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말] ‘블랙큐브’는 제도미술을 상징하는 ‘화이트큐브’를 빗대 다른 예술을 말하기 위한 이름이다. 《워커스》는 새 꼭지 ‘블랙큐브’를 통해 급진적인 예술 실천을 조명하며 주류사회에 도전하는 이들을 따라 경로를 이탈한다.
“‘쇼 머스트 고 온(쇼는 계속돼야 한다)!’ 공연예술계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술가들의 끝없는 열정을 칭송하는 말인 동시에 공연을 위해서는 최저 시급, 성적 자기결정권, 인권 등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여성 동료들이 성애의 대상이 되거나 과도한 남성성을 연기하며 명예 남성이 되는 것 둘 중 하나를 택해야만 했습니다.”
연극인 성지수 씨가 23일 밤 청계광장에서 열린 ‘2018분 이어 말하기 성차별-성폭력 끝장 문화제’에서 나지막이 말했다. 그의 말처럼 연출가 ‘이윤택들’의 무대가 젠더 약자에 새긴 폭력은 예술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었다. 예술에 척박한 한국의 자본주의 속에서 ‘일가’를 이룬 ‘원로’와 ‘거장’ ‘선생님’들은 신화가 됐지만 대신 ‘후배’와 ‘제자’들은 그들에 숨죽여야 했다. 피해자의 삶은 시커멓게 타들어가도 그런 예술이 길었다. 그러나 2월 14일 ‘극단 미인’김수희 대표의 미투와 잇따른 연희단거리패 소속 단원 피해자들의 삶을 건 용기가 지금 연극계에 변화의 물꼬를 텄다. 연극인들은 이제 ‘쇼는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
연극계에선 지금 동시대 어느 부문에서보다도 격렬한 ‘위드유’의 운동이 진행되고 있다. 바로 성폭력반대연극인행동(성반연)이 젠더 위계와 폭력에 대한 집단적 성찰과 변화의 동력이 되고 있다. 이들은 피해자 중심의 연대와 수평적 문화에 기초해 젠더 약자의 시각으로 무대 안팎을 조명하며 변화를 일구고 있다.
성반연은 이윤택 사태가 터진 첫 번째 폭로 후 일주일 만에 빠르게 조직됐다. 연극인연석회의에 연극계 모두가 나서야 한다는 제안에 불이 붙었다. 2월 21일 오후 5시에 열린 첫 번째 모임에만 150여 명이 나타날 만큼 연극계 동료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이들은 비좁은 공간에서 다음날 새벽 3시 반까지 토론에 토론을 거듭했고 실무를 맡기로 한 연극인들은 그 자리에서 두 시간을 더 논의하며 서로 할 일을 찾았다.
성반연에 참여하는 연극인들의 입장은 초반부터 명확했다. 이들은 토론을 이어나가며 연극계 성폭력이 “단순한 개인이나 특수한 집단 구조에서 기인한 것이 아닌, 연극계와 한국 사회에 오래 전부터 관행으로 내려온 위계 문화와 폭력에 원인이 있다”고 의견을 모았다. 또 “피해자에 대한 지지와 연대를 시작으로 지금 만연한 위계 문화 자체를 뿌리 뽑아야 한다는 것, 이에 기존 비대위나 협회 체계가 아닌, 피해자와 함께 연대하며 나아가는 수평적인 연극인 결의가 필요하다”는 것에 공감하며 이 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현재는 30여 명의 실무자가 주도하는 5개의 분과가 꾸려졌고 이 외에도 피해자 모임과 ‘페미니스트연극인연대’등 소규모 연대체 그리고 법적인 공동대응팀도 만들어졌다.
“원래 이런 걸 하던 사람들이 아니어서 지난 한 달 반 동안 고생을 좀 했다. 그 과정을 통해 서로 합의해온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는 일 중 어떤 것도 피해자의 마음 보다 앞서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피해자 중심의 사고를 하기 위해 매일매일 배워가는 과정에 있다. 성반연의 활동이 단지 몇몇 성범죄자의 처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인생을 돌아보며 연극인으로서,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스스로의 존재를 정립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 1차 포럼 중 이오진 작가
성반연은 무엇보다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하고 이들의 치유와 2차 가해를 막는 등 피해자 보호를 제일 중요하게 여긴다. 또 미투를 고민하는 피해자를 지원하고, 원할 경우 온라인 미투 지원도 한다. 이를 위해 긴급상담창구를 운영하며 일주일에 한 번씩 한국성폭력상담소의 지원으로 동료상담 교육도 받는다. 연극인 개인뿐 아니라 극단이나 다른 장르 예술인들의 상담 문의가 늘어날 만큼 이들은 연극계의 저변과 긴밀하게 소통하고 있다. 또 교수의 가해사실이 드러난 세종대나 청주대 등 예술대학 대책위와도 연대하고 있다. 성반연을 통해 예술대 학생과 졸업생 간의 연대도 이뤄지고 있다.
젠더 위계에 기초한 제작 문화와 무대
“지금까지 연극계에서 결정할 수 있는 주체로 말한 것은 남성들의 입이었다. (…) 젠더 감수성이 진화한 것이 아니라 이에 대한 대처 감수성이 진화됐다.” – 1차 포럼 구자혜 극작가/연출가
“정치적으로 올바른 연극을 만든다고 하면서 여성에겐 불편한 성적 농담이나 여성 비하가 끝이 없었다” “왜 평론가들은 그렇게 예리한 비평을 하면서 이번 사태에 대해서는 목소리를 내지 않는가” “가해 교수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수와 학생 간 TF를 구성했는데 회의 분위기가 위계적이었다. 한 교수는 벌써부터 지원사업이 줄었다고 얘기했다” “10년 이하면 선배, 10년 이상이면 선생님이라고 불러야 한다며 꾸지람을 들었다” “술 마시고 성추행을 했는데 왜 ‘술 취한 좋은 어르신의 실수’가 되는가” “미투로 인해 우리가 같은 세상을 꿈꾸고 있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성폭력에 무지했다” “연극반이 없어질까봐 문제제기를 할 수 없었다” “교수들에게 ‘색끼’로 평가됐다.” – 25일 1차 포럼 참여자 발언들 중
성반연은 피해자 지원과 더불어 연극계에 근본적인 젠더 위계 문화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고자 한다. 그래서 연극계 문제를 터놓고 이야기하는 ‘지금 말하기 자리’에 중요한 무게를 둔다. 이 자리에선 매번 다양한 연령층의 연극인 수십 명이 참여해 자신의 피해 사실을 상담하거나 자신이 겪은 구조적 문제를 나눈다. ‘지금 말하기 자리’는 벌써 여섯 번째(3월 26일) 정기모임을 열었다. 3월 25일에는 ‘미투(#metoo)가 폭로한 침묵의 카르텔’이란 주제로 새로운 담론을 위한 첫 번째 연속포럼이 열렸다. 성반연은 또한 연극계에서 가해자로부터 피해 생존자를 보호하고 남성중심적 연극계 제작 관행을 바꾸기 위해 연극정책과 예술인 교육 제도의 변화를 강제할 수 있는 방법도 모색하고 있다.
“왜 (여성 배역은) 온통 엄마, 아내, 여자친구, 술집 작부, 기생, 미친 여자, 히스테릭한 중년 여자, 삼신할매, 치매 할머니, 복부인, 형수, 처제, 되바라진 여고생, 클럽녀, 유혹녀, 슈퍼 아줌마, 집주인 아줌마, 연애 못하는 노처녀뿐인 걸까. (…) 주인공을 하려면 머리가 길어야 했고, 여성스러워야 했기 때문에, 그리고 사실 그 1번 여성 역할들은 주인공이 아니었고, 자신의 내러티브가 없었으며, 주체적으로 사건을 끌고 가지 않았고, 성녀-창녀-자궁-미친 여자 중 하나였기 때문에(혹은 그것들의 혼합물) 나는 남자 역을 하지 않으면 할 수 있거나 하고 싶은 공연이 별로 없었다.” – 25일 1차 포럼 배우 이리 씨
피해자 지원과 제작 문화에 대한 토론과 더불어 성반연에선 무대 위 젠더에 대한 논의도 치열하다. 배우 이리 씨가 여성 배역에 대해 “성녀-창녀-자궁-미친 여자 중 하나였”다는 말은 연극계의 현실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더불어 작품 안의 남성성에 대한 문제의식은 배역뿐 아니라 연극계 전반에 걸친 문제라는 점에서 젠더적 관점이 부족한 연출을 필두로 평론계 등 무대 안팎의 모든 참여자들이 자신의 역할을 다시 성찰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그러나 성반연에겐 올려야 할 막이 아직 많이 남았다. 25일 1차 포럼의 한 참가자는 “왜 이 자리에 남성연출가들은 드문가”라고 말할 만큼 남성은 드물었다. “블랙리스트에 대한 분노에 비하면 빈자리가 크다”라는 말도 나왔다. 자신을 배우라고 소개한 한 여성은 “여기에 오는 걸 동료들이 알고는 욕을 했다”고 하면서 “나라도 움직여야 할 것 같았다”고 토로했다.
그러나 분명한 건 이제 연극계는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연극 작가 이오진 씨는 이를 이렇게 말한다. “지난 한달 반은 가부장적이거나 1인 중심의 권력에서 벗어나 수평적으로 어떻게 연대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실천해온 과정이었다. 그래서 보람이 있다. 이제부터가 시작인 것 같다. 연대와 변화가 시작됐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이 변화가 어디까지 나아갈지, 관객은 응원 이상의 것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워커스 41호]
연극계 가해자 체크리스트
– 설유진 극단 907 연출가가 3월 25일 성반연 1차 포럼 현장에서 제안
1. 공연의 제작과정 중이나 회식자리에서 분위기를 띄우기 위한 성적 농담, 음담패설을 하지는 않나요?
2. 공연의 제작과정 중이나 회식자리에서 연기지도나 분위기를 띄운다는 이유로 필요 이상의 스킨십을 하지는 않나요?
3. 원치 않는 이들에게 회식을 여러 차수로 진행하거나 과한 음주를 조장하지는 않나요?
4. 업무를 가장한 사적인 만남을 요구하지는 않나요?
5. 연습실이나 극장이 아닌 모텔이나 한적한 곳에서 따로 연습이나 회의를 요구하지는 않나요?
6. 작품 안에 동의하지 않은 노출이나 접촉이 필요한 장면을 강요하지는 않나요?
7. 누군가 성폭력 피해사실을 말했을 때에 별거 아니라는 식이나, 애정 표현이라는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나요?
8. 누군가 성폭력 피해사실을 고발 했을 때 다른 곳에 말하지 말아달라거나, 작품을 위해 이번만 넘겨달라는 식의 은폐요구를 하지는 않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