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윤(문화사회연구소)
2015년 이른바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부터 페미니즘 관점의 웹툰이 부쩍 많아졌고 동시에 독자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일각에서 이야기하듯 ‘페미니즘 웹툰’의 시대가 온 것이다. 그런데 오늘 소개할 「코믹스 페미니즘」의 저자 갱과 박희정은 ‘페미니즘 웹툰’이라는 표현 대신 다소 애매한 듯한 ‘웹툰 시대 여성만화’라는 용어를 쓰는 게 옳다고 주장한다. 여성이 생산하고 여성이 수용하는 만화라는, 다분히 포괄적인 용어를 선택하겠다는 이야기다.
어떤 용어를 선택할 것인가는 언제나 중요한 문제다. 그것은 일종의 선긋기이며, 따라서 선의 안과 밖을 가르게 된다. 선을 크게 그려도 문제가 될 수 있다. 많은 걸 포괄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많은 걸 이야기해야 하는 부담을 짊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한정된 지면의 논문이라면 더 없이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굳이 여성만화라는 용어를 선택했다.
저자들은 ‘페미니즘 웹툰’이라고 별도의 장르처럼 호명하면 “여성만화를 둘러싸고 존재하는 다른 차별들”에 대해 말할 수 없는 효과가 생긴다고 말한다. 이 말을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 모르겠는데, 페미니즘 웹툰으로 분류되기 힘든 ‘여성만화’들의 성정치적 의미와 도전적 결들을 놓치게 된다는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런 맥락에서 저자들은 자신들의 작업을 두고 페미니즘 웹툰으로 운운되는 만화들을 “여성만화의 흐름 안으로 돌려놓는 작업”이라 선언하고 있다.
그렇다면 저자들은 어떤 식으로 여성만화의 역사를 다시, 그리고 새로 쓰고 있는 걸까. 간략히 이렇게 볼 수 있겠다.
1. 과거 순정만화를 중심으로 한 장르적 관습은 독자들의 취향과 여성들의 삶을 로맨스 중심으로 끌고 가는 효과가 있었다. 작품 속 여성들은 그런 한에서만 의미 있는 캐릭터가 될 수 있었다.
2. 후기-자본주의적 특징이 본격화되고 만화 장르 내에서는 웹툰 시대를 맞이함에 따라, 여성만화에서도 순정만화적 관습을 깨는 움직임들이 나타났다. 물론 그와 같은 전환이 순조롭기만 한 것은 아니어서 젠더 권력을 인식하거나 재현하기까지 일련의 과도기적 동요가 동반되기도 했다.
3.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부터는 젠더 권력과 가부장제적 폭력 구조 문제가 작품 전면에 등장한다. 이와 같은 변화는 ‘창작-수용-비평의 여성문화(공동체)’의 장구한 도전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것이 바로 ‘여성만화’를 역사화함으로써 얻어낼 수 있는 교훈이다.
과거로 돌아가 1990년대. 저자 갱과 박희정은 순정만화 관습에 대한 명시적 도전들이 있었음을 일러둔다. 물론 그보다 훨씬 거슬러 올라가면 순정만화 자체는 이전 시기와 달리 여성들의 문화적 소비와 욕망을 실현시킨 해방적 의미를 가진 것이기도 했다. 다만 그 안의 ‘소녀성’과 로맨스는 해방의 미완성을 보여주는 요소들이었다. 따라서 1997년 여성만화를 표방한 잡지 ≪나인≫의 등장, 그리고 이 흐름을 이어받은 것으로 평가되는 2004년의 여성만화 프로젝트 ‘두고보자’의 비평적 시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저자들에 따르면 이들은 그간의 순정적 요소들로부터 단절하기 위한 도전이었다. 정확히 말한다면, (순정만화는 나름의 역사적 의미가 있는 것이기에 그 자체로 존중하되) 순정만화로 등치시킬 수 없는 여성만화들에 대한 생산과 비평을 확대하자는 문화적 실천이었던 셈이다.
저자들은 2015년 이후 소위 페미니즘 웹툰의 등장이 이와 같은 역사적 실천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때로는 명시한다. 이것은 이전부터 존재했지만 대다수가 무심코 지나쳤던 것에 대한 새로운 ‘발견’일까, 아니면 존재했든 존재하지 않았든 이전부터 있었던 것이라고 말해야만 하는 당위적 ‘주장’일까. 저자들은 1990년대의 여성만화, 웹툰 시대 초기의 여성만화, 페미니즘 리부트 즈음의 여성만화들을 펼쳐놓으면서 ‘여성만화’의 도전적 역사를 서사화한다. 그런 점에서 그들의 설명논리는 ‘발견’의 역사기술에 가까워보인다.
역사성을 발견한다는 것은 어떤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것일까. 저자들이 발견한 여성만화의 역사를 따라보자. 이들은 최근의 여성만화가 순정만화라는 틀을 깨면서 등장한 논점으로 다음 세 가지에 주목한다. 로맨스에 빠진 여성이 아니라 ‘일하는 여성’이 등장했다는 점, 외모를 성적 가치로 삼는 ‘사회적 환경’을 다루기 시작했다는 점, 그리고 로맨스의 보조적 장치에 불과하던 ‘성폭력’ 상황을 문제적 상황으로 재현했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이런 변화들은 1990년대 이후 한국 여성들의 삶의 처지가 바뀌기 시작했음을 반영하는 표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작가들 그리고 그들에게 모종의 압력을 행사하는 독자와 비평가들이 무언가를 집합적으로 소망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요소들이기도 하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누누이 하는 말이지만 모든 예술적 재현은 현실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 현실에 대한 소망을 (종종 전도된 형태로) 재현할 따름이다.
그와 같은 소망들이 가부장주의적인 제약 또는 젠더 권력에 의해 때때로 굴절을 겪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예컨대 일하는 여성이 가족 내의 여전한 성차별로 온전히 독립적 주체가 되지 못한 채 좌절한다든가, 화장과 맨얼굴을 강요하는 이중잣대에 잠시 동안 번민에 빠진다든가, 성폭력 상황을 예외적 상황으로 오인하면서 젠더 권력 문제를 간과한다든가 하는 경우들이다.
그런 점에서 저자들이 다루는 2015년 이후의 작품들(여성 노동에서의 <어바웃 블랭크>, <혼자를 기르는 법>, <회사를 관두는 최고의 순간>, 외모 차별사회에서의 <화장 지워주는 남자>, <내 아이디는 강남미인>, 성폭력 담론에서의 <아, 지갑 놓고 나왔다>, <그래도 되는가>)은 이상과 같은 이데올로기적 제약을 헤집고 나온다는 점에서 여성만화의 이상적 전망에 가장 가까운 작품들에 해당한다. 대략 이런 식이다. 이들 각각은 끝없이 자기계발하라는 지배적인 노동윤리를 떨치고 일상적 시공간의 자기윤리에 충실하려는 삶의 전망을 제시하고, 이른바 ‘여적여’(여자의 적은 여자)를 뛰어넘어 서로에게 손길을 내미는 여성들 간의 연대를 보여주며, 가부장제 규율이 ‘상호 연결된 힘들의 체계’이고 현실에는 사법 정의가 부재하다는 사실을 간파한다.
저자 갱과 박희정 역시 인정하는 것처럼, 이렇게 젠더 권력에 대한 인식과 재현이 가능하게 된 데에는 무엇보다 (창작-수용-비평의) 여성만화 생태계의 형성이 가장 중요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지난 십수 년 동안 여성만화 작가들의 명시적 도전이 없었다면, 그리고 비평가들의 프로젝트가 없었다면, 그리하여 어떤 해석적 언어를 가진 독자 대중의 출현이 없었다면 오늘날 여성만화의 우세종으로서 페미니즘 웹툰이라는 현상이 출현할 수 있었을까.
그런 맥락에서 이 논문은 여성만화뿐만 아니라 (여성문화 공동체의 효과로서) 오늘날의 페미니즘 정치가 역사적으로 형성됐음을 은연 중 강조하는 작업으로도 이해될 수 있겠다. 저자들 덕분에 우리는 현재를 설명할 또 다른 언어를 가지게 되었다.
웹툰 신고 하고 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