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동진(워커스 자문위원)
시대의 변화가 느껴지는 요즘이다. 무엇이 변하고 있는가? 일단 ‘정치’가 변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 문재인 정부의 등장은 단지 ‘이명박-박근혜 10년’이란 민주주의의 후퇴를 멈췄다는 것에 있지 않다. 이것은 한국사회 ‘지배적 정치세력’의 교체를, 주류 정치 세력이었던 ‘반공반북 보수지역주의 정치세력’의 시간이 끝났음을 의미한다. 충남을 토대로 한 ‘자민련’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듯이, 각각 영남과 호남을 기반으로 한 정치세력의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아 보인다. 유력 보수지의 한 언론인은 지금의 시간을 ‘혁명’이라고 부르며, ‘죽을 수도 있을 것 같다’고 탄식한다. 6월에 치러지는 지자체 선거는 그것을 보여주는 역사적 시간이 될지 모르고 2020년 총선은 이를 확인하는 시간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이 과정이 순탄치는 않을 것이다. ‘지자체선거-개헌투표’ 동시 진행을 통해‘정치세력의 교체’를 ‘헌법의 수준’에서 확인하려던 시도가 일단 무산된 것처럼 말이다. 그 기간 동안 지배정치세력은 끈질기게 살아남아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한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도 있다. 이들 존재의 ‘풀뿌리’는 현재도 그러하듯 ‘종교’라는 울타리에서 자양분을 공급 받을것이다. 과거에는 이들이 ‘개발과 성장’이라는 비전이라도 제시했었지만, 지금은 최소한의 비전과 전략도 제시하지 못하고‘막말’과 ‘혐오’를 자신의 ‘브랜드’로 고착화하고 있을 뿐이다. 전가의 보도로 휘둘렀던 ‘반공반북’이라는 약의 효능도 이젠 떨어지고, 퇴행의 상징이 됐다.
그리고 또 하나, 한국사회에 흐르던 ‘전쟁의 시대’가 ‘평화의 시대’로 변하고 있다. 이 시간의 흐름이 어디에서 시작됐는지에 대한 논란을 제쳐둔다고 해도 한반도에 존재하는 두 국가가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고, 잠시 전쟁을 멈추었던 시대에서 이제는 ‘평화’를 통해 ‘상호인정’의 시대로 흐르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물론 이 흐름의 방향과 속도를 결정하는 힘이 아직도 두 국가 ‘내부’보다는 ‘외부’에서 더 강력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이 흐름이 과거의 경험처럼 다시 거꾸로 흐를 가능성도 없지 않다. 하지만, 어느 때보다 ‘내부’의 동력이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그 흐름을 거꾸로 돌리는 것은 두 국가 모두에게 불행만 안겨줄 테다. ‘단계적 비핵화’니, ‘선비핵화 후평화’니 하는 논란은 이러한 대세 속에서 일어나는 자그마한 파문으로, 현명하게 대처해 나갈 것으로 기대해 본다. 하지만 이 같은 ‘평화의 시대’가 ‘통일은 대박’이라는 노골적인 욕망을 표출하는 흐름으로 이어지고, 다수 인민의 삶은 ‘미니잡’을 안고 살아가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민족은 하나’가‘평화의 시대’를 맞이하는 구호인지도 지극히 회의적이다.
경제와 노동의 시간은
이러한 시대의 변화 속에서도 여전히 ‘삶’은 바뀌지 않는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라는 ‘신분과 계급’의 존재는 변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돼야 하는 것으로 당연시 되고 있다. 성소수자와 여성에 대한 차별과 혐오의 시정은 ‘지금 당장’이 아닌 ‘나중’의 일로 치부되고, 장애인과 가난한 이들의 차별과 고통의 삶도 ‘예산’이라는 벽을 넘지 못한다. 이전 정권에서 ‘알박기’한 사드기지의 건설도 주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 중이다. 이미 파산선고를 맞은 ‘신자유주의의 망령’은 한국사회를 떠돌며 아직도 강력하게 그 힘을 발휘하고 있다. ‘사람이 먼저다’라고 외친 정부에서 그러하다. 인민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경제와 노동의 시간’은 이전과 같이 흐른다.
위와 같은 ‘시대의 변화’와 ‘삶의 변화 없음’이 ‘오른쪽날개’만으로 날았던 대한민국이란 새를 ‘좌우 날개’로 날아가는 새로 바꿀 수 있을지도 미지수이다. 왼쪽 날개는 미약하고, 그나마 여기저기서 틔운 그 씨앗마저 생명력을 이어가기에 힘겨운 실정이기 때문이다.
다만 온갖 폭력과 차별 아래에서도 숨죽여 왔던 세상의 절반이 기지개를 켜고 ‘미투’로 자신의 목소리를 외치고 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허용하지 못 한다’고 일갈했던 기업총수의 앞마당에서도 수십 년 만에 ‘민주노조’의 깃발이 당당하게 올랐다. 이들에게서 왼쪽날개의 씨앗이 뿌리내려야 할 곳이 어디인지, 그리고 무엇을 향해 가지를 뻗어야 하는지를 직감할 뿐이다.[워커스 4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