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 개의 비닐 천막이 어깨를 걸었다. 고층 빌딩숲이 하늘을 가리지만 비는 맞아주지 않는다. 9월 2일 브라질 남부 상파울루의 도시, 상베르나르두의 버려진 땅을 5백여 가구가 점거했다. 보름 만에 이 수는 7천 가구로 늘어났다. ‘상베르나르두의 두려움 없는 민중’이라는 구호를 내건 홈리스와 실업자, 빈민들이다. 이들이 점거한 땅은 크기만 6만 제곱미터. 천막마다 나무토막 네 개를 엮고 그 위에 비닐을 둘렀다. 전기도 물도 들어오지 않지만 점거자들은 제대로 된 주거 정책을 정부가 약속할 때까지는 떠나지 않을 셈이다. 땅은 건설회사 MZM가 소유하고 있다. 지난 30년 동안 버려져 있었지만 점거가 시작되자마자 회사는 당국에 강제퇴거를 요구했다.
이 점거운동은 브라질 빈민운동단체 무토지노동자운동(MTST)이 이끌고 있다. 90년대 말 결성된 이 단체는 주거권을 요구하며 상파울루 등 다양한 지역에서 대규모 점거농성을 벌여왔다. 그러나 상황은 갈수록 암울하다. 지난해 5월 노동자당(PT) 출신의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이 부패혐의로 직무정지된 뒤 대통령직을 대행한 미셰우 테메르 부통령은 3주 만에 주택 지원 예산을 삭감했다.
질서 있는 재집권
지우마 호세프 브라질 대통령이 탄핵된 지 만 1년이 지났다. 그가 탄핵되자마자 기소된 노동자당의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전임 대통령은 지난 7월 뇌물수수와 돈세탁 등의 혐의로 9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호세프 전 대통령을 탄핵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세르지우 모루 연방 판사는 불충분한 증언에만 의존한 채 룰라를 기소했다. 이 재판은 그 외에는 제대로 된 증거가 없어 정치판사가 주도하는 우파의 전략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그런데도 룰라 전 대통령이 실형을 받을 가능성은 크다.1)
테메르 정부는 의회쿠데타를 통해 호세프 대통령을 밀어낸 뒤 경제위기를 내세우며 우파적 경제 개혁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노동시장 유연화에 연금, 보건 및 사회복지비 삭감 정책이 줄줄이 발표됐다.
그러나 정부에 대한 깊은 불신에도 공세적인 투쟁은 보기 드물다. 4월 28일 4천만 노동자가 총파업에 나서며 상황은 역전되는 듯했다. 30년 만의 최대 규모였다. 5월 24일 연금 개악 반대 투쟁에도 20만 명이 대통령궁 앞에 모여 대통령 퇴진과 즉각 선거를 요구하며 정부를 긴장시켰다. 경찰과 시위대는 격렬하게 충돌했고 공공기관까지 세 곳이 습격당했다. 대통령은 30년 만에 처음으로 특수부대까지 동원해 겨우 사태를 진정시켜야 했다. 하지만 6월 30일 두 번째 총파업이 초라하게 끝나며 불씨는 잦아들고 말았다.
깊은 불만에도 대중운동이 부흥하지 않는 데에는 최대 야권인 노동자당의 책임이 크다. 노동자당이나 친 노동자당 노조와 일부 사회운동은 우파의 개혁조치들에 날을 세운다.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 실제로 지난 8월 말 발표된 수억 달러 규모의 민영화 조치나 대대적인 아마존 산림보호구역 해지 조치에도 거리를 조직하지 못했다. 대개 사회단체와 좌파 조직들이 산발적으로 우파 정부에 맞서고 있을 뿐이다. 노동자당에 가까운 주요 노총 통합노동조합(CUT)은 노동법 개악에도 미온적이었다.
오히려 노동자당은 저항 보다는 질서 있는 재집권을 준비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노동자당 내외 좌파들은 노동자당이 또다시 계급타협주의로 인한 과오를 되풀이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노동자당 왼쪽에 있는 좌파 사회주의자유당(PSOL) 소속으로 상파울루대에서 역사를 강의하는 숀 퍼디(Sean Purdy) 교수는 지난 7월 미국 좌파언론 <자코뱅>에 노동자당이 “신자유주의 노선을 바꾸려 하지 않고 대자본과 소위 중도정당과의 연합을 재건하려 한다”고 지적했다.
지속되는 계급타협
노동자당은 노동자계급의 정당으로서 지난 14년 동안의 집권 기간 빈곤을 줄이고 브라질 노동자 민중 삶의 수준을 높이는 성과를 냈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자당의 성공신화는 대자본 및 우파세력과의 계급타협 속에서 주조됐다는 한계가 존재한다. 노동자당은 집권을 위해 우파세력과 동맹하고 사회정책에도 신개발주의의 경제정책을 고수했다. 룰라 그 자신은 금속노동자 출신이었지만 그가 처음으로 집권한 2002년 대선 러닝메이트부터 섬유업계 재벌 알렌카르였다.
노동자당은 애초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에 교훈적인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노동자당이 공식 정당 등록을 한 1982년에만 해도 지역 사회뿐 아니라 작업장, 대학과 LGBT 운동, 주거, 반인종주의 등 다양한 사회운동에 뿌리를 내린 수천 개의 지부가 전국에 포진했다.
전반적으로 이 지부들은 소수였지만 노동자당의 전투성에서는 생명선과 같았다. 이들은 노동자당의 풀뿌리 기반이었고 군부독재 반대 시위와 1980년대 신자유주의에 맞선 파업 물결에 핵심적이면서도 급진적인 역할을 했다. 이들의 연구와 토론, 출판, 지역 조직과 동원을 통해 노동자당은 1980년대에 급진성을 유지했다. 특히 이 기층조직들은 통합노동조합과 더불어 1983년, 1986년, 1987년과 1989년 대규모 총파업을 포함해 대중적 저항을 조직하는 데 주도적이었다.
그러나 노동자당이 점차 의회주의를 중시하면서 힘의 균형은 기층조직이나 노동자들이 아닌 주류사회로 기울어 갔다. 급기야 1984년 초, 전당대회에서 룰라가 이끄는 중도파 지도부는 이 기층 조직들의 결정권을 확대하려는 움직임을 좌초시켰다. 더구나 조직 내 관료주의는 늘어만 갔다. 1990년대 말부터 노동자당은 노동자 보다는 기업 편으로 이동했고 선거 승리를 위해 부패한 중도와 우파 정당과 연합했다. 동구가 몰락하자 당 지도부는 더욱 좌파와 거리를 두었다.
반면 기층조직들은 말라갔다. 1990년대 말까지 작업장 기반의 기층조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룰라의 영향력이 미치는 수백 개의 지부만 남아 사실상 선거 기구로 전락했다.
게다가 투쟁적이던 노동자당의 전통은 뇌물 및 매수에 핵심 지도자들이 연루되면서 계속 변색됐다. 심지어 지우마 대통령에 대한 의회 쿠데타 후에도 노동자당은 쿠데타를 주도한 중도와 우파 세력과의 동맹을 고수했다. 2016년 10월 지자체 선거에서 노동자당은 1,400개 지역 이상에서 쿠데타에 찬성한 정당들과 연합했다. 또 2017년 초 시의회 의장 선거에선 수십 개의 지방자치단체에서 탄핵에 찬성한 정당들을 지지했다.2)
풀뿌리 민중운동에 달려
노동자당은 내년 10월로 예정된 대선을 앞두고 다시 한번 민중운동과의 연대를 약속하고 있다. 룰라의 측근으로 현직 상원의원이자 노동자당의 첫 번째 여성 당대표인 글레이지 호프만은 지난 18일 “민중의 참여, 사회운동과 노동조합과의 동맹을 통해 현재의 위기를 극복할 것”이며 “집권 시 호세프 전 대통령 쿠데타를 주도한 우파 주도의 언론과 금융자본에 대한 구조 개혁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3) 앞서 8월 중순에는 룰라 전 대통령이 직접 북부 9개 주 25개 도시를 방문하는 희망의 행진에 나섰다.
그러나 노동자당이 다시 민중운동에 기초한 노동자계급의 정당으로 혁신할 수 있을지 그리고 우파의 공격에 맞서 다가오는 대선에서 노동자계급의 희망으로서 설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노동자당은 룰라 전 대통령을 차기 후보로 낸다는 입장이지만 구속 가능성으로 인해 의견이 분분하다. 룰라의 구속 시 대선을 보이콧하자는 의견도 나오고 있으며 룰라의 대안 후보로 물색되는 정치인의 이름도 나오고 있다. 노동자당의 중심성이 약화하고 혁신에 대한 회의가 늘면서 진보/좌파정당들 사이에서도 별도의 선거 전략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룰라의 출마 여부는 미지수지만 그는 여전히 가장 많은 지지율을 모으고 있다. 9월 21일(현지시간) 브라질 여론조사업체 MDA에 따르면 룰라는 20.2%의 지지율을 기록했다. 2위 보다 약 2배 많은 수다. 노동자당도 정당선호도에서 20%의 지지율을 얻고 있다. 테메르 대통령이 속한 브라질민주운동당(PMDB)과 이외 주요 정당인 브라질사회민주당(PSDB)은 1%대이다. 모든 다른 정당들을 합해도 5%일 뿐이다.
20일을 기준으로 3.4%까지 떨어진 지지율로만 보면, 테메르의 정치적 생명은 이미 끝났다. 그러나 그는 공직과 특권을 남용하며 정치인들을 매수해 야당이 요구해왔던 조기 대선 요구를 견제하면서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 ‘브라질의 트럼프’라 불리는 자이르 보우소나루가 당선가능한 우파후보로 얘기되고 있다. 군인 출신으로 기독교 민주당(PDC) 정치인인 그는 지난 20년 동안 말을 아껴왔지만 최근 인종주의적이며, 반여성적이고 파시스트적인 발언을 쏟아내면서 논란을 심화하고 있다. 또 현역 장성의 정치개입 발언이 나오는 등 브라질 정치의 위기는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노동자당을 노동자계급의 대안정당으로 세웠던 민중운동, 노조, 좌파의 어깨가 점점 더 무거워지고 있다.[워커스 35호]
[각주]
1) 룰라 스스로는 “나는 판사가 우리에게 증거가 없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용기가 있기를 바란다”고 말한다(9월 13일 밤 약 3시간 동안의 조사 후 진행한 연설 중).
2) 지난 5월 라틴아메리카 정세에 관한 <자코뱅> 집담회 중
3) 포르투갈공산당(PCP) 연례행사에 방문해 진행한 독일 좌파언론 <융에벨트>와의 인터뷰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