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큐브’가 돼버린 상업화랑. 새하얀 공간에 단독 조명을 쬐는 작품들이 즐비하다. 작품은 시대 공간과 상황과 떨어져 ‘값’이 매겨지기도 한다. 반면 하얀 입체공간을 벗어난 작품이 있다. 이 작품들은 노동자, 시민들의 거리, 농성 천막, 집회 시위 현장을 조명한다. 이곳 작품은 팔려나가지도 않는다. 오히려 경찰 진압에 부서지기 일쑤다. 예술로 실천하는 이들에게 세상은 ‘블랙큐브’다.
‘파견미술팀’은 갖은 투쟁 현장에서 실천 예술을 펼쳐 왔다. 그림, 글씨, 조형물, 시, 퍼포먼스가 거리의 노동자, 시민의 바리케이드가 됐다. 10년 넘게 ‘파견미술’과 함께한 신유아 문화연대 활동가를 4월 18일 콜트콜텍 농성장에서 만났다.
파견미술은 어떻게 시작됐나?
2005년 평택 미군기지 이전으로 대추리 투쟁이 일었다. 이곳에 문화예술인이 많이 들어와 살았다. 노순택(사진), 이윤엽(판화) 같은 주로 서울에서 활동하던 작가들이었다. 이들은 현장에서 개별 작업을 했다. 이들과 함께 빈집에 그림을 그리고 전시 공간을 만들기 시작했다. 하다 보니 ‘쿵짝’이 잘 맞더라. 그 뒤로 ‘우리 여기 가서 농성장 꾸미자’면서 우르르 몰려다니기 시작했다. 2009년 전진경 작가의 권유로 대우차 농성장을 꾸미던 때였다. 이날 작업을 끝내고 노동자들과 술자리를 가졌다. 그러다 농담조로 ‘아저씨들은 파견 노동하면서 돈이라도 버는데, 파견온 우린 벌이도 없다!’라면서 논쟁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우리는 파견 노동자보다 더 열악한 파견미술팀이다!’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기억에 남는 작품 활동은?
콜트콜텍의 경우 대중에게 알리는 투쟁을 잘한다. (2007년~2008년 콜트콜텍 기타노동자 246명이 부당한 정리해고를 당해 12년째 싸우고 있다.) 콜트콜텍은 다른 현장과 달리 ‘기타’라는 매개가 있다. 문화예술인들이 참여하기 좋다. 오늘도 ‘7집 가수’ 손병휘가 이곳 콜트콜텍 농성장 앞에서 버스킹 공연을 한다. 점심시간에 공연하면 많은 사람이 노래를 듣다가 선전물을 읽곤 한다.
콜트콜텍 농성장 옆에서 드로잉, 사진, 판화를 전시한다. 이 농성장엔 글이 빼곡한 대자보, 현수막이 없다. 하나하나 상징을 가진 이미지다. 농성하는 이들의 억울함을 대중에게 강하고 쉽게 표현할 수 있는 작업 방식을 계속 고민하고 있다.
이런 전시가 아니면 파견미술 작품은 어떻게 보관되는가?
물감, 붓을 사는 것도 재정적으로 힘들지만, 보관이 가장 큰 애로사항이다. 파견미술팀 대부분 보관 창고가 없다. 우리가 갤러리에 들어가려는 것도 아니다. 사회가 기억할 일이고 국가 차원에서 보관했으면 좋겠다. ‘박근혜 퇴진 캠핑촌’에서도 다양한 철제 조형물, 스티로폼, 그림 등 작품이 쏟아져 나왔다. ‘두렁’ 등 선배 민중미술가들이 대거 나와 함께했다. ‘촛불탑’도 태극기 집회 참여자들이 부수긴 했지만 역사물이다.
개인적으로 미술 활동은 어떻게 시작했나?
나는 미대 출신이다. 전공은 도자예술이었다. 나는 전공보다는 동인에서 영향을 받았다. 내가 대학을 다녔던 90년대 초 김기정부터 시작해서 학생들이 많이 죽었다. 학생회는 바쁘게 집회를 만들었다. 그러니 미대 학생에게 선전물 제작 요청이 물밀 듯 들어왔다. 밤새 ‘피씨(현수막용 천)’를 쓰거나 그림을 그렸다. 사실 글씨는 다 쓸 줄 알지만 미대는 어딘가 다를 것 같다는 편견도 있었다.
예전에는 대학 내에 건물 벽화 그림을 많이 그렸다. 요즘은 또 찾기 힘든데, 그간 학생운동을 비롯한 운동진영의 예술 문화는 어떤 변천을 겪었나?
민중미술 초기는 학생운동 위주였다. 80년~90년대 학생운동이 활발해지자, 학교에 벽화를 정말 많이 그렸다. 지금은 인쇄 기술이 뛰어나지만 당시엔 그렇지 않아 학생들이 밤새 걸개 그림을 그리곤 했다. 당시에는 대부분의 작가들이 전시장에 들어가는 작업을 더 선호했다. 그 중 운동 성향의 미술 작가들이 같이 작업하기 시작하면서 민중미술이 자리 잡게 됐다. 예전에는 학생운동 위주의 민중미술이었다면, 지금은 사회로 나온 작가들이 현장에 연대하는 경향이 크다. 현장에 연대하는 작업을 하다보면, 집회 시위에 대한 새로운 형태를 고민하게 된다. 그런 기류를 체감하는 곳이 바로 음악 공연이다. 예전에는 민중가요 장르의 곡을 부르는 사람이 정해져 있었다. 대중음악을 하는 사람이 현장에 연대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하지만 지금은 인디뮤지션도 현장 연대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출처: 김한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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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과 특히 다른 예술 분야가 있다면?
대중음악이다. 2009년 용산참사(경찰특공대가 재개발 반대 시위를 과잉 진압해 철거민 5명, 경찰 1명이 사망한 참사) 때 기획한 ‘라이브에이드, 희망’ 콘서트가 기억난다. 이상은, 킹스턴 루디스카, 브로콜리 너마저 등이 참가할 예정이었다. 라인업을 마무리했는데 가수 이승환에게 “나도 콘서트에 서고 싶다”는 전화가 왔다. 거만했던 나는 “라인업 꽉 찼으니 논의하고 연락하겠다”고 했다. 상황실에 공유하니 난리가 났다. 대중에게 용산참사를 알릴 절호의 기회라면서 시간을 늘려서라도 이승환은 넣어야 한다고. 그렇게 이승환까지 공연을 마치고 일주일 뒤에 또 연락이 왔다. 이승환이 거액의 후원금을 전달하고 싶다는 전화였다.
박근혜 퇴진 촛불 문화제는 내가 기획하지 않았지만, 먼저 연락이 오는 뮤지션이 많았다고 한다. 자리가 없어서 나오지 못할 정도였다. 사실 대중가수로서 집회에 나오는 데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이들이 과거와 달리 스스로 노동자성을 인식한 결과라고 본다.
박근혜 촛불 때 가수 ‘모세’가 ‘사랑인걸’ 노래를 불러 놀랐던 기억이 있다. 이들 덕에 집회 분위기가 좋아진다. 하지만 ‘청와대 진격해야지 웬 노래냐’는 시선도 존재했다.
2008년 명박산성(당시 정부가 광우병 촛불 시위를 고립시킬 목적으로 광화문 광장에 쌓아올린 컨테이너)을 넘으려 한쪽 에선 스티로폼을 쌓고, 한쪽에선 대중가수들이 나와 ‘힘내라 촛불아’ 문화제를 했다. 경찰과 치열하게 싸우던 사람들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이들이 무대 음향 케이블까지 잘랐다. 내가 속한 문화연대는 투쟁에 다양한 방식이 있다고 본다. 뮤지션들은 공연으로 투쟁하겠다는 거다. 이번 박근혜 퇴진 촛불 때도 마찬가지였다. 청와대로 치고 들어갈 수 없는 구조 였다. 당시에 가족 단위 참가자가 매우 많았다. 만약 이들에게 익숙치 않은 과격시위가 벌어진다면 다음 촛불에도 이렇게 많은 사람이 나올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도 있다.
[출처: 김한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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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회 구성이 ‘임을 위한 행진곡–대회사–투쟁사–몸짓패–연대사–결의문 낭독’의 반복인 경우가 많다. 참가자들이 휴대폰만 보는 건 집회가 틀에 박힌 탓 아닐까.
집회 문화를 바꾸려 한 게 ‘희망버스(2011년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에 반대하며 85호 크레인 고공농성에 오른 김진숙 조합원을 응원하기 위한 집회)’다. 희망버스는 노조가 아니라 시민이 기획했다. 희망버스는 초기에 호응을 얻지 못했다. 민주노총에 같이 기획하자고 요청했지만 ‘조합원이 참여할 수 있도록 전달하겠다’ 정도였다. 처음엔 700명으로 시작했다가 나중에 1만 명까지 불어나니 이때부터 노조와 단체들이 조직적으로 붙었다.
희망버스 기획단은 높은 사람을 무대에 세우지 않았다. 당대표, 위원장이 와도 말이다. 국회의원 보좌관이 무대에 세워 달라 부탁해도 거절했다. 우리는 일반 조합원, 시민만 무대에 세웠다. 아래로부터 힘을 모아가는 것이 취지였기 때문이다. 당시 집회 문화의 변화가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
문화예술인으로서 앞으로 집회가 어떻게 바뀌었으면 하나?
나는 축제 같은 집회 시위를 원한다. 재미있는 투쟁이 오래간다. 그래야 대중의 반응을 살 수 있고 결국 이긴다. 노동절도 노동자의 축제인데 신나게 놀지 않는다. 결사항전의 날처럼 결의만 다진다. 우리 사연을 읊는 것보다 재미있는 모습을 SNS를 통해 선보이고, 대중들이 직접 찾아볼 수 있게 하면 된다. 노동자들이 쌓인 게 많아 그렇지만, 사람들은 또 너무 바쁘다. 시스템에 따라 우리도 바뀌어야 하는데 쉽지 않다.
파견미술에 같이 하고 싶으면 미대 나와야 하나?
누구든 참여할 수 있다. 사실 파견미술팀에 미대 출신은 별로 없다. 옆에서 작가와 여기 칠하고 저기 깎으면 된다. 또 아이디어는 누구나 다 낼 수 있다. 아이디어를 실제로 만들면 작품이다. 전공 없어도 된다. 체력만 있으면 된다. 제발 좀 와 달라(웃음).[워커스 4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