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페미니스트, 불꽃페미액션 활동가)
국민청원 ‘낙태죄를 폐지시켜 주세요’가 20만 명을 넘겨 성사됐다. 청와대의 답변도 나왔다. 국가가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 계획을 밝히면서 낙태죄 폐지의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그러나 낙태죄를 규정하는 형법은 1953년 제정된 뒤로는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었다. 이번에도 이런 형법이 바뀌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 긴 싸움을 이어가야 한다. 이 시기에, 우리는 다시 한 번 왜 낙태죄 폐지가 필요하고, 낙태죄가 여성의 삶에,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보려 한다.
누구를 위한 낙태죄?
1960년대부터 자행된 가족계획사업(통칭 산아제한정책)에서 여성은 임신한 아이도 지워야 했다. 많은 여성들은 울면서 강제로 산부인과에 끌려가야 했다. 그 시대에는 산부인과가 어려운 곳이 아니었고, 낙태 수술 버스까지 돌아다니며 마음만 먹으면 인공임신중절이 가능했다. 그 시대 전체 가임 여성의 35%가 인공임신중절을 한 바 있다. 이 많은 여성들 중 모두가 원해서 인공임신중절을 한 것은 아니다.
인공임신중절을 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 또한 자기결정권 침해이다. 사회에서 비혼모를 바라보는 시선, 여성 노동자의 경력단절, 육아 스트레스, 경제적 어려움. 이 모든 것을 고려하지 않은 채로, 태아의 ‘생명권’만을 외치며 낙태죄를 존속하자는 것은 여성의 입장에서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이다. 여성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사회에서 자라며, 그렇게 희생하고 소모되고 차별당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세뇌된 것이다. 사회는 여성에게 인공임신중절을 부추겼다가, 막았다가 한다. 하지만 여성의 입장에서 보면 출산을 해도, 인공임신중절을 해도 행복할 수 없는 상황들이 펼쳐진다. 출산하면 경력단절, 육아 스트레스, 경제적 어려움 등이 있다. 그렇다고 인공임신중절을 하면 윤리적 죄책감이 여성을 짓누른다. ‘살인했다’라는 죄책감을 지우지 못하고 살아간다(물론 이것은 권력자들이 여성을 억압하기 위해 만든 윤리기준일 뿐이다). 어떤 쪽을 선택하든 여성은 상처받는다. 이걸 ‘선택’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선택은 외부의 강압적 요인 없이 자유의지로만 결정할 때 선택이라 할 수 있다. 지금 한국 여성들이 처한 상황은 강제다. 특히 출산 이후의 경력단절에 대한 대안, 육아와 경제지원 없이 여성에게 ‘인공임신중절을 하지 마라’라고 말하는 것은 폭력이다. 여성이 온전하게 자기 삶을 선택할 수 없게 만드는 법으로 된 폭력이다.
여성을 위한 낙태죄 폐지
지난 5년간 80건의 낙태 판결에서 실형이 선고된 사례는 단 1건이다. 낙태 시술을 받던 여성을 사망에 이르게 한 혐의로 집행유예 형을 받은 조산사가 20대 여성을 또다시 낙태한 혐의로 2012년 부산고법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은 사례가 유일하다. 나머지 피고인은 선고유예(51.3%)와 집행유예(36.3%) 등의 처분을 받았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연간 약 17만 건의 낙태수술이 이뤄진다. 기소는 연간 10여 건에 불과하다. 피고인 80명 중 56명(70%)은 의사, 간호사 등 의료진이었다. 대한산부인과의사회에 따르면 현재 국내에서 하루 평균 낙태수술 건수는 3000여 건으로 추정된다. 낙태 사실은 당사자인 여성과 수술한 의사, 상대 남성 등 극소수만 알고 있어 셋 중 한 명이 고소하지 않는 한 드러나기 힘들다. 그래서 고소인은 대부분 상대 남성 또는 남성 측 가족이다. 낙태 사실이 발각되면 여성과 의사는 처벌을 받지만 남성은 수술에 동의했다는 명시적 증거가 없으면 처벌을 면한다. ‘경제적 여유가 있다면 남자에게 낙태 사실을 알리지 말라’는 게 암묵적인 요령으로 통용된다. 하지만 상대 남성의 동의 여부가 확인되지 않으면 수술을 거부하는 산부인과 의사가 많다. 법원도 같은 낙태 여성이라도 남성 측 동의를 받으면 선고유예 처분을 하지만 동의 없이 한 경우 벌금형으로 더 무겁게 처벌한다.
최근 종영한 ‘황금빛 내인생’이라는 드라마에서는 임신한 주인공에게 그의 남편이 ‘너 낙태하면 신고할거야. 그거 불법인거 알지’라고 말했다. 대중매체에서도 낙태죄를 여성협박의 도구로 사용한다. 낙태죄는 신고하지 않는 한 처벌될 수 없다. 즉, 법은 ‘낙태를 한 여성’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인공임신중절을 했고,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의 뜻을 따르지 않는 여성’을 처벌한다. 인공임신중절은 여성의 약점이 된다. 경찰측의 자발적 수사 없이 신고만으로 처벌되는 이 법은 ‘나랑 헤어지면 신고할거다’로 악용된다.
낙태죄 폐지를 반대하는 이들은 태아의 생명권을 외친다. 그러나, 태아의 생명권과 산모의 건강권은 분리될 수 없다. 그들은 한 몸이기 때문이다. 태아를 걱정하기 전에 산모를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출산이 여성의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고민해본 적이 있는가? 지하철 임산부 배려석에 남성만 앉아있는 이 나라에서, 태아의 생명권을 외치기 이전에 산모의 건강권을 한 번이라도 생각한다면 낙태죄 폐지 반대를 주장하기는 어려워질 것이다. 낙태죄 폐지 반대를 외치는 이들은 곰곰이 생각해보자. 과연 자신이 정말 태아의 생명권을 위해 반대하는지, 그저 여성의 목소리가 듣기 싫어서 반대하는지를 말이다.[워커스 4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