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숙(인권활동가)
산책하며 보게 되는 장소성이 있다. 머무르기만 했던 이는 볼 수 없는. 더 정확히는 움직이는 자가 정주민과 조우했을 때 보이는 것이다.
전주에서 80년 광주항쟁을 읽다
이번 인권여행의 길잡이는 전북평화인권연대의 채민 상임활동가다. 그가 우리를 데려간 곳은 1980년 전두환 정권에 의해 희생된 이세종 열사가 다니던 전북대학교다. 3월이라 신입생 행사가 있는지, 음식부스에 학생들이 모여 있다. 왁자지껄 젊은 웃음소리와 소곤거림이 심장을 뛰게 했다. 소리에서 향긋한 봄내음이 났다. 생동감 넘치는 학생들 사이를 비집고 낡은 학생회관 앞 멈췄다. 4층짜리 건물은 전북대로 들어오던 신축건물과는 달랐다. 건물 앞 바닥에 이세종 열사의 비문이 박혀 있다. 무심코 지나가면 있는지도 모르게 바닥에 바닥처럼 있다. 그의 시신을 발견한 곳이라 했다.
1980년 5월 18일 0시, 그 동안 제외됐던 제주도까지 전국 비상계엄령이 내려졌다. 12·12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 신군부세력은 민주화운동세력을 시급히 진압하려 했다. 당시 학생들도 군부정권의 동태를 파악해서 공동행동을 했다. 이세종 열사는 80년 당시 전남·북대학 연합체인 ‘호남대학총연합회’ 연락책임자였다. 5월 17일 밤 학생들은 전북대 학생회관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이세종 열사는 유인물 인쇄 및 배포를 맡아 제2학생회관에서 철야 작업 중이었다. 그런데 자정이 지나자마자 계엄군이 M16 소총과 긴 곤봉을 들고 학생회관으로 들이닥쳤다. 그는 학생들을 깨워 대피시킨 것으로 전해진다. 그 후 건물로 진입한 7공수 부대원들에 쫓겨 옥상까지 갔다. 그때 맞은 것 때문인지 시신에 멍이 선명했다. 두개골 골절과 내장 파열이 동시에 나타났으니 단순추락사는 아니다. 그러나 경찰은 단순추락사로 발표했다.
“1학생회관이 당시 전북대 정문이랑 가까우니 여기 진압을 먼저 한 거 같아요. 전국에서 계엄상황에 저항하고 있었어요. 이세종 열사는 5월 항쟁의 첫 희생자죠.”
5월 광주항쟁은 광주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계엄군에 맞선 저항은 곳곳에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열사가 광주에서 숨진 것이 아니어서 1994년 민주화항쟁 희생자 신청이 기각되는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1998년 10월에야 광주민주화관련 보상심의회의 결정이 났고 이듬해 4월, 열사의 시신을 5.18묘역으로 옮겼다.
▲ 전북대 [출처: 사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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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90년대 민주화운동의 유산, 벽화
2003년 전북대학교에 세워진 추모비로 향했다. 우리의 눈을 사로잡은 건 추모비 뒤쪽에 보이는 벽화였다. ‘이세종광장’이라고 불리는 곳 뒤편에 있는 건물에는 동학농민혁명의 핵심 인물인 전봉준과 일본군에 맞서 싸우는 민중들이 그려져 있었다. 척양척왜라는 벽화는 전북지역 미술공동체의 첫 작품이라고 한다. 벽화는 80~90년대 민주화운동의 시대적 가치를 문화적으로 표현한 기록이다. 당시 운동세력은 사람들에게 전달할 내용을 벽화나 걸개그림 등으로 표현했다. 요즘은 대학이 건물신축에 열을 올리고 학생운동이 약해진 상황으로 과거 운동권의 흔적인 민중벽화는 보기 어렵기에 우리는 역사적 작품에 연신 감탄했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색이 많이 바랬는데 몇 년 전 다시 작업을 한 것 같다”고 했다. 벽화를 보니 이곳의 학생운동은 지금 어떤지 궁금했다.
“과거와 같은 학생정치조직은 있지 않은 걸로 알고 있어요. 지금은 대학 내에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이 새롭게 커지면서 페미니즘 모임이 있어요. 성소수자 당사자 동아리도 만들어지고. 4월에 성소수자동아리가 퀴어문화축제를 지역시민사회에 제안해서 조직위가 꾸려졌어요.”
독재정권과의 싸움이 중요했던 시기를 지나 일상에서 민주주의를 세우는 싸움이 중요한 시대다. 대학에서 소수자를 차별하는 가부장제도와 싸우는 새로운 동아리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전주에서 번지고 있는 미투운동도 어느 날 갑자기 터져 나온 폭로가 아니라 아래로부터 꿈틀거렸던 운동의 결과가 아닐까.
지키려는 자와 탈환하려는 자의 경합
그렇게 이세종 열사의 추모비를 뒤로 하고 다음 장소로 이동하려는데, 채민 활동가가 잠시 들를 곳이 생각났다며 발걸음을 돌렸다. 이세종 열사의 시신이 발견된 곳인데 그 옆에 멋지게 한자가 새겨진 큰 비석이 있었다. 1934년 친일파인 박기순이 전북대 인근에 덕진공원을 세운 공덕을 기리는 ‘덕진공원지비’다. 공덕비 옆에 친일파인 박기순과 공덕비를 설명하는 팻말이 있었다.
“제가 학교 다닐 때도 이걸 뽑아버려야 하느냐를 갖고 논란이 많았어요. 친일파 공덕비가 학교에 있는 게 화가 나서 학생들이 공덕비에 계란도 던지고 페인트도 던졌어요. 비석에 페인트자국도 보이죠? 요즘은 일제잔재를 남겨서 기억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잖아요. 역사의 흔적을 지우는 것보다 어떻게 기억하냐가 중요한 거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이걸 남긴 건 학교가 잘한 거 같아요. 예전엔 한자로 쓰여 있어서 사람들이 이 비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 많았는데 이렇게 설명을 해놓으니까 역사를 알잖아요. 그런데 친일파 공덕비하고 희생된 사람(이세종열사)의 비가 같이 있으니 느낌이 묘하네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했다. 어쩌면 이곳에 친일파와 저항의 장소가 공존한다기보다, 학생들이 기득권의 장소를 ‘저항의 장소’로 탈환한 것이 아닐까. 장소는 권력투쟁의 장으로서 점거되기도 하고 탈환되기도 하면서 변화한다. 그렇게 시간의 역사가 포개져 장소가 만들어진다. 그러고 보니 전주시 전체가 이러한 탈환의 정치를 보여주는 장소 같았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초상화)을 모신 경기전이 있는 전주는 조선왕조의 건실함을 상징하는 장소다. 그런데 1894년 1월 고부에서 조선의 양민들을 착취하는 양반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이 대규모 농민군을 조직해 봉기했다. 농민군의 강령에는 ‘왜놈을 몰아내고 나라의 정치를 바로잡는다. 군사력으로 권세를 누려온 무리를 없앤다’가 있다. 5월 31일 풍남문에서 만난 동학군과 관군은 군사 행동을 중지하고 대개혁을 추진한다는 내용으로 합의했다.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해 전주화약을 받아낸 것이다.
‘전주제일성’이라는 현판이 있는 풍남문은 관광객이 많이 찾는 한옥마을 근처에 있다. 전주성의 흔적이 남아있는 풍남문에 가보니 동학군에 대한 설명도, 전주화약에 설명도 없었다. 그저 건축양식에 대한 설명과 아름다운 순례길 지도팻말만 덩그러니 서있다. 탈환의 정치를 드러내지 않는 팻말이 아쉬웠다.
그걸 달래기라도 하듯이 건너편 몇 년 전 새롭게 조성된 풍남문 광장에는 소녀상이 있었다. 2015년에 세워진 소녀상에 있는 팻말을 보며 사람들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곳에서 4월 7일에 전주 최초의 퀴어문화축제가 열린다고 하니, 아직 기득권으로부터 장소를 탈환하려는 정치는 끝나지 않았구나 싶었다. 이런 움직임은 전주국제영화제와 한옥마을, 한식 등 그저 관광상품이나 문화로만 우리에게 알려진 이곳의 이미지를 탈각시키고 있었다. 전주에서 숨 쉬며 차별에 저항하는 이들의 장소로 만들어가는 것 같아 가슴이 다시 부풀어 올랐다.
[출처: 사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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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점거한 택시노동자
우리는 전주시청 옆에서 택시노동자의 전액월급제를 요구하며 고공농성 중인 김재주 씨에게로 갔다. 시청광장 옆 25M 하늘 위에 움집 같이 네모난 상자가 떠있었다. 정글 속 나무 위에 달린 움집 같았다. 그곳과 다른 것은 광장 옆이라 휑하다는 점과 정글 속 움집처럼 자유롭게 오르내릴 수 없다는 점이다. 우리가 간 날은 김재주 씨가 고공농성한 지 200일이 되는 날이었다. 그는 좁은 공간에서 움직이지도 못한 채 추위를 견뎌야 했다. 그런데도 우리가 도착하자 그는 손님을 맞이한다며 얼굴을 내밀고 손을 흔들었다.
김재주 씨의 농성을 지원하고 있는 천막으로 갔다. 농성자들이 걸어놓은 현수막이 바람에 팔랑거리고 있었다. ‘사납금제 폐지, 전액관리제, 월급제 쟁취’ 택시 해고자 고병주 씨에게 사정을 들었다.
“전주시장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니까 김재주 동지가 올라갔지요. 두 번째 고공농성이에요. 택시노동자들은 사납금 채우고 나면 가져가는 게 없어요. 30만원, 50만원인 경우가 허다해요. 그걸로 어떻게 생활해요. 2014년에 천막투쟁을 403일 해서 전주시가 전액관리제 시행을 위한 용역을 맡겼어요. 용역결과를 토대로 2017년 1월 1일부터 법령에 준한 전액관리제 시행을 약속했는데 운수회사 운운하면서 지키지 않고 있어요.”
그가 말한 법령은 1997년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을 말한다. 전액관리제가 법에 명시되어 있지만 사납금 제도 때문에 막혔다. 결국 또 김재주 씨는 하늘을 점거하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2017년 9월 새벽, 이삿짐센터 차를 동원해 1평짜리 네모난 움막을 준비해 올라갔다. 지금의 하늘농성장은 좀 크다. 너무 좁아 나중에 플랜트노동자들의 도움을 받아 다시 만든 것이다. 우리는 3월 31일 희망버스 때 오겠노라고 약속했다. 파인텍을 비롯한 고공농성 노동자들이 하늘을 택한 것은 이 땅 어디에도 노동자가 발 디딜 곳이 없다는 호소인가, 아니면 하늘로부터 불의한 땅을 점거하려는 전략인가.
▲ 전주시청 [출처: 사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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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렬 열사 분신 장소 [출처: 사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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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중앙시장 앞에서 만난 2008 촛불
전주시청을 나와 중앙시장으로 가면 2008년 촛불집회가 열렸던 장소가 나온다. 광장은 아니지만 시장이라 유동인구가 많아 집회를 많이 여는 곳이다. 중앙시장 입구 바로 건너편 인도에서 노동자 이병렬 씨가 광우병 의심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며 분신했다. 아무도 없는 새벽이었다.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16일째인 6월 9일 그는 결국 숨졌다. 전국 곳곳에 시민의 건강을 위협하는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집회가 있었고, 전주도 다른 곳처럼 2008년 5월 3일부터 고등학생과 중학생들이 먼저 거리에 나왔다. 전주에서 전국의 분노한 시민들과 학생들이 얼핏 보였다. 정치적 주체로 나선 이들이 만들어낸 장소는 대한민국 그 자체가 아닐까. 이렇게 장소는 주체들에 의해 지역의 경계를 상징적으로 뛰어넘고 있다.[워커스 4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