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윤(문화사회연구소)
메이커 문화라는 게 있다.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지만 나이키, 아디다스 같은 메이커가 아니다. 말 그대로 ‘만드는 것’, 즉 손기술에 기반해 무언가를 ‘제조’하는 문화라고 보면 되겠다. 잘 모르는 사람은 이걸 굳이 영어로 표현하고 거기에 문화라는 말까지 붙인다는 게 의아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영역을 깔보다간 자칫 곤란할 수 있다. 이 분야에 몸 담그는 사람들에 의하면, “메이커 운동은 세상을 바꿔놓을 ‘근본적인 변화’이며 ‘해방’의 운동”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메이커 문화의 사회적 구성」의 저자 최혁규는 여기에 질문을 던진다. ‘정말 그럴까? 그렇게 호락호락하기만 할까?’ 저자의 질문은 지극히 상식적인 호기심으로부터 출발한다. 요즘 같은 탈산업 시대에 제조업 기술이라니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일까. 어불성설 같은 느낌이 들 수밖에 없다.
대개의 좋은 연구들이 그렇듯 이 논문 역시 일종의 추리소설 같은 구석이 있다. 처음엔 소박한 궁금증으로 사건을 둘러보다가 문득 의미심장한 징후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메이커 문화로 도탄에 빠진 세상을 구원한다는 것. 어딘지 과잉된 이 느낌을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까. 이 달의 세 줄 요약이다.
1. 메이커 운동은 DIY를 가능케 하는 디지털 기술 혁신을 생산수단의 민주화를 위한 중요한 조건으로 간주하고, 이제는 모두가 창조적 생산자가 될 수 있는 시대가 왔다고 선언한다.
2.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최근 확산되는 메이커 문화 담론은 메이커 운동이 신자유주의의 실패로 인한 삶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단초가 될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적 약속을 제시하기까지 한다.
3. 모두가 메이커가 되는 세상이라는 착상은 오늘날의 시민이 제작하는 주체가 된다는 그림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데, 다만 실제 메이커들은 이와 같은 주체화 및 순치 과정에 대해 비판적 긴장을 유지하면서 자신들의 장(場)을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시키고 있다.
먼저 메이커 운동의 순수성이란 것에 대해 생각해보자. 사실 오늘날 ‘메이커’라는 영어 이름으로 불리는 이들을 쉽게 이해하자면 ‘장인’ 내지는 ‘기술 덕후’라고 보아도 무방할지 모른다. 탱크도 만든다는 세운상가의 오래된 장인에서부터, 차고지에서 제 손으로 뭔가 뚝딱뚝딱 거리는 재주꾼에 이르기까지 그 형상은 다양하다(물론 우리나라에선 차고지가 거의 없으니 ‘메이커 스페이스’ 같은 공유공간을 이용한다).
어쩌면 여기에는 초기 산업화 시대에 대한 약간의 향수 같은 게 숨어 있는 것일지 모른다. 적어도 그 시절만 하더라도 어지간한 사람들은 ‘손재주’라는 걸 가지고 있었다. DIY 운운하는 요즘이긴 하지만 대량생산 대량소비 체제가 본격화하기 이전에는 그런 말이 없더라도 기술적 자급자족이 어느 정도 이뤄지던 시절로 상상이 되곤 한다. 장인이라 불리기 부끄러울지언정 초가지붕을 직접 만들어 얹고 나무 깎아 팽이 만들고 장기알 만들던 잔기술들은 (적어도 남성 가부장들을 중심으로는) 지극히 보편적인 것으로 회고된다.
몇몇 예술가들은 손기술과 생활예술이 결합돼 있던 그 시절의 리터러시가 사라진 사실을 안타까워한다. 이것은 논문의 인터뷰 조사에 응한 메이커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반응이기도 한데, 메이커 운동의 가장 중요한 문제의식이 어쩌면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출발한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손기술을 중심으로 하는 생활예술이라는 표현 및 행위는 (지금보다는) 기술과 예술에 대한 감각이 민주적으로 분배돼 있는 상태를 연상시킨다. 사람들은 누구나 그와 같은 역량을 가지고 있었고, 그로 인해 즐거움 또한 누릴 수 있었다. 요컨대, 예술+기술적 감각의 민주화, 문화적 역량의 강화, 건강한 즐거움 같은 것들이 키워드가 된다.
다만, 저자는 메이커 운동의 이러한 순수성이 있는 그대로 실현되기 힘들 수 있음에 주목한다. 특히나 요즘 같이 4차산업혁명이 운운되는 기술적·정치경제학적 정세는 일종의 기회구조 같은 것을 개방하고 있는 셈인데, 이것이 사실 상황을 복잡하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
크게 세 가지 정도가 중요한 상황인 것 같다. 첫째, ‘디지털’ 기술로 인해 과거의 전통적인 제조업 기술과는 다른 환경이 만들어진다. 둘째, 이로써 집에서 혼자 생활기술·생활예술 하던 것과 달리 네트워킹을 통해 서로의 기술을 ‘공유’하는 온오프라인의 장이 확대된다. 셋째, 따라서 기술적 윤리라고 할까, 과거에 강조되던 근면 같은 것보다는 ‘혁신·창의’ 같은 가치들이 더욱 중요하게 작동하게 된다(여기에 개인적인 의견을 덧붙인다면, 전통적 제조업의 남성중심성을 넘어서는 측면도 보인다).
우리는 기술 소외 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잃어버린 생활기술 감각을 회복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해서 피폐해진 삶에 문화적 풍요를 가져올 수 있을까. 문제는 이것이 메이커 운동에만 기회구조인 게 아니라 그 반대편에 있(다고 가정되)는 지배질서에도 마찬가지의 기회구조라는 점에 있다. 신성장동력, 4차산업혁명 같은 말들이 줄기차게 제창되는 것은 역설적으로 현행하는 체계에서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어렵다는 뜻과도 통한다. 그런데 여기서 창의적인 디지털 기술을 공유해서 혁신을 달성할 수 있다면? 이런 식으로 메이커 문화는 신성장동력의 주축이 되고 4차산업혁명의 일부가 된다. 자생적인 메이커 운동이 기술창업 운동, 메이커 교육 등으로 전화되는 것도 우연만은 아닌 셈이다. 운동과 체계 사이의 이해관계가 상충하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운동의 동력과 의제가 체계 안으로 녹아들어가는 요즘이지 않은가 싶다(민주당이 잡은 중앙정부와 지역정부는 이런 흐름을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저자는 이런 곤란을 메이커 ‘문화’라는 구성체 또는 장에서 포착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단순히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식의 곤란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16명의 참여자들과 함께한 인터뷰 내용은 메이커 문화라는 용해물질이 결코 균질적이지는 않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제작문화를 손재주나 기술놀이 정도로 소박하게 여기는 이들에게 정부의 체계적 지원이 야기하는 이러저러한 불편함들은 오히려 메이커 운동을 새롭게 정체화하려는 동기를 만들어내기도 하기 때문이다.
메이커 운동이 성공하거나 메이커 문화가 진짜로 보편화된다면 모두의 기대대로 우리의 일상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재편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추세를 본다면, 이 ‘문화’는 특정 개인, 특정 집단, 특정한 힘에 의해 일방적으로 구성될 것 같지는 않다. 그런 점에서 저자 최혁규의 최종 진단은 우리들의 문제의식을 명확히 해주는 면이 있다. 요컨대, 우리는 지금 새로운 문제를 만들고 있다는 것. 정확히 말해, 불안으로부터 멀어지는 삶이라기보다는, 다른 종류의 불안이 다가오고 있는 점이다.[워커스 4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