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윤(문화사회연구소 소장)
곧 있으면 지방선거다. 별 이변이 없는 한 박원순 시장의 재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말인즉슨 박원순 시장이 추진했던 실험이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남들은 이명박-오세훈처럼 스펙터클한 게 없다고 폄하하는 듯하지만, 그의 지난 8년 시정의 키워드를 꼽자면 ‘사회혁신’이 아닐까 싶다. 그가 서울이라는 실험실에서 소프트웨어적인 어떤 것을 바꿔내려 했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김은지의 석사학위논문 「‘혁신적 시민성’의 의미형성과 제도화」에 따르면, 이 실험의 의미는 ‘시민 만들기’가 아닌가 싶다. 그렇다. 나는 지금 의도적으로 박원순 시정의 ‘시민 만들기’를 박정희 시대의 ‘국민 만들기’(또는 운동 진영의 ‘민중 만들기’)에 비유하고 있다. 이런 비교는 2013년 박주형의 논문 「도구화되는 ‘공동체’」《( 공간과 사회》)에서도 시도됐던 바 있다. 요는 이렇다. 1970년대 국가 단위 프로젝트와 2010년대 서울 단위 프로젝트 사이에 형식적으로 놀라울 정도의 상동성이 있다는 뜻이다. 맥락조차 비슷하지 않은가. 성장 위기의 시대를 맞아 상부구조의 차원, 즉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그들 개인의 의식 차원에서 혁명적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 김은지는 2000년대 시민운동의 위기 담론, 희망제작소와 서울혁신파크의 프로그램, 프로그램 참여자 인터뷰 등을 구조화함으로써, 박원순 시대의 시민 만들기 프로젝트의 실체와 효과를 분석하고 있다. 이 달의 세 줄 요약이다.
1. 1990년대식 시민운동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국정 및 시정에 시민들의 참여를 진작하고 미시적인 ‘생활정치’의 가능성을 도모한다.
2. ‘사회혁신’이라는 이 새로운 운동은 그에 알맞은 시민들을 형성하기 마련인데 여기서는 시민들의 자발성 사회성 창의성 같은 덕목들이 중요해진다.
3. 단 이러한 참여와 혁신이 순조로운 것만은 아니다. 실제 프로그램 참여자들은 생계 압박을 스스로 해결해야 하고 실제와 상관없이 정치적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녀야 하며 행정과 시민사회의 열악한 여건에서 번민에 빠지기도 한다.
박원순-문재인 시대 시민개조의 기조는 혁신·자조·협동으로 축약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노동과 생활의 윤리가 과거와 달라졌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근면에서 혁신으로. 오늘날 우리는 사회를 혁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을을 만들어야 하고 도시를 재생해야 하며, 창업(스타트업)을 할 때에는 사회적 가치가 무엇인지를 물어야 한다. 소셜, 관계, 네트워크, 친밀성, 상호부조, 돌봄, 나눔, 도움, 우리, 함께, 사람, 메이커 등등이 이 바닥에 떠돌아다니는 태그들이다.
김은지의 질문은 이렇다. 사회혁신과 혁신적 시민성이 사회운동 및 정치적 주체성에 어떤 효과를 가져올까. 이 운동을 원점부터 고찰하는 것이 중요해진다. 그에 따르면, 2000년대 들어 일군의 시민운동은 기존 운동의 경직성에 문제를 제기했다. 그리고 시류에 적응할 것을 주문했다. 회원을 확충하려면 생활밀착형 의제를 발굴해야 한다. 국가를 상대하려면? 경우에 따라선 협력하는 듯하면서 관료들을 이용해야 한다. 대기업을 견제하려면? 소액주주운동을 해야 한다. … 결국, “이들이 표방한 새로운 시민운동은 민중운동과의 간극을 좁히기보다는 오히려 이와의 구별 짓기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박원순이란 인물이 그 정점에 있음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박원순은 영국 체류 경험을 바탕으로 시민사회운동의 유연성과 탄력성이라는 아이디어를 갈구했다. 조직도 구성원도 새로워져야 한다. 게다가 시장 당선 직전만 하더라도 신자유주의의 본격화 등등으로 인해 한국사회의 정서구조에서 ‘협동’ 정신이 고갈되고 있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조직도 구성원도 대안적이어야 한다. 즉, 한편에서는 시민사회운동의 쇄신, 다른 한편에서는 대안적 가치의 실현이라는 맥락이 이중적으로 필요했다.
사회혁신과 시민만들기에 대한 급진적 전유
어쩌면 김은지가 이름 붙인 ‘혁신적 시민성’이란 역사적으로 모순적인 것들이 응축된 결과물일지 모른다. 혁신적 시민성의 하위 범주들을 살펴보자. 그가 말한 ‘자발적 시민성’은 전형적인 신자유주의적 자기-책임 윤리를, ‘사회적 시민성’은 파괴되었다고 가정되는 과거 시대의 협동 정신을, ‘창의적 시민성’은 저성장·뉴노멀 시대의 혁신적 아이디어와 프로그램을 각각 가리킨다. 정작 새로울 것은 없는데도 모든 것이 새롭지 않은가. 결과적으로 박원순 시대에 강조되는 시민성은 전적으로 새로운 것만은 아니지만, 이미 있던 것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조합함으로써 특정한 사회적 효과를 노린다.
이어지는 관심은 크게 두 가지일 것이다. 하나는 ‘그’ 사회적 효과가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느냐는 것. 그러나 김은지의 인터뷰 결과에서는 그 전망이 순조롭지만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숱한 기획자·활동가들이 사회혁신 프로그램에 참여할 때 경험하게 되는 모순, 즉 행정의 권위주의적 관행이나 시민사회의 취약한 공동체성 같은 문제가 발목을 잡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사는 게 팍팍하지만 ‘자조’적으로 극복해야 하고, 자기는 사회활동을 한다고 여기는데 남들은 정치운동을 한다고 하니 운신의 폭도 자유롭지 못할 때가 많다.
두 번째 초점은 이런 난관들을 극복할 경우 진짜로 세상이 좋아지겠냐는 것이다. 이 점에서 사회혁신 담론이 “기존의 사회 운동이 담지한 ‘민주주의’와 ‘정치’의 가능성을 주변화하면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은 결정적 약점이 된다. 이를테면 누가 봐도 명확할 정도로 중간계급·유한계급에 편향적인 사회혁신으로 부터 사회적 배제를 극복할 단초를 찾을 수 있을까. 그의 말마따나 국가·자본에 대한 시민사회적 적대를 협력으로 순화하려는 노력만 보일 뿐인데 말이다. 실제로 휴머니즘적 연대를 말하는 사람은 있어도 계급 적대를 말하는 사람은 찾기 힘들다.
다만, 김은지는 일군의 사람들이 지금의 상황을 “보다 급진적 으로 전유하면서 권력의 불평등에 직접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음을 상기하면서 섣부른 결론을 경계한다. 박원순의 시민 만들기가 신자유주의적인 시민 참여 모델에 속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시민들한테 있는 그대로 적용되지는 않을 것이란 이야기인 셈이다. 사회혁신과 시민 만들기에 대한 급진적 전유는 가능할까. 물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혁신적 시민 만들기 프로젝트로 인해 시민들의 참여 기회와 폭이 그만큼 넓어졌다는 사실일 것이다. 시민들은 더 많은 것을 요구할 기회를 얻은 셈인데, 주어진 역사 속에서 앞으로 어떤 시민들이 어떤 요구를 하게 될지는 더 지켜봐야 할 문제인 듯싶다.[워커스 4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