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 풍경
2009년 이후 미국의 실업률은 10%에서 2018년 4월 3.9%로 하락했다. 일본은 상황이 더 좋다. 경제 회복에 힘입어 지난해 말 일본의 실업률은 2.8%로 자연 실업률(완전고용 상태의 실업률)인 3.6%를 밑돌았다. 실업률이 낮아져 노동력에 대한 수요가 많아졌으니 임금도 오르고 물가도 올라야 한다.1)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미국도 일본도 실업률이 낮아졌지만 임금이나 물가가 오르기는커녕 정체상태거나 더 낮아지고 있다. 미국의 인플레이션은 그동안 연준 목표치인 2%에 못 미치는 낮은 수준을 유지해왔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인플레이션율도 그렇지만 임금도 2009년부터 2017년까지 연평균 0.1% 오르는 데 그쳤다.
실업률이 개선돼도 임금과 물가가 오르지 않는다는 것은 일자리가 생겨도 정규고용 형태가 아니라 비정규직, 임시직 같은 불안정 노동이 확대되고 있다는 의미다. 그에 비례해 임금수준도 정체 내지는 하락한다. 또 다른 측면에서 이 같은 임금상승 없는 경기 회복은 노동자에 대한 초과 착취를 통해 자본의 수익성을 개선시키려 하는 것이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시간이 갈수록 고용상황이 악화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2008년 세계대공황과 경제의 디지털 전환에 따라 노동공급의 하방 압력이 강화되고 있다. 노동소득의 중간층 일자리가 사라지고 저소득 일자리가 늘어나고 있다. 그에 따라 노동력 재편이 현재 전세계적으로 광범하게 일어나고 있다. 신규 일자리가 축소됨은 물론 더 불안정하고 유연한 일자리가 생겨나고 있다. 또한 사기업, 민간부문의 고용창출 능력도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다. 국제적으로 독립계약자, 자영업자의 폭발적인 증가는 기업 고용창출 능력의 저하를 그대로 보여주면서 고용에서 밀려난 사람들의 생계 유지를 위한 삶의 치열함을 보여준다.
소득주도 성장과 노동유연화
정부의 소득주도 성장은 임금 소득의 향상을 통해 총수요를 늘리고 이를 기반으로 생산 확대와 소득 확대를 이루는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임금소득의 향상을 위해서는 기업이 성장해야 하고 기업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노동유연화를 해야 한다. 여기서 노동유연화는 정규고용을 줄이고 노동시간과 임금 변동성을 확대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상황에서 노동유연화는 임금을 줄이게 된다. 임금을 올리려면 노동력 가치를 올리고 노동보호를 강화해야 한다. 즉, 정부는 어떤 방패든 뚫는 창과 어떤 창이든 막는 방패, 이 둘을 양손에 들고 소득주도 성장을 외치고 있다. 이런 모순을 해소하려면 기술혁신을 통한 고도의 생산성 향상이 필요하다. 생산성이 어마무시하게 올라 더 잘 팔리는 양질의 제품을 더 많이 생산해야 더 많은 임금을 받는 게 가능해진다. 정부가 이른바 혁신성장(박근혜 정부 당시 이 구호는 창조경제였다)에 목을 매는 이유다.
지난 5월 17일 혁신성장 보고대회에서 정부는 스마트공장으로 2022년까지 7만5천개의 일자리를 새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스마트 공장 도입에 대해 “전체적으로 불량률과 생산시간은 각각 45%, 16% 단축됐고 기업당 2.2명의 일자리가 늘어나는 효과가 있었다”고 설명한다. 이에 따라 스마트 공장 2만개를 지으면 모두 4만4천명의 일자리가 늘어나고 여기에 솔루션, 장비 공급업체까지 감안하면 총 7만5천개가 생긴다는 것이다. 노동시간은 줄고 일자리가 늘어나니 스마트공장은 그야말로 꿈의 공장이다. 그러나 정부의 이런 주먹구구식 계산을 검토할 필요도 없이, 스마트공장과 사실상 같은 산업단지 구조고도화 사업만 봐도 실상을 알 수 있다. 산업단지 구조고도화 사업도 고부가가치 첨단산업 육성을 목표로 이뤄졌지만, 일자리는 오히려 감소했고, 그나마 있는 일자리도 파견직으로 대체되면서 노동의 질이 저하했다.2)
또한 정부는 자동차업계에서 수소차 개발 관련 신규고용인력이 올해만 3,500명에 달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노동부가 5월 13일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자동차 업종의 취업자는 전년 같은 달보다 8.1%(3만2천여 명) 감소했다. 구조조정과 판매부진에 따른 영향이다.
현 경제상황이 회복국면인지 하락이 시작되는 국면인지에 대한 논쟁이 있지만, 적어도 호경기에서 고용상황이 이 정도라면 다시 침체에 빠지는 시점에서 고용문제가 어떤 혼란을 야기할 것인가는 짐작할 수 있다. 정부는 2022년까지 혁신성장으로 30만개의 일자리를 창출하겠다고 하고 있으나, 최근 조선업과 해운업 구조조정으로 30여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소매업 증가가 이런 일자리를 대체했다고 하니, 앞서의 설명과 같이 구조조정 등으로 쫓겨난 사람들이 자영업자가 됐다는 얘기와 같다.
이 같은 상황이 계속되면 민간기업의 고용은 계속 줄고 그나마 있는 일자리는 더욱 불안정해진다. 기업 고용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더 많은 자영업자가 돼서 금융기관에 빚을 내 한 집 걸러 치킨집, 커피숍을 운영하다가 파산하는 운명을 맞게 된다.
노동시장 국유화(labor market nationalization)
때문에 고용 문제를 시장에만 맡길 수는 없었다. 거의 모든 나라에서 장애인과 여성 등 사회적 약자의 고용의무제, 고용할당제, 고용 보조금 및 해외 이주노동자에 대한 고용허가제와 같은 노동시장 개입 조치를 진행하고 있다. 최근에 이런 형태의 국가개입은 더욱 강화되는 추세다.
사우디아라비아는 2009년 이후 5% 이상의 높은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실업률은 10.5%에서 12.2%로 오히려 증가했다. 특히 청년실업률은 매우 높아 30% 이상의 실업률을 보였다. 2011년 튀니지의 청년 실업자인 부아지지의 분신으로 ‘아랍의 봄’ 투쟁이 일어나자 사우디는 청년과 자국민의 실질 고용을 강화하기 위해 ‘니타카트(Nitaqat)’라는 새로운 의무고용제도를 도입했다. 기존의 의무고용제도인 ‘사우디제이션(Saudization)’에서 더 나아간 니타카트는 전국의 모든 기업을 대상으로 기업 규모별 업종별로 사우디인 의무 고용을 4가지 수준(Red, Yellow, Green, Blue)으로 구분하여 위반기업에 대해서는 사업면허 취소, 외국인 노동비자 갱신 중단 등의 처벌을 강화하고 있다. 이후 3단계에 걸쳐 자국인 고용비율을 높이고 자국인의 임금 수준과 사우디 여성 노동자 고용비율 등과 같은 질적 평가도 강화해 나갔다. 이를 노동시장 ‘국유화’ 또는 ‘현지화’라 부른다.
사우디의 이러한 노동시장 국유화 정책은 전체 생산가능 인구의 1/3 이상이 해외에서 유입된 이주노동자들로 구성되고, 민간기업 고용의 80% 이상이 이들 이주노동자로 이뤄진 특수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다(어느 나라나 고용구조는 특수하다). 사우디아라비아, 바레인, 오만 등 걸프협력회의(GCC) 국가에서 이와 유사한 노동시장의 국유화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3)
이런 국유화 정책은 노동과 고용을 시장에 맡기거나 고용지원에 머무는 대책으로는 현재의 고용상황을 개선할 수 없다는 점을 반증한다. 중동 국가의 특수성에 기인한 측면도 존재하지만 통제 불가능한 형태로 치닫고 있는 고용 상황에서 이에 대한 국가 책임과 사회화를 더욱 촉진하는 사례로 볼 수 있다.
고용 보장(job guaranteeing)
2020년 미국 대선을 준비하며 민주당 대선 유력 주자들은 너나없이 고용보장을 핵심정책으로 내놓고 있다. 이들은 미국 연준이 실업률 추락을 방어하지 못했고 10% 이상 추락한 실업률 정상으로 돌아오는데도 10년이나 걸렸다며 미국의 경제성장이 멈춰 있는 현재 상황에서 국가의 적극적인 고용보장 정책으로 이를 타개해 나가자고 주장한다.4)
코리 부커(Cory booker) 연방상원의원은 연방고용보장법(Federal Jobs Guarantee Development Act)을 발의했다. 연방정부의 고용보장에 앞서 노동부가 15개 지역을 선정해 3년 동안 그 지역 모든 성인의 시간당 임금을 최소 15달러로 보장하며, 가족병가 수당과 의료혜택을 보장하는 시범사업을 하자고 제안했다.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은 전국 2500개의 고용센터(job center) 설립을 포함하는 고용보장 프로그램을 제시한다. 길리브랜드(Kirsten Gillibrand) 워렌(Elizabeth Warren) 연방상원의원도 고용보장에 대해 지지하고 나섰다.
윌리엄 대러티(William Darity) 듀크대 경제학 교수는 연방정부가 고용을 보장하면 일 하려는 모든 사람이 일할 수 있게 돼 실업률은 제로가 된다고 주장한다. 고용보장은 정부가 단순히 일자리 수를 늘리는 고용지원정책과는 다르다고 강조한다. 국가에 의한 고용보장은 민간의 나쁜 일자리를 몰아내는데, 누구든 그보다 더 좋은 조건의 일자리를 구할 수 있기 때문에 나쁜 일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고용보장은 연방정부를 수백만 수천만 명의 미국인의 고용주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경제학자들은 노동부가 육아와 돌봄 영역, 인프라 구축, 커뮤니티 일자리 은행(community job banks)과 같은 일자리 창출 영역에 투자하라고 권고하고 있다.5)
기본 소득 아닌 기본 일자리(basic job)
기본 소득은 현재의 자본주의 경제상황에서는 가능하지도 유의미하지도 않다. 기본 소득도 시장 상황에 긴박되어 있기 때문에 불황과 위기 국면에서 오히려 기본소득은 더 축소될 수밖에 없다. 가령 모든 복지 프로그램을 폐지하고 기본소득으로 일원화하는 우파식 기본소득은 기본소득이 아니라 소득보조에 불과하다(그나마 이것이 현실적이다). 아무리 환상적인 재원들을 얘기한다 하더라도 자본이 과잉인 상태에서 자본의 평균수익률이 저하하고 있는데 법인세든 소비세든 세금으로 기본소득의 필요한 재원을 마련할 수는 없다. 기본소득의 현실적 경로는 노동력 가치하락에 따라 다수의 노동자를 빈곤선 주변에 머물게 하는데 일조할 뿐만 아니라 장애인 등 사회복지의 집중적 관심이 필요한 계층에 대해서도 (필요한 만큼 기본소득이 주어지지 못하고 기존의 사회복지는 폐지 또는 축소되기 때문에) 빈곤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기본소득이 아니라 불황과 구조조정, 불안정 노동 속에서도 고용이 이뤄질 수 있는 국가 책임하의 고용보장과 기본 일자리를 형성해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정부가 예산을 들여서 ‘공공근로’를 확대하는 것이 아니다. 중동 국가나 미국 민주당에서 구상하는 고용보장 정책은 시장의 노동력 수급에 대한 일종의 조절자(automatic stabilizer)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 또한 기본소득과 마찬가지로 궁극적으로 시장 상황에 긴박될 수밖에 없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유가하락은 당장 니타카트 정책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고, 미국 경기가 수축하거나 연방정부의 세입이 줄어들면 고용보장 정책의 재원마련에 큰 애를 먹게 된다.
기본 일자리(기본 고용)는 민간기업에 대한 고용의무를 더욱 강력하게 부여하는 시장 조절 기능이나, 이와 연동된 고용보장 정책으로는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결국 산업의 핵심구조를 국가와 사회 부문이 유지 운영해야 한다. 최근 경제성장 측정과 관련하여 국제적으로 논쟁이 되고 있는 가사노동과 같은 (교환가치가 아니라) 사용가치를 가지는 노동에 대한 재생산 구조를 갖고 경제의 독점 부문과 산업의 핵심구조를 국가와 사회가 유지 운영하는 질적인 전환이 동반돼야 한다. 기본 일자리, 고용의 사회화는 생산과 경제의 사회화라는 구조개혁의 전제 아래에서 현실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워커스 43호]
[각주]
1) 이를 주류 경제학에서는 필립스 곡선(Phillip’s curve)이라 부른다. 실업률과 임금상승률(또는 물가상승률) 간에 반비례 관계를 설명하고 있고 국가의 실업률과 물가상승률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지표로 사용되고 있다.
2)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99786
3) Enforcing Nationalization in the GCC: Private sector progress, strategy and policy for sustainable nationalization
4) https://www.npr.org/2018/05/08/609091985/likely-2020-democraticcandidates-
want-to-guarantee-a-job-to-every-american
5) https://www.vox.com/policy-and-politics/2018/4/20/17260578/corybooker-
job-guarantee-bill-full-employment-darity-hamilt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