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건 회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로 당선된 트럼프 대통령은 레이건의 ‘미국을 위대하게’라는 슬로건을 오마주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문자 그대로 ‘다시’ 레이건 시대의 정책을 전면적으로 구사하고 있다. 1980년대 레이건 행정부는 대외적으로 강한 미국을 내세웠지만 대내적으로는 작은 정부론을 앞세워 감세와 규제완화를 강행했다. 미국의 경상수지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1985년 미국 달러화 가치를 30% 절하시키는, 역사상 세계 최대의 인위적인 환율조작 사례인 ‘플라자 합의’를 강제했고, 악명 높은 슈퍼 301조를 발동해 미국 우위의 무역기조를 확대했다. 레이건을 따라 트럼프도 연이은 감세1)와 규제완화, 슈퍼 301조의 부활, 환율조작국 압박, 공기업 민영화2) 등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기 위해 거침없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경제정책은 트럼프의 이미지와 오버랩되면서 마치 신보수주의 시대로 역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시대의 대세인 ‘자유무역’과 일련의 ‘세계화’가 자본의 수익률 증대를 목표로 이루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는 미국 자본의 수익률 증대를 목표로 대대적이고 전면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레이건 행정부의 경제정책이 단순한 보호무역주의가 아닌 것처럼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도 보호무역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더 많은 개방을!’을 외치면서 ‘(미국식) 공정한 자유무역’을 추구하고 있다.
이것이 트럼프 입장에서 미국의 11월 중간 선거를 앞두고 가시적인 정치적, 경제적 효과를 높이기 위한 전략적 행보일 수도 있고, 쇠락한 러스트벨트 노동자와 미국 우월주의에 기반한 백인 남성의 동원전략과 맞물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레이건 회귀’는 단순히 정치적인 계산에 따른 움직임만은 아니다. 2008년 세계대공황 이후로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이를 뒷받침한 자유무역-WTO체제는 사실상 파산했다. 더 이상 이 체제로는 성장을 기대하기 어려운 조건(미국의 성장은 끝났다!)에서 다시 1990년대의 골디락스(이상적인 경제 상황)를 꿈꿀 수 있는 1980년대의 레이건으로 돌아가는 선택을 한 것이다.
적대적-경쟁적 공생관계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기 위해 트럼프는 주적이 중국임을 분명히 했다. 미국 노동자들이 다른 나라 특히, 중국과의 불공정 무역으로 인해 전통적인 굴뚝 산업에서 일자리를 잃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위대해지려면 이런 중국과의 무역을 더욱 공정하게 하고 일자리가 돌아오게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트럼프의 이런 주장은 가짜뉴스 같은 것이다. 경제적으로 볼 때, 미국과 중국 두 나라 모두 상품 수출이 그렇게 사활적인 것도 아니다. 특히 전 세계적으로 제조업 고용율은 계속 떨어지고 있어 상품 수출 비중이 그만큼 줄고 있다. 게다가 미국 제조업의 일자리 손실은 지난 30년 동안 다른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이는 중국 같은 외국과의 무역 거래보다도 자동화를 통해 인건비를 줄이거나 해외의 새로운 값싼 노동력을 이용한 미국 자본의 냉혹한 시도 때문이다.
또한 생산의 세계화 즉 글로벌밸류체인(GVC) 속에서 미국의 수입 증가가 꼭 미국 기업의 이익을 약화시키는 것도 아니다. 2016년 중국 기업들 중 대미 수출을 가장 많이 한 기업은 아이폰 조립 업체인 홍푸진정밀전자로 대만 팍스콘의 중국 자회사다. 팍스콘의 수익은 아이폰 매출원가의 3.5% 정도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대부분 이익을 아이폰 본사가 회수한다. 중국 상무부에 따르면, 외국 기업들의 중국 지사가 중국의 대미 무역 흑자액의 약 60% 가량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3)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중국의 차별적인 기술이전 방식을 문제삼고 이에 대해 개별적인 압박이 아니라 공식적인 폐기를 요구한다면 결국 미국 IT업체들의 이익이 줄거나 생산비가 증가하는 효과가 나타날 게 뻔하다.
다른 한편, 미국이 양적완화를 하고 국채를 발행했을 때, 이를 가장 많이 사준 곳도 중국이다. 중국은 1조1799억 달러(1,300조원)에 달하는 미 국채를 보유하고 있다. 외국 정부가 보유한 미 국채(6조2600억 달러)의 18.7%에 해당하는 규모다. 중국은 미국채를 사들임으로써 재정적자에 허덕이는 미국 정부의 자금난을 덜어주는 역할을 해왔다. 미국으로서는 감세 조치와 재정악화로 더 많은 국채를 발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중국이 국채 매입 대열에서 빠지거나 미국채를 투매하면 국채 수익률이 하락해 매우 곤란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국채 금리를 올리면 시중 금리가 급등할 가능성이 높아 소비와 투자심리가 위축되면서 경제 전체에 위기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중국도 보유한 국채 수익률이 하락해서 앉아서 손해를 보게 되고 미국 경기 하락의 여파로 이래저래 엄청난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이 영향들을 다 알고 있는 두 국가의 갈등이 소위 ‘무역전쟁’으로 비화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미국이 경제적으로든 군사적으로든 중국과 전쟁을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1991년 소비에트 몰락과 같이 스타워즈, 군비경쟁과 같은 방식으로 중국을 무너뜨릴 수 있는 조건은 더더욱 아니다. 현재 미국과 중국은 정치적으로는 대립하지만 경제적으로는 한 몸과 다름없는 적대적-경쟁적 공생관계에 있다.
WTO 없는 무역체제
트럼프 행정부의 레이건으로의 회귀는 단순 복사가 아니다. 레이건 당시와 지금이 다른 가장 큰 환경변화는 ‘달러’와 ‘WTO체제’다. 미국은 1985년 당시 기록적으로 강한 달러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미국 달러화의 30% 평가절하가 먹혀들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현재의 달러화는 다소 높아졌다고 해도 여전히 약한 수준이다. 미국 금리가 지속적으로 인상된다 하더라도 달러의 추가적인 평가절하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래서 더욱 개별적인 통상 압력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 나가려고 한다.
한편, 트럼프 대통령은 선거 당시부터 FTA 같은 자유무역협정은 물론 세계무역기구 WTO도 좋아하지 않았다. 무역을 통해 미국의 역차별을 가중시킨다는 것이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한미FTA 재협상을 선언하고,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협상에서 즉각 탈퇴했다. WTO는 무력화 시켰으며, 현재는 사실상 세계무역기구 WTO가 만들어지기 전 상태로 돌아갔다. 그렇다고 GATT체제로 복귀한 것이 아니라 상품 교역 외에 서비스, 무역, 지식재산권 문제가 주요 의제로 살아 있는 WTO 없는 (무시된) 체제 즉 우루과이라운드(UR)로 복귀했다.4)
2002년 미국 부시 대통령이 철강에 대한 긴급수입제한조치를 발동했을 때, 당시 유럽연합, 중국 등 철강 수출국의 대응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미국과 마찬가지로 자국 철강에 대한 보호조치를 서둘렀다. 하지만 이는 무역보복 조치라기보다는 미국 시장이 닫혀 자국으로 수입이 확대될 것에 대한 방어조치였다. 두 번째는 이 나라들이 WTO에 미국을 제소했고, 2003년 미국이 패소해 철강 관세를 철폐했다. 이때만 하더라도 WTO라는 국제무역질서와 규범이 지켜지고 그 시스템을 통해 갈등을 조절할 수 있었다.
하지만 2009년 공황이 발발하고 난 뒤, 오바마 행정부는 타이어에 대한 세이프가드를 발동해 관세를 부과했다. 그 때도 이 관세가 1930년대 세계대공황 속에서 무역전쟁을 터트린 화약고가 되지 않을까 걱정했다. 중국은 예의 그렇듯이 WTO에 이 문제를 제소했지만 WTO는 이번에는 미국 손을 들어 줬다. 합법적으로 무역보복을 할 수 없었던 중국은 보란 듯이 보복조치에 나섰다. 2010년 미국산 닭발에 100%의 상계관세를 부과하면서 이른바 ‘닭발 전쟁’이 벌어졌다. 미국 오바마 행정부는 WTO에 분쟁 조정을 요청했고 2013년 미국이 승소했다. 시스템은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중요한 변화가 하나 생겼다. 미국이 승소했음에도 2009년 이후로 미국의 대중국 닭발 수출은 거의 자취를 감췄다. 중국이 브라질로 수입선을 바꿨기 때문이다. WTO를 통한 분쟁조정이 사실상 실효성을 잃기 시작했다.
현재의 국면은 중국과 미국이 긴장을 완화하고 불만을 해결하기 위해 WTO를 활용할 의지가 있는지 여부다. 중국도 WTO에 미국을 제소하고, 미국도 중국의 기술이전 문제를 WTO에 제소하기로 했지만 현재 국면에서 WTO는 무역분쟁 해소창구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미중간의 직접 협상으로 갈등을 해결하려고 한다. WTO는 이번 국면에서 개살구처럼 존재 의미조차 희미해진 채 남아 있다.5)
무역전쟁이 아니라 사회전쟁(social war)
자유무역이냐 보호무역이냐는 식의 대립은 허구다. 또한 문제의 시작은 상품관세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보호무역조치로 보이지만 대부분 서비스 시장이나 투자관련 금융시장의 추가 개방이나 지식재산권 보호로 끝을 맺는다. 미국의 경우 무역적자를 빌미로 일부 수입품에 대한 관세를 부과했지만 그 목적은 다분히 상대국에 더 많이 개방하라는 압박이다. 다만 그 수단과 방법을 기존의 다자주의에서 쌍무간 개별협상으로 개방압력을 더 강화하는 것으로 바꿨을 뿐이다. 때문에 어떤 경우든 기존 자유무역의 문제점은 그대로 반복될 전망이다.
OECD와 IMF, 세계은행 등 국제기구에서조차 자유무역과 세계화에 따른 불평등 확대를 우려하는 보고서가 속출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선진국은 물론 신흥국에서도 노동소득분배율은 하락하고 있다.6) 이 노동소득분배율 하락 원인으로 선진국 경제에서는 자동화와 세계화(해외 아웃소싱)가 주요 요인으로 꼽히고, 신흥국 경제에서는 금융통합(금융세계화)으로 인한 폐해가 가장 큰 것으로 나타났다.7)
최근 IMF는 자유무역을 포함한 경제적 세계화(globalization)가 각국에서 실질소득 증가로 이어진다는 것을 발견했지만, 이러한 세계화의 이익이 국가 간 및 국가 내에서 불균등하게 분배된다고 밝혔다. 세계화로 인한 성장은 이미 세계화된 국가에서 더 작고, 세계화가 진행되는 경제에서는 평균 소득 증가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국가 내에서 세계화의 결과로 소득 불평등이 증가해 주로 소득 분배 최상위 계층만이 세계화의 이익을 독차지하고 빈곤층에는 거의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밝혔다.8 자유무역과 세계화, 감세와 민영화는 결코 빈곤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대신 부자를 더 부유하게 만들 뿐이다.
개방압력의 강화, 기업과 부자를 위한 1조5000억 달러의 감세, 1조3000억 달러에 달하는 공기업 민영화와 민간자본 도입 등 자산 가치를 높이기 위한 이 모든 시도는 단순한 자본의 탐욕이 아니다. 글로벌 자본은 과잉되어 있고 생산성 떨어지는 좀비기업들은 청산되지 못하고 연명하며 과잉생산을 부추기고 있다. 이에 따라 자본수익의 총량이 늘어도(=노동소득분배가 악화돼도) 과잉된 자본 때문에 자본의 평균수익률은 떨어진다. 때문에 수익률을 올리기 위한 자본간 경쟁이 가속화 되고 간혹, 전쟁이 난 것처럼 보이기도 하며, 세금을 깎을 수 있는 만큼 깎아주고, 수익이 나는 공공자산을 매각한다. 그러나 결과는 위에서 보듯이 자본이 많은 곳에 더 많은 수익이 나는 것으로 귀결된다.
따라서 때때로 격화되는 무역분쟁은 부자들의 대립이다. 오늘날 세계에 대한 진정한 위협은 무역전쟁이 아니라 부유한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는 공격적 정책에 의해 수행된 ‘사회에 대한 전쟁(social war)’이다. 이것으로 문제를 외국의 이방인들에게 돌리며, 공공부문 약화와 사회적 빈곤을 초래한다. 결국에는 노동자의 패배감을 키워 구조조정과 감세, 민영화 등을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각주]
1) 지난해 말 미국은 기업에 대한 최고 법인세율을 35%에 21%로 내리고, 개인소득세 최고 세율을 39.6%에서 37%로 내려 향후 10년간 1조5000억 달러(약 1,630조원)를 감축하는 감세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더해 트럼프는 중산층과 기업에 새로운 이득을 가져다줄 ‘두 번째 패키지’를 의회와 준비 중이라고 최근 밝혔다.
2) 미국발 대대적인 공기업 민영화도 시작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10년에 걸쳐 모두 1조5000억 달러(1,630조원)를 인프라에 투자하기로 했는데, 이중 1조3000억 달러를 국유재산 매각과 민간기업 투자 유치로 확보하기로 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워싱턴DC 인근 공항 두 곳과 미국 전역의 공항, 도로, 전력회사 등 국유자산을 대대적으로 매각하기로 했다.
3) 중국의 외국 기업들 중에는 대만, 싱가포르 등의 자회사가 상위를 차지하고 정확히 이 기업 상당수가 아마존·델·HP·마이크로소프트(MS)텶BM 그리고 애플사 등 미국 기업의 제품을 만들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4) 레이건 행정부 당시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을 발전시키기 위해 우루과이라운드(UR)를 발족시켰고, GATT체제 하의 상품교역 이외에 미국 주도로 서비스, 투자, 지식재산권이 의제로 들어 왔다. 1993년 UR협상 타결 후, 1995년 1월 UR이행의 감시와 무역분쟁 해결을 목표로 세계무역기구 WTO가 탄생했다.
5) 미국 외교관계협의회(CFR)는 트럼프의 철강·알루미늄 관세가 공식 발표된 지난 3월 8일을 ‘WTO가 사망한 날’이라고 선언했다.
6) 소득분배율은 노동과 자본 간 국민소득분배의 차이이기 때문에 노동소득분배율의 하락은 곧 자본소득분배율이 증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7) https://blogs.imf.org/2017/04/12/drivers-of-declining-labor-shareof-income/
8) The Distribution of Gains from Globalization, IMF working paper, 2018.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