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민주화항쟁일을 앞두고 광주로 향했다. KTX가 정차하는 광주송정역은 광주항쟁의 중심지인 금남로와 옛 전남도청이 자리한 동구와는 거리가 좀 있었다. 80년 광주항쟁 당시 시민군이 최후 항쟁을 벌였던 옛 전남도청은 아시아 문화예술을 체험하고 교류하기 위한 ‘국립아시아 문화의 전당’이 돼 있었다. 무자비한 전두환 정권의 학살에 맞서 광주시민이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끝까지 저항한 역사적 장소라는 걸 상상하기 어려웠다.
노무현 정부가 광주시를 문화도시로 만들겠다고 공약한 후 아시아문화의 전당 논의가 본격화됐다. 건립 후보지로 옛 전남도청 건물을 지정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광주민주화단체를 비롯한 시민사회의 반발로 건물 일부만 없애고 리모델링했다. 결국 별관이 원형을 조금 남기고 2015년 11월 25일 아시아문화의 전당이 개관했다. 원래 옛 전남도청 건물은 본청뿐 아니라 별관, 경찰청, 민원실 등 6개 동의 건물이 있던 큰 공간이었다. 지금은 도청건물 중 맨 앞줄의 건물을 동강 내 가운데에 네모난 뼈대만 남은 3층 높이의 텅 빈 철근 구조물만이 있었다. 뒤쪽 건물이 보이도록 지은 건축물이라고 한다.
건물을 바라보고 철근구조물 옆 오른 편에는 ‘5.18 최후항쟁지! 옛 전남도청’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그 전엔 현수막이었는데 최근에야 글씨를 새겼다고 한다. ‘문화전당역(1호선)’이란 전철역이름도 광주항쟁과는 거리가 멀어 의아했는데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까지 들었다. 그럼에도 문화와 역사가 각기 따로 노는 듯한 기괴한 느낌이었다.
왜 정부는 광주민주항쟁의 역사적 장소에 아시아문화의 전당을 만든 것일까. 옛 전남도청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에 지어진 코린트식(그리스 신전의 기둥양식) 건물로 건축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건물이어서 택했다고 하는데, 역사는 희미해져 있었다.
흔적을 지우자 진실이 왜곡됐다
“복원이란 것은 20년, 30년이 흐르더라도 사진을 보거나 공간에서 설명을 들었을 때 그걸 느낄 수 있어야 하는 곳이 돼야 하는 거죠. 그런데 지금은 설명해줘도 그게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어요. 80년 5.18 당시를 상상할 수 없는 공간이 돼버린 거죠.”
옛 전남도청을 함께 돌고 난 후 광주에서 인권활동을 해온 최완욱이 내뱉은 말이다. 그는 광주에서 나고 자랐는데 5.18 당시 고등학생이었다. 전남도청 건너편 상무대 근처에 자전거를 타고 나왔다가 공수부대에게 잡힐 뻔했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했다. 금남로에 공수부대가 총을 등에 멘 채 몽둥이를 들고 도로를 가로막고는 쿵쿵 소리를 내면서 도로를 왔다 갔다 했던 걸 봤다. 밤에는 총소리가 진동했다. 천문학도가 꿈이었던 그의 삶이 바뀌었다. 군인들이 시민들에게 총구를 겨누는 세상에서 별을 보는 게 사치라고 여겨졌다. 시민들은 총알을 막겠다고 창문에 이불을 덧댔다. 이불 솜 안으로 총알이 돌아다녀 사람이 총에 맞는 걸 피할 수 있다는 소문에 집집마다 창에 이불을 걸었다. 일종의 민간요법이었다. 무장한 국가폭력을 기껏 이불로 막는 민간요법이라니. 참담했다.
그는 옛 전남도청 건물이 복원돼야 사람들이 국가폭력의 실상을 몸으로 느끼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래야만 광주항쟁 당시에 광주에 있었던 사람들과 아닌 사람들의 간극을 넘을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지금 옛 도청 건물은 미니어처마저 없어 당시 분위기를 상상하기 어렵다고 했다.
“도청이 아시아문화의 전당으로 리모델링하기 전에는 복도에 서면 현장감이 생생했어요. 지금처럼 잘린 복도가 아니라 긴 복도니까. 창문 한 칸으로 시민군들이 밖을 쳐다보고 있었겠구나. 6동이나 되는 그 큰 건물에 얼마 안 남은 시민군들이 느꼈을 고립감과 불안감, 그 결기를 상상할 수 있지. 그런데 지금은 너무나 깨끗하게 정리가 돼서…. 그 현장감을 말로 설명한다고 이해할 수가 있나.”
그래서 옛 전남도청 안에는 2016년 9월 10일부터 전남도청의 복원을 요구하며 광주시민사회가 농성을 하고 있었다. 600일이 넘었다. 오월어머니회 사람들을 만나 얘기를 들었다. 오월어머니회는 광주항쟁 당시 희생자들의 어머니나 아내, 형제자매들의 모임이다.
최혜선 사무국장은 어머니들이 농성하는 이유를 “역사의 현장을 살려서 후대에 이런 불행한 일들이 없게끔 하고, 죽어서 자식을 만나면 니그가 지키고자 했던 것을 남기고 왔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고 한도 풀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는 아직도 광주항쟁의 진실이 덜 밝혀진 데다 이를 왜곡하고 폄훼하는 사람도 있어 진실이 수면 아래로 완전히 가라앉아버렸다고 했다. 보수정권 기간 동안 진실을 말하는 사람들을 잡아가니 거짓이 진실을 대신했다. 광주 항쟁에 대한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한 지만원이나 희생자를 조롱하고 시민을 폭도로 묘사한 일베의 이야기가 사실처럼 떠돌고 있다. 지난 1월에 새롭게 발표된 미국의 중앙정보국 CIA의 비밀정보문건에도 북한군의 개입이 없다고 나왔으나 가짜뉴스는 보수언론을 통해 확산되고 있다. 흔적을 지우면 기억도 왜곡되는 법. 오죽하면 학살자 전두환이 5.18회고록을 책으로 발간하겠는가. 지만원과 일베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해 재판 중이지만 조롱한 그들의 편의만을 봐주는 재판부 덕에 어머니들은 부산으로 서울로 분주하게 움직였다.
임근단 어머니는 5.18 첫 희생자인 아들의 죽음에 대해 말했다. 묘지번호 1-1 김경철. 아들은 자기 아들을 낳은 지 100일이 지났을 즈음 친구들과 놀러 나간다더니 시신으로 돌아왔다. 차마 눈으로 볼 수가 없었다. 아들의 머리는 두 동강이 나고 눈이 튀어나와 있었다. 어떻게 죽었는지는 최근에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가 다시 발간되면서 구체적으로 알게 됐다. 식당에서 밥을 먹고 나오다가 공수부대의 곤봉에 맞아 쓰러져 통합병원에 이송돼 죽었다며 어머니는 눈물을 쏟아냈다. 임근단 어머니는 스물여섯에 죽은 아들의 아들인 손주를 직접 키웠다. 최근 진실이 더 밝혀지면서 유족들의 트라우마가 심해지고 있지만 진실이 밝혀지고 역사로 남겨져야 죽어서 아들을 편하게 볼 수 있을 거라 했다.
헬기사격이 드러난 전일빌딩과 망월동 묘역
광주항쟁 38주년이지만 아직 진상규명은 충분하지 않다. 책임자 처벌이 되지 않고 있어서다. 헬기사격 등 새롭게 진실이 밝혀지고 있지만 발포 명령체계와 명령자·헬기사격·전투기 출격 대기, 민간인 학살 규명 및 암매장 발굴 등이 남아있다. 최근엔 여고생 집단성폭행과 시위에 참여한 전남대 학생에 대한 성폭행 증언까지 나오고 있다. 환한 대낮으로 끌어내야 할 묻힌 아픔과 은폐된 5.18국가폭력은 아직 많다.
우리는 5.18 당시 시민들이 시신을 확인할 수 있도록 관을 두었던 옛 전남도청 건물 건너편 상무대 건물로 향했다. 그저 평범한 체육관이지만 시신이 놓였던 장소여서인지 한기가 돌았다. 진상규명은커녕 명예회복도 되지 않는 현실 때문인지도 몰랐다. 바로 건물을 나와 뒤에 있는 전일빌딩으로 갔다. 최근 헬기 총격 사실이 밝혀진 곳이다. 90년대만 해도 육안으로 볼 수 있을 만큼 총탄자국이 선명했다는데 지금은 건물 안 기둥에서야 진한 총탄 자국을 볼 수 있다.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부상자 규모는 3,000명이 넘는다.
우리는 5.18 희생자들이 묻힌, 두 개의 묘역이 있는 망월동으로 갔다. 당시 실종자를 포함해 사망자는 350명에 이른다. 망월동은 북구에 있어 차를 타고 한참을 갔다. 80년 당시 공원묘지에 묻혔다가 1997년 신묘역으로 이장됐다. 현재는 ‘망월동 민족·민주 열사 묘역’으로 조성돼 2015년 민중총궐기 때 물대포에 쓰러진 백남기 농민과 김남주 시인의 묘도 있었다. 그 옆 신묘역엔 ‘518국립묘지’가 있었다. 들어가는 입구부터 대칭형의 큰 탑은 국가권력의 냄새를 풍겼다. 국가폭력으로 희생된 묘역에 국가권력의 냄새라니, 씁쓸했다.
폭력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다
서구에 위치한 광주광역시청에서 지방정부와 맞서 싸워야했던 청소노동자를 만났다. 공공운수노조 광주전남지부 광주시청공무직지회 부지회장 이매순은 2007년 해고에 맞서 동료들과 함께 한 투쟁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신청사로 이사온 지 3년만인 2007년, 근로시간도 안 지키던 시청은 갑자기 계약만료라며 집단 해고 통보를 했다. 3월 7일 저녁 박광태 시장 면담을 요구하며 3층 복도에 24명의 여성조합원들이 연좌를 했다. 그러나 시장은 볼 수 없었고 퇴근했던 직원들이 다시 나와 조합원을 끌어내려고 했다. 순간 불안해져 동료들과 웃옷을 벗고 속옷만 입고 시위를 했다. 설마 여성인 우리 몸에 손을 못 대겠지 했으나 착각이었다. 그들에겐 노동자들의 저항을 쉽게 짓누르는 노하우가 있었다. 직원들은 이불로 한 명씩 감싸 2층에 있는 세미나실(현재 특별보좌관실)로 끌어냈다. 조합원들을 끌어내기 전 복도에 걸린 그림이 손상될까봐 그림을 먼저 뜯어냈다. 조심조심 그림을 뜯어내던 때와는 달랐다. 그림만도 못하게 취급받는 사람…. 눈 내리는 다음날 아침, 그들은 시청 건물 밖으로 쫓겨났다. 공교롭게도 3월 8일 세계여성의 날이었다.
7보1배로 망월동 묘역까지 행진하는 등 오랜 투쟁 끝에 2009년, 그는 원래 일하던 시청으로 복직됐다. 하지만 관리자들은 노조활동을 하는 이매순을 빨갱이라며 따돌리게 했다. 군부독재에 저항한 시민들을 빨갱이로 몰며 학살한 정권과 흡사했다. 그는 광주학살은 나 같은 경우와 비교되지 않는다며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너무 희생이 많아서 안타깝지만 5.18때는 광주가 하나 돼서 싸웠죠. 그런데 우리는 주변 사람들한테 뭐 하러 싸우냐고, 다른 데 들어가지 그러냐는 소리를 많이 들었어요.”
정신이 퍼뜩 들었다. 우리가 국가폭력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양상만 다르기 때문만은 아니구나. 우리가 고통 받는 자, 싸우는 자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때 권력의 폭력은 개인이 피하려면 피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국가는 그걸 관행처럼 저지른다는 것을. 아직 폭력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