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문화기획 달)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15년도 겨울, 밤새 가진통을 겪고 아침 7시가 되어 남편과 함께 1시간 30분 동안 차를 타고 집에서 가장 가까운 조산원이 있는 마산으로 달려갔다. 자연주의 출산 영상을 보며 나름 공부를 했건만 진통 시간이 길어지면서 고통을 참을 수가 없어졌다. 조산사가 자리를 비울 때마다 남편한테 일반병원에 가서 수술해야 살 것 같다고 소리를 쳤던 기억이 난다. 남편은 허리에 힘을 빼라는 조산사의 말을 옮기며 최선을 다하라고 했지만, 그 조언에 화가 치밀어 그냥 밖으로 나가달라고 말했다. 긴 진통 끝에 저녁 9시가 넘어서야 물 밖에 꺼내 놓은 물고기처럼 파닥이면서 아이를 출산할 수 있었다. ‘둘째는 없어’라는 말과 함께.
출산의 경험은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진다고 하는데 나는 그 때만 떠올리면 척수가 서늘해진다. 남들 다 하는 출산이니 나도 잘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던 근거 없는 자신감은 정말이지 산산조각이 났다.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일이다. 사실 육아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막연하게 잘 해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끊임없이 벽에 부딪혔다. 잠을 못자면 예민해지는 나에게 신생아 돌보기는 곤욕 그 자체였다. 머리는 자꾸 빠지고 나온 배는 들어갈 줄 몰랐다. 거울을 보면 자꾸 우울해졌다. 모유수유로 좋아하는 술도 마시지 못했고 매운 것도 피했다. 내가 있어 아이가 있는 건지, 아이가 있어 내가 있는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 수많은 고충 중에 가장 힘들었던 것은 고립감이었다. 말도 못하는 아이와 거의 매일, 집안에만 있자니 꼭 벽지나 장판이 된 것만 같았다.
유일하게 나의 기분이 환기될 때는 일을 할 때였다. 아이가 어려서 종일 일하기는 어려웠고 집에서 할 수 있는 일러스트나 편집 일을 했다.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결과물이 생길 때마다 우울감과 고립감이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에 돈이 되지 않는 일도 감사한 마음으로 맡았다. 문제는 일이 점점 많아지면서 생겨나기 시작했다.
아이를 재우고 일을 하다가 새벽에 잠들 때도 많았고, 주말 아침에 일어나지 못해 남편이 아이를 보는 일이 늘어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남편은 아이가 크면 언제든 할 수 있는 일을 왜 ‘힘들다, 피곤하다’하면서 계속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내가 하는 일을 존중하지만 내가 엄마의 역할을 충분히 소화한 다음에 일을 하길 원한다고 했다.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육아의 고단함은 아이에 대한 사랑으로 극복될 수 있는 걸로 여겨졌다. 엄마의 이름으로 말이다! 아이가 32개월이 되었을 때 긴장이 고조되면서, (그리고 모유수유가 끝나면서) 남편은 육아와 가사를 맡고 나는 돈을 벌며, 역할을 바꾸기로 결정했다. 시골동네라 어린이집이 3살 반부터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기 전, 6개월짜리 단기 역할 바꾸기였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우리에게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물론 나의 임금은 남편이 벌어오는 임금보다 적고 불안정했지만 좁혀지지 않는 입장 차이를 극복하고자 싸우고 또 싸워서 얻어낸 결과였다.
‘다녀올게, 고생해요’
자! 역할이 바뀌었으니 이제 그동안 서로에게 내뱉었던 말들을 본인이 들을 차례가 왔다. 남편에게 되돌려줄 말들은 이거였다. ‘나 출근 할게, 잘 쉬어’ ‘나도 일하고 와서 피곤해’ ‘당신은 그래도 사랑하는 아이랑 있었잖아. 나는 밖에서…’ ‘왜 힘들다고만 해. 밖에 나가서 아이랑 산책도 하고 그래’ ‘당신은 엄마잖아!’ ‘야근을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건 아니잖아’ ‘난 잘 못하니까.’
꼭 돌려주기로 마음먹었던 이 말들을 나는 끝내 돌려주지 못했다. 육아의 높은 노동 강도와 직면한 남편은 소위 멘붕(멘탈붕괴)에 빠졌고, 쉽게 우울해 했다. 빨래를 개키며 ‘이 지긋지긋한 살림 죽어야 끝나지’를 명언처럼 남기기도 했고, 요리를 못하겠다며 괴로워하기도 했다. 매일 같이 아이와 얼마나 열심히 놀아줬는지, 그리고 얼마나 그 과정이 힘들었는지를 설명했다. 아이가 항상 붙어있으니 친구를 마음 편히 만날 수도 없고, 하루 종일 말할 상대가 없어 고립감이 든다고 말했다. 그 중 남편을 가장 크게 괴롭힌 것은 사회적 시선이었다. 자신은 육아로 매우 바쁘고 힘들지만 간혹 만나는 사람들은 안부 인사에서 은연중에 남편을 ‘노는 사람’으로 취급한다는 것이었다. 남편은 발전 없어 보이는 자기 모습에 우울해 했다.
남편은 이렇듯 급변하는 자신의 상태에 괴로워했다. 반대로 나는 참 평온해졌다. 일을 하며 받는 에너지가 나를 채웠고, 퇴근 후 편안하게 살림과 육아에 동참할 수 있었다. 우리가 역할 바꾸기를 하기로 한 6개월은, 남편이 겪은 우울감 만큼이나 참 더디게 흘러갔다.
그리고 그 시간을 보내며 우리는 많은 것이 변했다. 이제는 더 이상 집에 남아 육아를 하는 사람에게 ‘다녀올게, 쉬어요’란 말을 하지 않는다. 대신 ‘다녀올게, 고생해요’라고 말한다. 육아의 고단함을 함께 겪지 않았다면 아직도 집에 있는 일을 휴식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또 육아가 즐거운 일이 아니라, 때로는 힘겹고 우울해지는 일이라고 이야기 하더라도 ‘엄마’ 혹은 ‘아빠’의 이름으로 서로를 채찍질하지 않는다.
‘엄마’, ‘아빠’라는 역할 프레임에 서로를 구겨 넣으며 얻은 것은 가정의 평화가 아니라 상처뿐이었다는 것을 틀 밖으로 나와서야 조금씩 알게 됐다. 채찍질해야 하는 대상은 오히려 ‘엄마’, ‘아빠’의 이름으로 역할을 구분 지으려는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아닐까.[워커스 3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