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르릉. 알람소리에 황급히 일어나 구로공단으로 간다. 구로동맹파업의 주역 중 한 사람이자 가리봉전자에 다녔던 성훈화 구로동맹파업동지회 회장. 그리고 26년째 구로에서 활동하는 문재훈 남부노동상담소 소장이 오늘 인권여행의 길잡이다. 약속 장소는 마리오아울렛 사거리, 일명 ‘구로동맹파업 사거리’라 불리는 곳이다. 지금은 ‘마리오 갔다 마리오 갔다 마리오 갈까?’라는 광고문구가 더 강렬하다.
마리오아울렛 사거리에 가려면 지하철 1호선과 7호선 환승역인 가산디지털단지에서 내려 4번 출구로 15분 정도 걸어오면 된다. ‘가리봉역’에서 ‘가산디지털단지역’으로 바뀐 지 오래지만 아직도 낯설다. 어느 이름이 익숙한지만 봐도 그 사람의 연령대와 역사를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수출산업공업단지개발조성법에 근거해 1965년부터 생성된 구로공단은 ‘수출의 다리’가 있을 정도로 수출비중이 90%에 달하는, 70년대~80년대 산업화의 주요 축이었다.
함성도, 꽃잎도 기억 속에
우리는 어떤 흔적도 남아있지 않은 사거리에서 구로동맹파업 얘기를 나눴다. 대우어패럴 담장의 넝쿨 장미가 예뻐서 공장에 들어간 노동자도 있다는데, 지금은 꽃잎 하나 남아있지 않다. 지금의 마리오아울렛에 효성물산이 있었고, 건너편 롯데시네마가 있는 곳에 대우어패럴이 있었다. 마리오아울렛 사거리는 당시 대우어패럴과 효성물산이 마주 보고 있어 물리적으로도 동맹파업의 효과가 드러났다. 서로의 파업을 보며 힘 받고 춤추고 노래하며 싸우던 곳이자, 노동자들을 지지하던 수많은 연대자들이 함성을 외치던 장소! 구로동맹파업 당시 스물두 살이던 성씨는 가리봉전자에 다녔다. 노조 대의원이 된 지 한 달밖에 안됐고, 3교대를 하고 있어 당시 이 상징적인 공간에 설 수 없었다며 아쉬워했다.
구로동맹파업은 섬유업종인 대우어패럴노조에 대한 탄압에서 시작됐다. 1985년 6월 22일 임금인상 투쟁을 준비하던 대우어패럴 위원장 등 노조간부 3인이 구속되자 이에 대항해 파업이 일어났다.
대우어패럴만이 아니라 효성물산, 가리봉전자, 선일섬유 노조가 동맹파업에 나섰다. 남성전자, 세진전자, 롬코리아 노동자들은 작업 중 농성을 벌였고, 삼성제약 조합원들은 점심식사 거부 투쟁을 했고, 청계피복노조는 지지선전물을 배포했다. 지역노동자들과 연대 온 학생들은 가리봉오거리에서 가두투쟁을 벌이며 “구속자 전원석방, 노동운동 탄압중지, 민주노동운동을 짓밟는 모든 악법 즉각 철폐”를 외쳤다. 단위 사업장을 뛰어넘는 대정부 투쟁이었다.
노동자에게 파업은 설레는 일
우리는 스물두 살의 나이로 돌아가 가리봉오거리를 지났고, 가리봉전자가 있던 서울시 녹색산업지원센터까지 걸었다. 대부분 바뀐 건물들 사이로, ‘가리봉 의원’만이 옛날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가리봉오거리에는 남부순환도로로 이어지는 고가차도가 있는데, 그곳은 80년대부터 90년대 초반까지 가두투쟁이 벌어지던 자리다. 문 씨는 “30초만 벌어주면 데모가 시작되거든. 도로 위에 몇 명이 올라가서 화염병을 던져 교통을 통제하면 돼. ‘흔들리지 않게’라는 노래의 앞부분만 부를 수 있으면 성사되는 거지.” 구로동맹파업 때도 노동자들이 그 도로에 누워 연좌농성을 하다 모조리 잡혀갔다.
이십대에 잠깐 구로에서 활동했던 나도 추억에 젖어 가리봉시장에 들렀다. 지금은 감자탕 골목에 감자탕집은 한 곳 뿐이고, 곱창집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현재 주민들 중 이주노동자가 90%라는 걸 반영하듯 중국어로 된 간판이 대부분이다. 구로단지에서 일하는 중국인, 재한중국동포들이 많아져서다. 과거 근처에 살던 노동자들이 먹을거리며 입을 거리를 사던 시장인데, 현재 옷집은 보이지 않고 이불집 하나만 남았다. 이곳에서 대우어패럴 권영자 씨는 파업 전날 옷을 샀다. 문재훈 씨는 구로동맹파업 영상에 혼자 작업복을 입지 않아 눈에 띄던 권 씨에게 연유를 물었다. “영자가 총파업이니까 뭐를 할까 생각하다가 시장에 가서 옷을 하나 샀대. 파업이니까 이건 생일과 같은 거라고. 노동자에게 파업은 제2인생의 생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즐겁고 그랬겠지.” 그러자 성 씨가 말을 잇는다. “나도 시작할 때는 설레고 그랬지. 무섭기는 했지만 설렜지. 계속 우리가 싸워서 이겼거든. 진 경험이 별로 없었거든. 그렇게 처절하게 끝날 거라고 생각을 못했어.” 구속자 43명, 불구속 38명, 구류 47명, 해고 1500여 명 이르는 대규모 탄압을 말하는 거다. 해고 후 그도 취업이 어려웠다.
시장 옆에는 장애인복지관이 있고 마리아의 전교자라는 수녀원이 있는데 그곳에선 수배당한 노동자들을 많이 숨겨주곤 했다. 그 뒤로 가면 쪽방촌, 벌방이나 닭장집이라고도 불리는 곳이 있었다. 좁은 공간에 한 가족이 살기도 했던 닭장집은 건물 하나에 수십 명의 노동자들이 살아 선전물을 돌리기에 좋았다.
씁쓸한 마음을 뒤로 하고 가리봉전자가 있던 곳으로 옮겼다. 2000년대 초반까지 있었던 사회과학서점인 공단서점은 지금은 중고품매장으로 바뀌었다. 1공단으로 갈수록 건물이 높아지고 번쩍번쩍해진다. 아직 그대로 있는 건 만민중앙교회다. 공단에 교회 설립은 불가능하나 어떤 이유에선지 공단에 큰 교회가 섰다. 그에 대해 문 씨는 “구로공단의 3대 마술사가 있어. 공단에 상업시설이나 교회가 못 들어오는데 들어왔어. 이마트도 그렇고 마리오아울렛도 생산시설이 아니니까. 편법으로 들어와서 계속 유지했지. 마리오아울렛은 법 때문에 처음에 생산업체인 척 건물 안에 미싱 몇 개를 두기도 했어.” 이윤이 줄어든 자본이 제조업을 그만두고 부동산 투기나 상업시설을 들여와 돈을 버는 것이라 했다. 전국 공단 곳곳에서 벌어지는 이른바 ‘공단구조고도화’의 실체다.
높은 빌딩들은 ‘생산형 공장이 부동산건물 기업으로 성장한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업종이 섬유에서 전자, 그리고 지금은 IT산업으로 바뀌고 공장도 아파트형 공장으로 변화됐지만 고용이 늘어난 것은 아니다. 게다가 이주노동자들과 IT노동자들은 70년대처럼 저임금에 시달리고 있다. 구로공단의 업종이 변화되면서 노동조합이 깨져 노동조건의 하락도 막을 수 없었다. “구로공단의 치명적 요소가 일반 조직률보다 낮다는 거거든. 3%도 안 될 걸. 다른 덴 10%는 되거든. 노동자들이 집단적 대응을 못 한 지 십 수 년 된 거지.”
가리봉전자가 있던 서울시 녹색산업지원센터 앞에 도착하자, 성씨는 파업을 결의하던 때의 감동을 떠올렸다. 당시에는 여러 노조 활동가들이 소그룹으로 세미나도 하고 집행부끼리 모임도 있었다. 대우어패럴 노조위원장이 잡히자 함께 교류하던 노조는 동맹파업을 결의했다.
“70년대 노동조합들이 어떻게 깨졌는지, 노동자들이 학습을 통해서 알고 있었던 거예요. (사업장별로 싸우면) 똑같이 깨지니까 다 같이 싸우자고 결의한 거죠. 대우어패럴 노조간부가 잡혔다, 이건 민주노조가 깨지는 위기다, 이렇게 터지나 저렇게 터지나 문제니 같이 싸우자. 파업을 하자고 했는데 모두들 그러자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마음이 통했을 때 떨리고 너무 행복한 거예요. 다른 데는 아침에 파업을 했다면 우리는 3교대니까 아침에는 못하고 아침 조 퇴근하는 애들하고 오후 조 출근하는 2시부터 했어요. 야간조 애들은 못 들어오고.”
성 씨가 노조활동을 열심히 하게 된 계기는 친하게 지내던 서울대 학생출신인 조합 활동가와 얘기하면서다. 그는 “노조운동은 쟤가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해야 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가리봉전자는 당시 첨단산업에 가까웠다. 임금도 섬유업종보다 나았고 취업문턱도 고졸 이상만 뽑을 정도로 높았다. 섬유업종인 대우어패럴 노조탄압에 함께 할 수 있었던 건 학습만이 아니라 업종과 사업장을 뛰어넘어 같은 노동자라는 의식, 민주노조 사수라는 의식이 강해서다. 지금처럼 업종과 산업별 노조의 벽이 두껍진 않았다.
부조리한 구조에 맞선 연대
문재훈 소장이 있는 남부노동상담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시 언덕을 내려와 가리봉오거리를 지나 예전 삼립빵 공장이 있던 곳으로 갔다. 남부노동상담소는 최규석의 만화 <송곳>의 모델이기도 하다. 우리는 걸으면서 배신한 구로노동운동 출신 정치인 얘기도 하고, 부동산으로 돈을 번 대륭전자에 관해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들은 ‘안개 낀 노동운동의 현실’이라는 주제로 모아졌다. 성 씨는 옛날보다 지금이 더 노동운동 하기 어려운 때가 된 것 같다고 했다. 예전에는 싸울 대상도 분명했고 노동자도 같은 모습이었고 노동자 내부의 차별이 심하지는 않았다고. “(노동자 모두) 다 발전한다고 했는데 어느 순간 보니 모두 바닥에 있는 현실”이라고 하자, 문 씨가 맞장구를 쳤다. “기륭전자가 싸웠을 때, 이소선 어머니, 조영선 변호사, 김정대 신부 모두 놀랐지. 70년대랑 다를 게 없는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현실에. 이게 2000년대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냐고. 파견 같은 비정규직은 죽는지도 모르게 죽게 만드는 꼴이니까. 비정규직 문제와 이주노동자 문제를 빗겨간 노동운동은 겉핥기지.” 마침 기륭전자가 있던 공장자리를 지나칠 때였다.
그는 구로에서 인권의 장소라고 할 만한 곳이 어디냐고 묻자 기륭전자라고 답했다. “연대자들이 자발적으로 왔을 뿐 아니라 연대를 통해 기륭전자 노동자들이 여성문제, 성소수자문제를 깨닫게 됐으니까. 그 전에 기륭사람들에게 여성문제 공부하자고 해도 관심 없다고 했던 사람들인데 연대 온 사람들을 통해 계급구조만이 아니라 차별의 사회구조를 자각하게 된 거야.”
나는 계급과 성, 이주노동 등에 대한 고민을 안고 겨울을 앞둔 구로를 빠져나왔다. 우리 사회는 언제 착취와 차별의 구조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