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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소신 있는 ‘프로페셔널’은 뭘까?

2018년 6월 20일Leave a comment43호, 코르셋 벗기By 젤리(페미당당)

“야, 너는 어디까지 끌려가 봤어?” 지난달 회사 동료가 물었다. 나의 부서장은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다른 곳에 데려가서 혼내는 예의를 갖췄다. 물론 “젤리 씨는 저보고 X까라는 건가요?” 같은 말을 하고는 했지만. 부서장은 공교롭게도 내가 담당하는 제품을 런칭했던 사람이었고 부서장이 된 후에도 이 제품을 너무나도 사랑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 부서장과 부딪히는 경우가 많았고 가끔 어디론가 끌려가게 되면 부서장의 언어폭력과 가스라이팅을 견뎌야 했다.

 

사원 1년 차, 20대, 여자로 회사에 다니는 것은 ‘딩동! 당첨되셨습니다. 당신은 회사 위계 구조에서 가장 약자입니다!’ 같은 일이었다. 나의 부서장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나를 감정 쓰레기통쯤으로 대했다. 내가 들어오면서 막내를 막 벗어나게 된 사람들은 이 위치를 벗어나게 된 것에 안심하며 모른척했다. 그래서 나는 회사에서 많은 경우 혼자였고 외로웠다.

 

한 선배는 나를 혼내는 일(부서장의 말을 전달하는 일)이 아니면 나와 밥도 같이 먹지 않았다. 종종 신입사원답지 않게 일을 해낸다고 칭찬을 듣기도 했는데 동시에 신입사원답지 않게 칼퇴근을 하거나 군기가 들어있지 않다고 혼났다. 부서장과 선배와 나, 이렇게 셋은 인간적으로는 전혀 가깝지 않았지만 일은 잘 해내는 사람들이었다. 그래도 부서에 막 배치 받았을 때는 이 정도면 이상적인 관계라고 생각했다.

 

작년 말 새로운 나라에 서비스를 확장하기로 결정하면서 그동안 어느 정도 중재를 맡아왔던 선배 없이 부서장이랑만 둘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됐다. 그동안 다른 지역은 선배와 함께 맡았기 때문에 출장은 항상 부서장과 선배가 갔다. 나도 출장을 가보고 싶었는데 선배 대신 가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고 그래도 이 나라는 혼자 하니까 이 나라와 관련된 출장은 내가 갈 수 있겠구나 했다. 새로운 파트너사와 매주 컨퍼런스 콜을 하고 매일같이 이메일을 주고받았다. 파트너사와는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우리 곧 만나자는 얘기를 많이 했다. 그렇게 몇 개월을 일하다가 출장 기회가 생겼는데 이번에도 결국 파트너사에 이메일 한 통도 쓰지 않고 있던 선배가 나 대신 출장을 갔다. 나는 굉장히 실망했다. 선배는 미안하다며 출장가도 엄청 힘들고 그렇게 좋지 않다고 나를 위로 했다.

 

한동안 돈 받은 만큼만 일하려고 노력했다. 이주쯤 후 부서장이 오랜만에 나를 불렀고 컨퍼런스 콜을 진행하는, 창문이 없고 방음이 잘 되는 회의실로 나를 끌고 갔다. 또 시작됐다. “젤리 씨는 요즘 회사생활에서 가장 힘든 점이 뭐에요? 그렇게 일을 하시면 저한테 엿 먹으라고 하시는 거죠. 그렇죠?” 처음에는 사실들의 나열로 상황을 모면해보려고 했다. 요즘 몸이 별로 안 좋다거나 집에 일이 있다고. 그런데 부서장이 30분 째 똑같은 말을 반복해서 결국 나도 부서장도 알고 있었던 이유를 언어화했다. “저는 이번에 출장을 가지 못하게 되어 굉장히 실망했어요.” 이 말을 듣자마자 그는 내가 아닌 선배가 대신 출장을 갔던 이유를 말했는데 그중 하나는 출장을 가기로 결정됐던 밤 11시에 내가 회사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 날 선배는 나보다 4시간 이상 늦게 출근했다) 부서장은 약 한 시간동안 하고 싶었던 말을 다 하고 본인이 듣고 싶었던 나의 대답을 다 들은 뒤에야 회의실 문을 열어주며 이렇게 말했다. “젤리야, 너는 신입사원이 너무 ambitious(야심 있는) 해.” 이게 욕이었을까?

 

일상적인 감정이 된 막막함

그 후로도 나는 여러 차례 끌려갔고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다. 채식한다고 고기를 먹는 회식자리에 빠져서, 사적인 시간을 존중 받기 원하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퇴근한 후에는 회사에서 온 전화를 잘 받지 않기 때문에, 금요일 오후 5시에 일을 시켰더니 애인의 생일이라며 6시에 퇴근해서 불만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이런 얘기를 반복적으로 듣다 보니 나는 회사 안에서는 고형식을 잘 못 먹을 정도로 힘들어졌다. 그런데 젤리는 이렇게 안 먹으니까 말라서 부럽다는 둥, 채식을 하면 살이 빠지냐는 둥 무신경한 말을 했다. 반복되는 가스라이팅에 나는 예민한 사람이어서 회사와 잘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이곳을 빠져나가더라도 내 자리를 찾지 못할 것 같다는 막막함이 일상적인 감정이었다.

 

군대식 조직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곳의 문화는 어떤 사람들에게 조금 더 편리하게 다가올 수 있도록 기울어져 있다. 하루에 최소 9시간, 창문도 열 수 없는 공간에서 지낸다는 것도 숨 막히는 일인데 아무도 대놓고 말하지 않지만, 모두가 알고 있는 규칙들은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회사 친구는 나를 자기 주위에서 가장 소신 있는 프로페셔널이라고 부른다. 그 친구가 전해줬던 말이 있다. ‘내가 믿는 가치를 바탕으로 계속 행동하다 보면 언젠가는 내가 믿는 가치처럼 행동하는 곳에 있게 될’ 거라는 말. 나는 지난달 파트너사로부터 이직을 제안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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