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20년이 된 것 같다. 어머니가 신용불량과 파산이라는 ‘경제학적’ 사망 선고를 받으면서 나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가장 역할을 맡게 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는 골다공증과 파킨슨으로 꼬부랑 할머니가 됐고, 올 초에는 낙상으로 척추분쇄골절과 족하수 증세로 (글을 쓰는 시점을 기준으로) 50여 일 동안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 수술 직전에는 섬망이 와서 놀라게 하더니, 세 번의 전신마취 수술 후로는 치매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앞으로 또 어떤 일이 있게 될지 모르겠다. 기적을 바라는 마음과 새로운 삶을 준비해야겠다는 마음이 왔다 갔다 한다. 한번 불안해진 마음은 쉽게 누그러지지 않는다. 오락가락하는 어머니의 정신만큼이나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널뛰기를 반복한다. 이제는 어머니 상태가 어떤지를 구구절절 설명하는 일조차 커다란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병원의 습하고 쎄한 공기는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다.
어쩌면 아주 얄팍한 심정일 수 있겠는데, 나는 이런 일들이 결코 나만의 문제가 아님을 확인할 때 위안을 얻곤 한다. 적어도 ‘왜 나만 이렇게 불행한 거지?’라는 식의 소아적 상태로부터는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문제가 여러 사람들의 문제일 뿐 아니라 한국 사회의 구조화된 문제라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되면 더할 나위 없는 위로가 된다. 무학의 싱글맘, 극빈층 등등의 가족적 배경은 늘 한스러웠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때때로 이런 배경을 일종의 사회적 자원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것 같다. 석사를 받을 땐 도시빈민 문제를 다뤘고, 첫 단독 저서를 낼 땐 청소년 하위문화를 배경으로 했고, 박사논문에선 은연 중 중간계급의 허위의식을 문제로 삼았다.
글쎄, 나만의 독특한 성향인지도 모르겠다. 간호, 간병, 노인, 돌봄, 요양 등등. 어쨌든 나는 나를 괴롭힐 만한 키워드들로 이뤄진 논문들을 찾아보면서 위안을 얻곤 한다. 그러면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척추 뼈 하나가 사라지고 다른 네 개의 뼈마저도 으스러져버린 채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노모. 그리고 그를 돌보게 된 외아들은 이제 어떻게 버텨야 하는 걸까?
1. 일본에서 비혼 남성 가족 돌봄자는 장기불황과 고용 유연화에 따른 남성들의 비혼화, 개호보험제도 시행으로 친자녀의 부모 돌봄 규범이 강화되는 것 등을 배경으로 등장했다.
지은숙의 <부모를 돌보는 비혼 남성의 남성성>(1). 간행된 지 4년이 넘었지만 어떤 울림이 있는 논문이었다. 개호(介護)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곁에서 돌본다는 뜻인데 간병이라는 말을 일본에선 이렇게 일컫는 것 같다. 2015년 일본의 르포 작가 야마무라 모토키(山村基毅)의 저서 『나홀로 부모를 떠안다』가 나왔을 때 제법 화제가 됐던 사실을 기억한다. 당시만 해도 ‘고령화와 비혼 추세가 결합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라는 식의 학문적 호기심 정도만 있었지만, 이번 일을 겪고서야 비로소 절감하게 된다. 깨달음은 늦고 현실은 생각보다 빨리 온다. 흔히들 알고 있듯 일본에서 일어났던 일들은 5년에서 10년 터울을 두고 한국에서도 재연되곤 한다. 굳이 일본이 아니더라도 이미 현실적인 문제이긴 하다. 인구 고령화 추세는 익히 알고 있는 사실과 같다. 비혼율의 가파른 상승세는 비교적 확고했던 한국식 가족주의의 기반을 흔들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가족과 젠더 체계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동안 우리가 알던 언어를 가지고선 더 이상 한국 사회를 살아갈 수가 없게 됐다. 새로운 문법을 익히지 않으면 우리들 개개인이 경험할 위기는 더더욱 가중될 뿐이다.
이번에 소개하는 논문의 저자 지은숙 역시 일찌감치 이 문제에 주목을 해왔던 연구자이다. 노령 부모와 비혼 자녀의 돌봄이라는 주제는 생각보다 많은 이야깃거리를 불러온다. 비혼자는 가족 구조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오히려 원가족에 더욱 얽매이는 기현상이 생긴다. 유병장수하는 노부모는 자녀들 중 누가 돌볼까? 자녀의 배우자보다는 친자녀, 기혼 자녀보다는 비혼 자녀, 정규직 종사 자녀보다는 (시간이 더 많다고 가정되는) 비정규직 종사 자녀, 그리고 성별분업 구조 하에서는 아들보다는 딸이다. 저자는 ‘친족 안에서 노인 돌봄의 배분이 정해지는 알고리즘’을 이렇게 정리한다.
2. 부모 돌봄에 적합도가 높은 자식 순으로 나열하자면, 1순위 비혼 딸, 2순위는 기혼 딸 혹은 비혼 아들, 3순위는 기혼 아들이다. 서열 결정의 주요 요인은 혼인 여부와 젠더다.
저자가 다른 곳에서 지적했던 말마따나 부모 돌봄 문제가 사회 내지 공동체의 사안으로 인식되지 않는 한 가족이 모든 것을 떠안아야만 한다. 그 결과 ‘비혼딸, 기혼딸 또는 비혼아들, 기혼 아들’ 등의 순으로 돌봄이 배분되기에 이른다. 돌봄에서 가족, 젠더, 결혼, 여성, ….
저자에 따르면 나는 2순위 당첨이다. 물론 내 주변 상황은 여전히 낯설다. 병원에 있다 보면 더 절감하게 된다. 침상에는 온통 노인들이다. 그런데 나 말고는 잘 안 보인다. 내 또래의 남성은 의사와 간호사, 조무사 말고는 없다. 못 미덥지만 하루 한시라도 어머니를 간병인에게 더 맡기고 싶은 심정은 콤플렉스 그 자체다. 내가 있어선 안 될 곳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이 논문을 읽고 느꼈던 울림이 바로 이 지점이 아니었을까 싶다. 자칫하면 나는 그만 울화와 나락에 빠질 터였다. 나는 이 과정을 거치면 아무것도 남는 게 없을까봐 두려웠다. 한편으론 그래도 뭔가 다른 기회가 오기도 할 거야 하는 생각이 있었지만 늘 막연한 상태였다. 말 그대로 기적 말고는 출구가 없을 상황. 그 고비에서 이 논문은 ‘남성성’이라는 주제를 건드린다. 논문 말미에서 지은숙은 이렇게 쓰고 있다.
3. 장기간의 돌봄 경험 또한 남성성 형성에서 중요한 영역으로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돌봄 제공이란 수시로 기저귀를 갈거나 화장실에 데려가는 일, 음식을 목구멍으로 넘길 수 있도록 섬세하게 배려하는 일, 몸에 미처 눈치채지 못한 상처가 생기거나 기능 부전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주의 깊게 살피는 일의 끝없는 반복이다. 아들과 부모 간의 신체를 매개로 한 이와 같은 관계맺음이 아들의 생애에서 어떻게 의미화되는지는 흥미로운 지점이다. 이는 과도하게 성애화된 남성성의 형성에 새로운 맥락을 제시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저자 역시 감안하고 있는 것처럼, 가족 내 돌봄 배분의 알고리즘을 보면 기존의 젠더 체계가 구조를 그대로 유지한 채 단지 유연해지고 있을 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다. 남성 중 일부가 돌봄에 참여한다고 해서 성별분업의 기본 구도가 바뀔 것처럼 예단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오히려 가만 보면 상황이 개선되기보다는 더 나빠지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저자 지은숙은 최악의 시나리오로 가고 있는 이 상황을 곧장 결론으로 잇진 않는다. 어찌됐든 지금 상황에서는 남녀 모두 일과 가족을 지켜내기 위해 돌봄을 나누고 있고, 결국 남는 문제는 남성들의 돌봄 결합 정도라고 보기 때문이다. “즉 남성 돌봄자의 남성성이 헤게모니적 남성성에 대안적 남성성으로서 어느 정도 힘을 얻는가가 이 사회적 전환의 성패를 가르는 시금석이 된다”는 것이다.
나는 하나의 출구를 찾게 됐다. 여전히 육체적·정신적 피로에 시달리긴 하지만, 이것이 나 자신의 주체성을 변형시키는 과정임을 진즉에 깨달았어야 했다. 몸소 하나의 역사를 살아가고 있음을 왜 받아들이지 못했던 걸까. 머리가 맑아지자 고민을 사회화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강해지고 있다. 돌봄은 더 많이 민주화될 필요가 있다. 비혼자보다 기혼자가 또는 여성보다 남성이 더 많이 돌봐야 한다는 뜻만은 아니다. 규범과 젠더에 이르기까지 가족과 젠더라는 고리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바꿔내는 것이 그 출발점일 수밖에 없다. [워커스 53호]
(1) 이 글은 『젠더와 일본 사회』(한울아카데미, 2016)라는 저서에 재수록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