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살배기 아들을 마음에 묻은 금연, 잃어버렸던 이름을 찾기 위해 가부장제와 싸웠던 순분, 지독히 가난했음에도 나눔을 즐겼던 의선의 희로애락이 산과 숲으로 삼연한 소성리에 고스란히 배어있다. 6.25 전쟁 당시 인민군이 빵을 팔았던 마을회관과 한국군이 주민들을 학살했던 마을 입구, 그 시체를 파묻었던 계곡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상흔이다. 마을 사람들은 질곡의 역사와 고단한 삶을 부둥켜안고 서로의 일상을 지탱하며 살았다.”
– <소성리> 시놉시스 중
박배일 독립 다큐멘터리 감독은 변두리, 오지, 또는 어디에든 있으나 보이지 않는 이들을 좇는다. 티, 반바지에 슬리퍼 신고, 카메라 들고 다니다 때론 어르신들의 꾸중을 듣는다. 12년 째 크고 작은 현장에서 싸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그런 그는 이번에 영화 <소성리(2017)>로 부산국제영화제 비프메세나상과 서울독립영화제 독불장군상을 받았다. 이 작품은 서울인권영화제와 인디포럼 스크린에도 올라간다. 촬영 현장에선 ‘감독님’보다 ‘배일아’가 더 익숙한 현장일체형 미디어활동가. “여차저차한 거군요” 요약 정리하려는 기자에게 “아뇨, 그건 이런 부분에서 여차저차한 거고, 저런 부분에선 여차저차하지요”라며 디테일을 정확하게 잡아주는 은근 세심한 타입의 박배일 독립 다큐멘터리 감독. 밀양 송전탑 투쟁, 생탁막걸리 노동자 투쟁, 성주 사드 투쟁 등지에서 탄생한 그의 작품들은 아마 길거리, 농성장 같은 ‘블랙큐브’에 걸려야 제 맛깔을 낼 듯도 하다. 5월 20일, 서울극장 앞 카페에서 박배일 감독을 직접 만났다.
영화 <소성리>로 유수의 영화제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축하드린다.
영화로선 성과지만 영화를 보러 오는 분들이 별로 없다. 광주에서 상영회를 하는데 다섯 분이 왔다. 그 중 세 분은 광주 분들도 아니었다. 하하.
다섯 분? (잠시 할 말을 잃은 기자를 두고 박 감독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두 영화제 모두 선정 기준이 까다롭다. 인권영화제는 영화적 완성도뿐 아니라 상당한 인권 감수성을 요구하고, 인디포럼은 기존 영화적 문법을 탈피한 새로운 기법을 주요하게 보고 선정한다. 독립영화 상영기회가 많지 않기 때문에 상영 기회를 제공하는 이런 영화제들이 고맙다. 영화제가 많다고 해서 많은 영화가 상영되는 건 아니다. 영화제 특징에 맞는 영화를, 또 주목해야 할 영화를 선택한다. 서울독립영화제가 한해를 마무리하는 영화제인데 1,400편이 접수된다. 그 중 많아봤자 5~60편의 영화가 상영된다. 우리나라 문제점은 좋은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관객이 또 감수해야 할 부분이라고도 생각한다. 좋은 영화를 보기 위한 수고를 좀 해주셨으면 좋겠다.
<소성리> 이야기를 해보자. 어떤 인연으로 영화를 찍게 됐나
작년 여름 ‘미디어로 행동하라 in 성주/김천’ 프로젝트를 함께했다. 매년 하던 프로젝트인데 미디어 활동가들이 1년에 한번 씩 모여 현장에 가서 각자 할 수 있는 미디어로 현장을 기록하는 작업이다. 최소 비용으로 운영 중인 빡센 프로젝트지만 활동가, 예술인, 현장 주체들이 모여 큰 힘을 얻는다. 지난 여름 프로젝트가 끝나고 작업 결과물을 마을 회관 앞에서 선보였는데 주민들의 달라지는 표정을 보니 이 맛에 활동하는 거란 생각도 들더라.
프로젝트가 끝나고도 계속 남아 기록한 이유는
개인이 발 딛고 서있는 것조차 불안한 사회가 한국사회 아닌가. 투쟁 현장의 목소리는 개인을 서게 하면서, 그럼으로써 제대로 된 세상이 되게끔 한다. 그런데 투쟁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은 점점 더 적어진다. 소성리의 투쟁은 문재인과 김정은이 말하는 평화만큼이나 중요하다. 밀양 투쟁으로 원전의 위험을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됐고, 그것 때문에 핵발전소를 지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논의하기 시작했다. 생탁 막걸리 노동자들 덕에 부산 시민은 더 깨끗한 생탁을 마신다. 비록 그 분들은 한 명도 복귀하지 못 했지만 말이다.
개인적으로 예상이 어긋나는 영화였다. 본격 귀농 권장 영화 같기도 하고, 중간엔 공포영화 같았다. 요새 유행하는 할머니 브이로그 같기도 하고.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나
소성리에서 지내면서 공간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됐다. 이 곳은 전쟁의 아픔을 지니고 있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로운 공간에서 농사 짓고 사는 사람들에게 다시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 평화로운 공간에 사드 배치는 잘못된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여긴 그럴 만한 데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운동적 전략으로, 그래서 제목도 소성리다.
출연진의 개인적인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소성리 부녀회장님과 이야기하다, ‘임순분’이라는 이름을 찾아가는 과정을 하나의 스토리로 잡아야겠구나 생각했다. 임순분 회장님이 사드를 겪고, 어떻게 저항하는지, 그의 이름과 얼굴을 보여주고 싶었다. 소성리란 이름과 함께, 투쟁하는 할머니들의 얼굴과 이름을 각인시키고 싶었다.
관객이 적다니, 안타깝다.
알고 있다는 착각 때문에 소성리를 안 보러 오는 것 같기도 하다. 독특한 지점이 있는 게 소성리 사드 배치 작업을 하는 중 정권이 바뀌어버렸다. 평화 무드가 조성되고, 이 분위기가 연장되고, 정권이 애쓰고 있으니 사드 배치가 해결될 것이라 낙관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또 투쟁 현장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막연히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또 투쟁이 좀 많나. 그런 피로감도 있고. 그래서 다르게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반면 일상에 치이는 바쁜 사람에게 더 적극적으로 알아보라고, 아는 것을 업데이트하라고 이야기할 수 있나라는 생각도 든다.
남북에 봄이 오고 있다는 기대로 가득하다. 재 뿌린다고 욕을 먹진 않았나
남북정상회담을 브라운관으로 보고 있었다. 두 정상이 다리를 걸을 때 뭉클하고,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다니 신기하고, 콘크리트 왔다갔다할 때는 재미있으면서도 감동적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할머니들이 어떻게 보고 있을까 상상하니 너무 마음이 안 좋았다. 여전히 그 공간은 경찰과 군인들이 대치하고 있으니까. 평화 무드는 지지하지만, 진짜 평화가 온 거냐, 오고 있는 거냐는 본질적인 질문을 해봐야 한다. 방어용이든 공격용이든 전쟁 무기가 상존해 있는 공간에서 평화를 이야기할 수 있는지 말이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모르면 모르지만, (국방 정책을) 호응하고 지지할 수 없는 사람이다. <소성리>를 본 사람들은 이제부터 불편할 거다. 평화 무드 조성되고, 기다리란 말을 들으면, 당장 힘들어하는 그 사람들의 얼굴이 선명히 보일 거다.
불법적 사드 배치에 대한 사과와 무용지물인 사드 철회를 요구하는 영화인 255인의 서명에 가장 먼저 이름을 올렸더라. 촛불의 염원으로 탄생한 정부를 지지하는 마음을 담아 사드를 반대하고 배치 과정의 폭력에 대해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소성리>를 영화로서 평가받는 게 다가 아니다. 제가 지금까지 그렇게 활동하지 않았다. 지난해 부산영화제에 제 영화가 상영된다고 했을 때,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영화인들 조직해서 사드 반대 목소리를 모으고, 소성리 평화를 이야기해야 했다. 영화관 안에서 관객이 동의하면 피켓팅을 함께 했고, 영화의 전당에선 1인 시위할 감독을 찾고, 서명을 해서 올리는 작업을 했다. 영화를 매개로 투쟁을 같이 하는 게 의미 있다.
행동과 예술은 다르다는 이들도 있다.
활동이 담보 되지 않은 예술이 저한테는 무의미하다. 밀양과 소성리, 비슷한 현장이지만 관객들에게 어떻게 다르게 체감하게 만들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계속 가지고 있다. 이야기, 메시지보다 영화적으로 어떻게 만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현장을 좀 더 다르게 체감시켜서 소성리는 어떤 공간인지, 사상은 어떤 공간인지, 이 곳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이야기하고 싶은 거다. 영화적으로 고민하겠지만 그게 결국 어떻게 바꿔나갈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다. 그게 연결돼야 유의미하다. (구분하려는 시도를) 비난하고 싶진 않다.
여성, 장애인, 노동자가 당신이 천착하는 키워드고 주제다. 어쩌다 남성이고 비장애인인 당신이 그토록 꽂혔는지 궁금하다.
보수적인 동네에서 30년을 살았고 군대문화에 익숙해졌다. 다큐를 우연히 접하면서 ‘세상이 좀 이상하네?’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장애인이 주인공인 <나비와 바다>를 찍으며 모성이 어떤 부분에선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거구나 처음 알았다. 계속 공부했다. 이 사회가 장애인, 혹은 소수자를 없애려고 어떤 시스템을 갖추었나. 장애인이나 여성들의 투쟁 현장을 어떻게 감추려고 하나, 그런 물음들을 그때 시작했다. 여성, 장애인, 노동자의 권리가 제대로 섰을 때, 이 사회가 제대로 첫발을 뗄 수 있는 것 같다고 그때부터 이야기했다. 여전히 남성이기 때문에 특정 순간에 특정 사안에 발휘될 수 있는 저의 남성적 감수성을 점검해 가면서. 작품도 그렇고 살아가는 방식도 페미니스트가 되기 위함이다. 사회가 제대로 첫발을 떼기 전에 나부터 제대로 살아야 하니까.
12년차 독립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우여곡절도 많았을 듯하다.
우선 제 작품 크레딧을 보면 연출, 촬영, 편집을 다 제가 한다. 비용이 없어서다. 촬영 감독이 있고, 조연출도 붙고 하면 제가 신경 쓸 부분은 적어지고, 연출에만 신경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지금까지는 제가 힘이 남아 있어서 환경이 안 만들어지더라도 당장 투입해서 찍어왔다. 지금 하는 작업이 끝나면 2, 3년 정도 쉴 예정이다. 다음 작업이 10번째 장편인데, 산업사회 지나고 폐허가 돼가는 공간에 대한 영화다. 이주 노동자, 늙은 노동자, 도시재생사업이 파괴한 공동체 주민들이 나온다. 시대가 가지는 감수성, 그리고 내가 자랐던 곳, 사상이라는 공간의 감수성을 그리려고 한다.
다큐 영화의 매력은 뭔가
세상의 시스템을 조금씩 바꾸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다큐 감독 직업을 선택했다. 티, 반바지에 슬리퍼 신고, 요만한 카메라 들고 쫓아다니면서 어르신들에게 꾸중 듣는, 현장에 스며드는 느낌도 좋았다. 도시와는 다른 속도를 체감하는 게 즐거웠다. 물론 내 영화의 공간은 변두리이기도 하다. 결국 오지의 이야기다. 특별히 의미 부여 받지 않은, 규정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