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봉주 전 의원의 사건은 3월 22일 김어준의 블랙하우스가 2011년 11월 23일 사진 일부를 공개하면서 진실게임으로 비화되는 듯했다. 방송이후 정봉주 전 의원의 승리(?)를 예감한 지지자들은 2차 가해성 댓글로 온라인을 뜨겁게 달궜다. 진실공방으로 치닫는 정봉주 성폭력 사건은, 일명 ‘불순한 미투’, ‘정치적 공작’의 상징으로 승격되는 분위기였다. 방송 이후 한겨레가 을지병원에 갔다는 주장과 나꼼수의 녹음시간, 민국파가 자신을 수행하지 않았다는 주장 등에서 정봉주 전 의원의 진술이 일관성을 잃고 있다고 지적했지만, 한겨레 보도 역시 프레시안과 한통속으로 도매금으로 넘어갔었다.
맹위를 떨친 김어준의 ‘공작’프레임
논란에 앞서 이미 김어준은 미투운동에 대한 일명 ‘공작’ 예언으로 프레임을 만들었다. 이와 함께 미투운동에 동참한 성폭력 피해자들을 한순간에 문재인 정부와 ‘일명 진보세력’(민주당 친노계 친문계 인사들)을 공격하는 세력으로 몰아갔다. 안희정 전 지사와 정봉주 전 의원의 가해지목 이후, 안희정의 성폭력 피해자, 그리고 정봉주의 성폭력 피해자와 이를 보도한 프레시안에 정파적 의도가 덧입혀졌다. 일명 ‘공작정치’의 프레임은 미투운동을 ‘순수한 미투운동’과 ‘불순한 미투운동’으로 나누고 이 기준에 따라 피해자들을 분류하고 공격하는 데 이용되고 있다. 피해자의 가족은 자유한국당 당협위원장으로 둔갑했고, 피해자는 미투운동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자유한국당의 계략 속에 있다는 근거없는 루머에 시달려야 했다.
전통적인 ‘꽃뱀’ 프레임을 이제 ‘공작’ 프레임이 대체하고 있다. 꽃뱀 프레임은 피해자가 얻을 이익이 없을 경우 어렵사리 부인될 수 있겠지만, 보수진영의 사주로 인한 정치적 의도라는 프레임은 피해자에게 있어 벗어날 수 없는 굴레를 만든다. 경제적 이익과 달리 정치적 이익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결과가 의도를 역규정한다. 보수세력의 정치적 이해에 부합하는 결과가 나타났다면, 의도와 무관하게 정치적 의도로 역규정된다. 그렇게 형성된 믿음은 잘 깨지지 않고, 부인할 길도 증명할 길도 없는 것으로 남겨진다. 안희정 전지사가 성폭력 가해자로 처벌받는다해도 그 믿음은 절대 깨지지 않을 것이다. 만약 프레시안이 명예훼손 죄를 인정받게 됐다면, 정봉주의 가해사실은 사라지고 진영논리는 날개를 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과거의 386세대는 민주화의 과정 속에 기득권 세력이 됐고, 이제 자신이 가진 권력을 가지고 위계와 폭력을 휘두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반응은 과거 운동진영 내 성폭력 사건을 선거 시기 반대진영의 ‘정략적 의도’, ‘정파적 이익’에 따른 활용으로 프레이밍했던 것과 너무나 닮아있다. 운동진영의 도덕성에 흠집을 낸 것은 가해자였지만, 그 비난과 책임은 언제나 이를 제기한 피해자의 책임으로 돌아갔다. 성폭력은 좌우를 가리지 않는다. 소시민부터 사회적 권력층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경험하고 있으며, 운동진영 또는 진보진영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과거 운동진영에서 여성해방=성해방이라는 논리를 활용해 여성활동가들에게 성적 개방을 강제하며 발생했던 성폭력 사건들을 기억한다.
진영논리에서 찾아볼 수 없는 두 가지
‘피해자에 대한 공감’과 ‘자기성찰’
피해자는 스스로를 드러내면서 죄책감과 두려움, 그리고 폭로 이후의 삶까지 생의 전부를 걸고 이야기하고 있다. 폭로에 의해 조직의 명예, 진영의 명예가 실추되었다는 비난에 대한 부담감, 사건해결 과정에서 조직이 와해되거나 사회의 지탄을 받게 될 때, 가해자의 인생을 망쳤다는 비난과 가해자의 자살 등으로 인해 받게 되는 죄책감, 폭로 이후의 사회적 시선, 온라인상의 신상털기와 악성공격, 가해자에 의한 보복의 두려움에 이르기까지 피해자가 감당해야 하는 무게감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다.
폭로 이후 지속할 삶 속에서 피해자로서의 낙인, 회사에서 잘리거나 제 발로 걸어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서 오는 경제적인 문제, 증거불충분 등으로 가해자의 혐의를 인정받지 못했을 때 돌아오는 사회적 지탄과 무고죄의 공격 등도 피해자가 오롯이 직면해야 한다. 우리는 피해자가 감당하고 있는 무게를 얼마나 공감하고 있는가. 이에 대한 공감 없이 어떻게 그리 쉽게 공작을 논하고, 진영논리를 들이대고, 가해자의 인권을 먼저 논하고, 피해자를 꽃뱀이라고, 이별의 보복이라고, 정치적 이용이라고 몰아세울 수 있을까.
민주당계 지지자들에게 안태근은 보수정치세력에 기반한 죽일놈의 가해자이지만 안희정과 정봉주는 진영논리의 피해자로, 오히려 본인과 가까운 모습으로 투영된다. ‘진보세력은 성폭력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성폭력은 장자연 사건의 배후에 있는 보수세력들이나 하는 짓이지’ ‘운동적 진보적 신념을 가진 이들에게서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이 피해자에 대한 무차별적 2차 가해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작동하고 있다. 이는 상대방을 고려하지 않았던 나의 관심과 호의가 어느 순간 ‘성폭력’으로 명명될 것에 대한 두려움과 연결되어 있다. 이들은 역으로 아마도 자유한국당 계열의 가해자가 등장한다면 성누리당, 돼지발정당의 당연한 모습이라며 가차없는 응징으로 맞설 것이 분명하다.
스스로도 인식할 수 없을 만큼 몸에 밴 남성중심성에 대한 인식과 자기성찰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과정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이 생략된 이들에게 미투운동이란, 가해자의 억울함을 증명하고 ‘의도가 불순한’ 피해자의 정치적 의도를 찾아 비난하는 시간으로 채워진다. 자기성찰 없는 문제제기로 미투운동을 폄훼하지 말라. 입과 키보드로 피해자를 거듭 죽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라. 거울 너머로 무엇이 보이는가.[워커스 4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