은 규모를 갖고 있고, 거기에 다양한 행위자들의 이해관계와 신념체계가 복잡하게 교차돼 있으니 말이다. 자연히 사회적인 것의 의미를 확정적으로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수밖에 없다. 단지 몇몇 용례들을 두고 이러저러한 유형들이 있다고 나눠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어 보인다.
실제로 이 장(場)에는 적어도 두 가지 이상의 힘이 충돌하고 있는 것 같다. 사회학자 김주환은 사회적 경제를 둘러싸고 규범적 맥락과 기능적 맥락이 병존한다는 묘사를 한 적이 있는데, 쉽게 말해 사회적인 것을 동시대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적 규범으로 삼으려는 힘과 이 힘을 전유하여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를 관리하는 기능으로 삼으려는 힘이 모순적으로 공존한다는 것이다. 민주당 계열에서 집권한 지역정부나 중앙정부에서 나타나는 사회적 자유주의 경향에 대해 성찰해본 사람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만한 이야기이다. 우리들 대다수는 시민사회의 참여를 위해 개방된 거버넌스 체계를 어떻게 해야 잘 활용할 수 있을지 고민하면서, 동시에 국가권력이나 시장권력의 종속적 파트너로 전락하지나 않을지 염려하곤 한다.
오늘 소개할 이가람의 박사학위논문 『한국 사회적경제에서 ‘사회적인 것(the social)’의 의미』는 여기서 전자의 ‘규범적 맥락’에서 사회적인 것을 의미화하고자 하는 시도로 이해될 수 있다. 주요 논점을 재구성해보면 이렇게 볼 수 있겠다.
1 그동안 사회적 경제 영역이 ‘정책의 동원대상이나 시장의 새로운 착취대상에 머무는 것’에 대한 우려가 있어 왔으나, 사회적 경제의 의제들이 아직 자리를 잡지 못했던 불안정한 시기였음을 감안할 필요가 있고, 그동안의 경험들이 축적됨으로써 서서히 독립성과 자율성이 발휘되고 있는 측면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2 사회적 경제 활동가들이 공통의 정체성을 고민하고 관련 입법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과정에서 발전주의나 경제중심주의에 대항하여 1)사회적 가치를 인식하고 2)시민성을 학습하여 3)궁극에는 사회권력을 강화하는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3 이때 이들이 의미하는 1)사회적 가치는 현대인의 삶에 핵심으로 작용하는 사회성과 연결성이며, 2)이에 대한 인식을 가로막는 제약조건들(예컨대 사회적인 것에 대한 반공주의적 감정 같은 것들)을 돌파함으로써, 3)자본주의 기업 활동의 경제적 가치와 구분되는 사회적 효용을 충분히 확산시킬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 경제에 관한 토론이 어느 정도 무르익은 모양이긴 한 것 같다. 2년 전 내가 박사학위논문을 냈을 때만 해도 사회적 경제를 비판하는 입장이 드물었는데, 불과 몇 년 사이에 나와 같은 비판적 입장조차 상대화하면서 사회적 경제의 의미를 재발굴하려는 연구물이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가람의 논문은 그런 점에서 즐거운 대화와도 같은 계기들이 곳곳에 코드화되어 있다. 저자의 연구 목적은 명확하다. 사회적 경제에서 지향하는 사회적인 것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파악하는 한편, 지배 관계의 도구가 되는 것을 그치고 호혜성을 바탕으로 사회의 힘을 강화하여 사회변화를 이끌어낼 잠재성이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가령 저자의 ‘일반화된 호혜관계’에 대한 관심은 매우 인상적이다. 보통 호혜적 관계라고 하면 대면적인 관계 상황을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저자는 현대의 사회적 경제에서 이러한 호혜성이 익명적 형식에서 이뤄진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자본주의 세계에서의 생산-소비-교환-분배의 경제 활동은 필연적으로 화폐 체계와 조우할 수밖에 없다. 주지하듯 우리는 화폐라는 매개를 통해 인격적 관계가 시장교환적 형식으로 물화되는 경험들을 한다. 하지만 여기서 저자는 경제활동 내에 사회적 가치들이 효과적으로 결합할 수만 있다면 (사회적 가치가 시장경제적으로 물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호혜적 관계가 대면적 관계를 넘어 비대면적 관계들 전체로 일반화될 수도 있는 가능성 또한 포함할 수 있음을 역설한다.
그동안 사회적 경제의 운명은 크게 반대되는 두 가지 입장들로 점쳐지곤 했다. 첫 번째 입장은 전체 경제 구조에 의해 사회적 경제가 애초의 의도와 달리 왜곡되거나 자본주의 경제의 압력으로부터 생존하기 위한 방편으로 스스로 주변적 영역에 머물 것이라는 전망이다. 두 번째 입장은 이 모든 우려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경제는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과 신념이 있는 이상 어떻게든 존속하여 우리의 삶을 바꿔낼 것이라는 전망이다. 그런 점에서 이가람의 논의는 사회적 경제를 전유하는 그 어떤 힘에도 불구하고 결코 상쇄될 수 없는 합리적 핵심이 존재한다는 두 번째 입장의 ‘보다 세련된 진전’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여기서 더 심화된 토론 또한 가능할 것 같다. 일례로 저자가 의도했던 연구 목적으로서 사회적 경제가 통치적 합리성으로부터 자율성을 가진다는 논점은 여전히 해명이 부족한 느낌이다. 사회적 경제 분야의 시민사회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함으로써 적어도 그들의 내면세계와 활동 양식이 식민화되지 않았음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이곳의 성격을 규정하는 거버넌스와 다양한 참여자들 그리고 그들의 관계들로부터 ‘비의도적으로’ 생성되는 정치적 합리성 문제에 대한 논박이라고 볼 수 있는지는 쟁론의 여지가 남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또 다른 연구목적으로서 사회적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다시금 안개가 짙어진 상황이 된다. 사회적 가치가 활동가들에 의해 어떻게 집합적으로 상상되고 구현되는지를 살피고자 했지만 종국에는 사회성과 연결성 그리고 시민성을 비롯한 비자본주의적 속성이라는, 어쩌면 우리들 대다수가 이미 알고 있던 사실로 회귀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미 몇몇 연구들에서 보고된 바 있는 자유와 창의라는 ‘혁신성’ 그리고 협력과 연대라는 ‘사회성’ 사이의 긴장이 초래하는 사회적 가치의 변형이라는 문제는 상대적으로 탈쟁론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럼에도 이가람의 논의는 그동안 사회적 경제에 대한 비판적 접근들이 초래했던 오해들, 예컨대 이곳에서의 비자본주의적 가치와 실천들이 주류 경제에 의해 전유되거나 식민화될 수 있다는 쟁점에 대해서는 충분한 논박을 제공하고 있다. 적어도 사회적 경제 영역이 비용-편익 논리로 채워진다든가 하는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는 게 확실히 판명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는 과제는 실제로 사회적 경제가 자본주의 경제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하는 문제가 되는 것 같다. 사회적 경제가 결코 죽지 않는다는 사실이 명확해지는 동안, 자본주의 경제와 어떻게 조우하고 어떤 그림을 그려내는지는 여전히 토론이 부족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