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호(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58년 개띠’는 한국에서 고유명사다. 58년 개띠는 1955~1963년생인 베이비붐 세대에서도 가장 많은 인구를 차지한다. 58년생은 99만3628명이 태어나 20만 명 넘게 죽고 아직도 단일 나이로는 한국에서 가장 많은 70만 명에 육박한다. 그만큼 58년 개띠는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살아야 했다. 동시에 가장 수월하게 직장에 들어간 세대이기도 하다. 제 몸뚱이 하나만 굴려도 충분히 먹고 살만했던 시절이었으니.
부산지하철노조 이영호 조합원은 ‘58년 개띠’다. 호적엔 59년생이라 내년 연말에 정년퇴직한다. 직업군인 아버지가 부산에 정착하면서 58년 부산에서 나고 자란 이영호는 77년 고교를 나온 뒤 대학 가려고 재수했지만 실패하고 생계를 위해 화학공장에 다니다 80년 군에 입대해 83년 제대하고 다시 부산 사상공단의 염색공장 계림염직에 잠시 다녔다. 안정적인 직장을 위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다가 84년 7월 부산지하철 공채 1기에 합격해 85년 3월에 입사했다. 아버지와 본인의 바람대로 공무원이 됐다.
국철에서 넘어온 선배들과 뒤섞여 별 생각 없이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노조 일로 3번 해고되고 3번 복직하는 기구한 삶을 살 것이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87년 6월항쟁과 노동자대투쟁 시기에 일 마치면 부산시내에 나가 시위대열에 합류했지만, 공무원 사회였던 부산지하철 현장은 조용했다. 그러나 87년 연말 부산지하철이 부산시 산하 공무원 조직에서 부산교통공단법에 따라 공기업 직원으로 바뀌면서 공무원 신분이 사라졌다. 이 위기에 맞춰 부산지하철에도 노조가 들어섰다.
초기 1, 2대 노조집행부는 민주파도 아니지만 ‘쌩어용’도 아니었다. 노조는 89년 24시간 맞교대 근무를 3조2교대로 개선해 내고, 일반직과 기능직으로 나눠진 직제도 통합하는 성과를 냈다. 임금도 많이 올랐다. 공무원이었을 땐 시간외근무수당과 야근수당을 법대로 다 받지 못했는데 근로기준법에 따라 법정수당이 크게 올랐다. 앞선 서울지하철노조의 투쟁 덕분이었다. 부산지하철노조는 서울지하철의 ‘선도투’의 떡고물을 챙겨갔다. 3대 집행부는 이런 저런 비리를 많이 저질러 조합원들의 비난을 샀다.
3번의 해고와 복직
대의원이 된 이영호는 자연스레 노민추(노조민주화추진위원회) 활동에 들어갔다. 부양노련(부산양산지역노동조합연합) 가서 도움도 받았다. 3대 집행부는 93년 가을에 소비조합 관련 비리로 조기에 사퇴했다. 현장의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변화의 바람을 타고 4대 강한규 집행부가 들어섰다. 이영호는 역무지부장이 됐다.
4대 집행부는 서울지하철노조와 적극 교류하면서 94년 3월 16일 전지협(전국지하철노조협의회)을 만들었다. 전지협은 한날한시에 파업에 들어가자고 약속했다. 94년 6월 27일을 파업일로 잡고 준비에 들어갔는데 철도 쪽 전기협(전국기관사협의회)이 먼저 침탈당했다. 침탈과 동시에 전기협은 파업에 들어가고 서울지하철노조는 6월 24일, 부산지하철노조는 6월 25일 파업에 들어갔다.
94년 6월 전기협, 전지협 동시파업은 전설처럼 노동운동가들 입에 오르내린다. 그러나 지난 2월 26일 밤 부산 구서역에서 야근하던 이영호는 “30년 넘게 노동운동하면서 가장 아쉬웠던 게 94년 파업”이라고 말했다. “노조 집행부는 파업선언만 하고 조합원을 방치하다시피 했고 지도부는 부산대에서 동아대로 도망다니기 바빴다”고 했다. 첫 파업이었던 만큼 준비부족을 절감했다. 6월 25일 밤 거점으로 잡았던 부산대로 이동해 파업선언은 했는데 이후 파업 프로그램이 없었다. 집행부는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고 있었다. 부산대에서 파업 출정식하고 하룻밤 자고 산개해 버렸다. 침탈 움직임 때문에 흩어져 동아대로 모이기로 했는데, 사전에 발각돼 동아대가 봉쇄돼 버렸다. 조합원은 지도부와 떨어져 연락도 제대로 안 되고, 지도부는 잡혀갈까봐 겁이 나서 숨는데 정신 다 팔려 있었다. “그래도 3일이나 버텨준 조합원들이 고마웠다”고 했다.
파업 이후 10명의 노조 간부가 구속되고, 이어 13명이 해고된다. 역무지부장이었던 이영호도 첫 구속과 해고를 경험했다. 현장은 급속히 얼어붙었다.
이영호를 비롯한 부산지하철 해고자들은 부양해복투(부산양산지역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와 전해투(전국해고자원직복직투쟁위원회)에 몸 담고 전국을 돌며 열심히 연대투쟁에 나섰다. 95년 전해투 서울 집중투쟁 마지막 날 과천 정부종합청사에 있던 노동부 항의면담투쟁 과정에서 이영호는 두 번째 구속됐다.
87년 결혼하고 처음 노조할 때도 말리지 않았던 아내는 혼자 연년생 두 아이를 키우며 우울증을 앓았다. 아버지의 부재는 어린 두 자녀에겐 큰 상처를 남겼다. “아이들에게 미안하지.” 그는 웃으며 말했지만 회한이 깊었다.
97년 연말 이영호는 3년만에 복직했다. 그러나 ‘1인승무제’를 밀어붙이려는 회사에 맞서 노조는 98년 7월 3일 다시 파업에 들어갔다. 당사자인 승무지부는 강한 의지로 파업에 참여했지만 차량과 역무, 기술지부는 미온적이었다. 7월 2일 밤샘 교섭이 끝내 합의에 이르지 못하자 노조는 승무지부를 중심으로 노조원 600명 정도를 동래역에 모아놓고 바리케이드를 쳤다. 새벽 첫 전동차가 다닐 무렵 경찰이 진압에 나서자 노조원들이 불을 질렀다. 전차선까지 불길이 옮겨 붙었다. 현장에서 508명이 연행됐다. 경찰이 진압을 끝냈을 땐 아침 8시20분을 넘겨 전국 지하철 파업 사상 처음으로 전동차 운행을 중단시켰다.
승무지부 조합원들은 이후 부산가톨릭센터와 서울지하철노조로 농성장을 옮겨가며 1주일을 버티다 복귀했다. 노사 교섭은 3주만에 겨우 타결됐다.
선로에 불을 지르는 극한투쟁 끝에 이영호는 복직한 지 1년도 안돼 다시 해고된다. 당시 회사는 32명을 대량해고시켜 방화사건을 앙갚음했다. 역무지부장인 이영호는 싸움을 외면하는 적이 없다. 그는 늘 대오 맨 뒤에서 조용하게 웃는 얼굴이다. 그러다가도 대치가 시작되면 어느새 맨 앞에 나서 경찰 멱살을 잡고 싸웠다.
[출처: 이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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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때마다 구내식당 앞 시위…“기간제 노동자 해고는 부당합니다”
부산지하철노조에서 이영호는 선전 일꾼으로 통한다. 늘 수첩과 볼펜, 카메라를 들고 다녔다. 그가 만든 선전물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회사는 많이 불편해 했다. 해고 시절엔 공공연맹(지금의 공공운수노조) 선전국장으로 2년간 파견 나가 서울살이도 했다.
7개월의 짧은 복직 끝에 다시 7년이 넘는 두 번째 해고자 생활은 2005년 12월에서야 끝났다. 2008년 오영환 집행부 때도 파업으로 잠시 해고됐다가 징계 재심 끝에 복직했다. 세 번의 해고와 복직이 이어지는 사이 30년이 훌쩍 지났다. 입사 동기 중엔 임원이 된 이도 있지만 그는 역장도, 부역장도 아닌 평직원이다.
막차를 기다리는 그에게 94년 첫 파업 말고 두 번째로 아쉬웠던 노조활동이 무엇인지 물었더니 “부지매 투쟁”이라고 했다. 부산지하철은 2005년 9월 민간위탁된 100명이 넘는 비정규직 매표 노동자를 하루아침에 잘랐다. 이들은 수년 동안 싸웠지만 끝내 현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러나 이영호는 2005년 해고된 여성노동자들의 싸움 실패보다 2002년 공사의 민간위탁을 막아내지 못한 부산지하철 노조의 안일한 대응실패가 더 가슴 아프다고 했다. 2002년 민간위탁 도입부터 2005년의 해고는 이미 예고돼 있었다.
비정규직 투쟁에 함께하지 못한 회한은 정년을 앞둔 이영호를 점심 때마다 구내식당이 있는 노포기지창으로 이끈다. 낮 근무 때 이영호 조합원은 근무하는 구서역에서 네 정거장 떨어진 노포기지창 식당 앞에서 “기간제 노동자 해고는 부당합니다”라는 구호가 적힌 팻말을 들고 1인시위를 하다 돌아온다.[워커스 4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