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말] <워커스> 새 꼭지, 김성윤 문화사회연구소 소장의 ‘세 줄 요약’이 청년연구자들의 시각을 조명합니다.
김성윤(문화사회연구소 소장)
오늘날 20대는 다문화주의 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이기도 하다. 다문화주의 논리는 교과과정 전반에 뿌리를 내렸다. 이제는 더 이상 ‘우리는 한겨레다. 단군의 자손이다’ 같은 노래를 부르는 일은 없다. 문화상대주의 시대에 문화 간 차이를 무시하고 자민족중심주의를 표방하는 교과과정이 들어설 자리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2017년 3월 <주간 조선>의 보도에 의하면, 반(反)다문화 정서는 이들 20대에게서 가장 강하게 나타난다고 한다. 놀라운 일이 아닌가. 다문화주의 교육을 받은 세대가 가장 반다문화적이라니. 해외여행, 어학연수, 조기유학, 교환학생, 외국인유학생 등등, 그 누구보다 글로벌한 세대에게서 반다문화 성향이 관찰된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반인종주의와 세계시민주의가 보편타당한 윤리적 규범으로 자리 잡은 세상에서 반다문화주의를 내세우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일까. 그런데 이들은 놀랍게도 자신이 인종주의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이 불가능한 미션을 가능한 미션으로 바꾸고 있다. 요컨대 외국인을 혐오하거나 차별하지는 않지만 다문화주의에는 반대한다는 주장이다. 어불성설처럼 보이는가. 그러나 이들의 논리적 세계에서는 이 역설이 전혀 모순적이지 않게 된다.
우리는 이들의 정서와 논리를 실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오늘 소개할 전의령의 논문 「인터넷 반다문화 담론의 우익 포퓰리즘과 배제의 정치」는 반다문화를 표방하는 인터넷 커뮤니티를 조사한 결과를 토대로 다음과 같은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1. 반다문화주의자들은 이주노동자의 유입이 ‘서민경제’를 위협하며 다문화정책이 ‘국민혈세’를 낭비하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2. 이들은 다문화주의를 내세워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정치적·경제적 ‘엘리트’와 이에 편승해서 ‘무임승차’하는 이주민을 문제시하고 스스로를 진짜 애국주의자로 여긴다.
3. 동시에 이들은 인종주의의 낙인을 거부함으로써 정치에 관한 주류적 상상력을 딜레마에 빠뜨리고 있다.
이들의 논리에서 인종주의를 발견할 수 있겠는가. 마냥 쉬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적어도 피부색이나 유전자 차이를 빌미삼아 이주민을 배타시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기 때문이다. 외국인과 자국민을 위계적으로 구분해서 차별하려는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세금과 경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한 마디로 말해, 인종주의를 내세워 외국인을 배타시하는 게 아니라 각종 다문화정책이 낳는 경제적 역효과를 비난할 따름이다. ‘우리가 낸 세금이 저들에게 가고 있다.’ 즉, ‘우리에겐 있어야 할 것이 없는데, 저들에게는 없어도 될 것이 있다.’
어쩌면 ‘기득권’에 의해 배제된 자들이 토로하는 경제적 곤란이 더 결정적일 수 있다. 이들은 다문화정책으로 득을 보는 것이 결국 이주민과의 임금경쟁을 부추기는 정치적·경제적 ‘엘리트’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간파하고 있다. 물론 이 같은 급진주의적 기운이 희망적인 것만은 아니다. 전의령의 지적처럼, “얼핏 보기에 신자유주의적 노동을 문제 삼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 원인을 ‘기득권의 음모’와 이에 편승하는 ‘기회주의적 이주민’으로 환원시키고, 그 해결책으로써 이주민의 추방 또는 이주민의 유입 불가를 외치는 데 집중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다문화주의에 반대하는 이유는 이주민의 ‘무임승차’ 때문에 민생이 위협받고 있다는 판단으로부터 나온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거나 학벌이라도 좋으면 이주민과 섞일 일이 없지만, 그렇지 않은 이상 그들과의 일자리 경쟁이 불가피하고 아울러 범죄 위협에 시달려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분명 이주민을 배타시하는 것 같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인종주의라고 몰아붙일 수만은 없는 기이한 현상이다. 자기들 스스로 인종주의가 아니라고 자신하고 있으니 말이다.
전의령은 발리바르(E. Balibar)를 빌려 이 문제를 ‘인종 없는 인종주의’라고 진단한다. 이 독특한 인종주의는 생물학적 차이라는 환상에 기대지 않는다. 기존의 인종주의는 피부색이나 유전자에 근거한 인종주의, 즉 생물학적 인종주의였다. 이로 인해 역사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어왔는지는 익히 아는 바와 같다. 그에 반해 이들이 내비치는 반다문화 정서는 자연과학적 특수성과는 전연 관계가 없다. 적어도 피부색 따위로 외국인을 차별하거나 하는 일은 없다. 사람이 어찌 사람을 차별할 수 있단 말인가.
놀랍게도 이 새로운 인종주의는 ‘문화적 차이’를 숙주로 삼는다. 예컨대 중국인의 유입에 반대하는 것은 중화주의적 방약무인함 때문이고 무슬림을 내쫓으려는 것은 테러리즘에 가까운 위험천만함 때문이다. 우리가 종종 ‘민족성’이라 부르는 것들이다. 인종주의를 생물학적 차이에 근거한 것이라고 한정하기 시작하면 반다문화 담론에서 인종주의를 찾는 것은 매우 까다로운 일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종주의를 ‘어떤 집합적 대상을 다른 대상으로부터 구별하고 이들을 서열화하는 작업, 즉 인종화’에서 시작하는 이데올로기로 이해한다면, 인종 없는 인종주의라는 역설적 진단이 더 이상 괴상망측한 해석만은 아니게 된다.
전의령의 논문에서 놀라운 점은 이와 같은 ‘신인종주의’가 시민사회가 주도했던 차이주의적 문화 담론에 의존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다양한 문화를 인정하고 공존을 모색하자는 다문화주의는 민족문화 간의 문화적 차이를 상쇄하는 담론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도덕적 거리두기는 반다문화주의자들로 하여금 각 민족에 고유한 문화적 꼬리표를 붙이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생각해보라. 다문화주의적 교육 현장에서 다른 민족문화를 존중하기를 요청하는 순간, 그와 동시에 어떤 식으로든 타문화에 대한 묘사가 뒤따를 수밖에 없으며, 결과적으로는 타문화와 구별되는 한국의 ‘민족문화’라는 것이 상상될 수밖에 없다.
다문화주의는 인종주의를 억제하고 민족주의를 대체하려는 목적에서 제시됐지만 그 뒷문으로 슬그머니 인종주의와 민족주의를 다시금 불러들이고 있었던 게 아닐까. 전의령의 표현처럼 다문화주의는 ‘착한 인종주의’의 면면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이런 상황에서 경제적 삶의 위기까지 겹친다면 격발의 순간은 더욱 가까워진다. ‘궁핍의 원인은 무엇인가. 가뜩이나 작은 파이를 우리와 문화가 다른 저들이 좀먹고 있지 않은가.’
배제로부터 비롯된 작금의 상황은 민주주의적 요구의 분출보다는 우익포퓰리즘에 가까운 상태로 기울고 있다. 그나마 극우 정치가 준동하는 외국과 달리 이들의 요구를 대의해줄 정치세력이 없다는 게 다행스러울 지경이다. 신인종주의 문제에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까. 적어도 타자를 혐오하지 말자며 사회적 정의에 호소하는 해법만으로는 이들에게 별다른 영향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 보인다.[워커스 4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