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권이 위기라는 말이 떠돈다. 남북 관계의 해빙에도 악화되는 사회경제적 문제가 그 진원지다. 그 중심에는 노동자들의 고단한 삶이 있다. 문재인 정권과 집권 여당은 ‘위기론’을 인정하지 않지만, 사회경제적 문제로 지지율이 하락하고 있다는 해석에는 주목하고 있다. 위기는 ‘헤게모니의 균열에 따른 정치적 딜레마’의 표현이다. 그렇다면, 이 ‘위기론’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하고 있는 지금의 현실은 문재인 정권의 위기가 시작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신호일 수 있다.
과연 그 국면에 진입했음을 드러내주는 더 확실한 징표는 없을까. 이런저런 사회경제적 통계지표를 근거로 제시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위기를 평균화된 기호로 치환한다는 점에서 적절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한 지표조차도 울퉁불퉁하게 진행되는 계급투쟁과 그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다양한 투쟁의 산물, 즉 정치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더 강력한 징표가 있다. 그것은 노동운동에 대한 태도 변화다. 1987년 노동자투쟁 이후를, 아니 김대중과 노무현, 이명박과 박근혜 정권의 역사를 대강 뒤돌아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지배 블록 안에서 어떤 위기론이 부상하는 시기에는 항상 노동자 계급과 그 운동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억압적 대응이 수반됐다. 그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는 특징은 ‘민주노조운동’을 ‘빨갱이 세력’으로 간주하는 수구정치세력의 공세에 거리를 두던 자유주의정치세력이다. 그들은 슬그머니 뒷자리로 다가가 ‘공감의 메시지’를 보내다가 어느 순간 전면에 나서 ‘반노동’의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다.
자유주의 정치세력은 지난 대선과정에서 노동계의 지지를 얻고자 수구정치세력이 민주노총을 경제위기의 주범이라고 역설한 것을 비판했다. 집권 이후에는 1년만 더 참고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민주노총에 ‘분노와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다. “민주노총과 전교조가 더 이상 사회적 약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청와대 비서실장의 발언은 노무현 정권시기의 언술을 재탕하고 있다. 자유한국당의 얼굴마담 격이 “민노총과의 결별을 각오하고 노동개혁에 과감히 나서야 한다. 청와대 일각에서도 말했듯이 민노총은 더 이상 약자가 아니다”라고 호응한 것 또한 마찬가지다. 더불어민주당, 자유한국당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좌우가 이른바 ‘민주노조운동’에 공조해온 오랜 관행을 다시 확인해주고 있다.
하지만 이처럼 반복되는 역사의 궤적을 반추하다 보면 자괴감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정작위기에 빠져 있는 것은 문재인 정권이 아니라, 민주노총이라는 결론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념, 조직적 수준에서 자유주의정치세력으로부터 자립하고자 한 목표가 시나브로 희미해지면서 점차 하나의 관료조직으로 변한 민주노총의 역사적 궤적. 그것은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헤게모니 아래 더욱 깊숙이 포섭되는 정치과정이었다. 급기야 지난 대선에서는 문재인 후보에 대한 지지를 공공연히 조직하는 것조차 방치되는 상황에 이르렀고, 그에 대해 의미 있는 어떤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 노동자투쟁의 산물인 민주노총의 강령과 규약이 사문화된 지는 이미 오래다.
11월 21일 총파업에 앞서 민주노총, 금속노조 등은 탄력근로 기간확대 저지와 ILO핵심협약 비준, 노동법 전면 개정, 제대로 된 정규직 전환 등을 요구하며 강력한 투쟁을 벌여나가겠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그것이 용두사미가 되리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적지 않다. 그 요구들이 오래 전부터 제기된 것들이기에 그런 것만은 아니다. 싸울 때 싸우지 않고 타협하는 민주노총, 타협해야 할 때 굴종하는 민주노총의 행태, 즉 정치력이 빈곤하거나 부재했던 민주노총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편향들이 일상화된 조직에서 어떻게 현재-미래의 희망이 싹틀 수 있겠는가. 문재인 정권, 특히 기업하기 어렵다고 투정부리는 자본이 민주노총 없는 경제사회노동위 테이블에 앉아 초조해 하지 않는 이유다. ‘시간이 약이다.’
오랜만에 총파업의 돛을 올리고 적극 투쟁하겠다고 외치는 민주노총에는 안타까운 말일 수 있다. 그러나 지금 민주노총이 신자유주의 지구화 시대의 노조운동을 대표할 수 있는 성격, 위상을 담보하고 있는지, 향후 그렇게 할 수 있는지 여부에 관해서는 회의가 적지 않다. 그럼에도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조직의 부재는 민주노총의 ‘관료적 생명’을 더 연장시켜 줄 것이다. 그러한 딜레마적 상황은 ‘87년 체제’의 핵심, 즉 ‘보수 자유주의-수구 세력들이 지배하는 정치체제’가 유지되는 한 계속 재생산될 것이다. 그럼에도 거기에 매달려야 하는 노동대중들의 상황은 노동운동의 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단도직입적으로 ‘노동적폐’를 확대 재생산하는 한 축이 신자유주의 좌파인 자유주의 정치세력이라는 점을 자기화하지 못하는 조직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 신자유주의 정치세력의 집권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해 놓고 집권한 그들이 신자유주의 노동개혁을 추진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고 투쟁하는 것이야말로 희극 아닌가. 그런 그들에게 ‘노동적폐의 청산’을 요구하다가 그들이 돌아서자 ‘노동적폐와 한패’라고 비판하는 행태야 말로 지금까지 민주노총이 노정해왔던, 그렇기에 청산해야만 할 ‘짝사랑 관행’ 아닌가. 그것은 재벌해체를 주장하면서도 보수자유주의와 수구 정치세력들을 관통하며 작동하는 그들의 물질적 역량, 정치력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 본질적으로는 ‘총자본으로서의 국가’를 특정 정권과 동일시하며 거기에 자신의 기대를 투사하는 주의주의적 조합주의, 대리주의의 극치 아닌가.
투쟁 그 자체는 싸움을 벌이는 주체들의 인식, 인정 여부와 무관하게 내적 동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렇기에 그 내적 동력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없는 이들이 주도하는 투쟁은 결국 대중에게 허무함과 그에 따른 고통을 배가시켜 줄 뿐이다. 정치, 조직, 투쟁 노선 등이 빈곤하고 부재한데, “적폐 청산, 노동기본권 보장, 비정규직 철폐, 최저임금법 원상회복, 재벌개혁” 등을 아무리 외치고 저항한다 한들, 그것이 의미 있는 진전으로 이어질 수 있겠는가. 그 시대의 과제를 조직적으로 담보하지 못하는 주체가 그런 성과를 가져왔다는 예는 그 어떤 운동의 역사에서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민주노총, 금속노조 등이 철저하게 자신을 정치와 민주주의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언제 볼 수 있을까. 회의적이지만, 이번 총파업이 그 어떤 조그만 계기라도 되길 기대했다. 민주노총, 금속노조 등이 보여 온 그 동안의 행태와 무관하게 이번 총파업에는 고통 받는 기층 노동대중의 절절한 삶의 요구와 투쟁 의지가 담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