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윤(문화사회연구소 소장)
지난 6월 15일 연세대로부터 총여학생회를 사실상 폐지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것도 압도적인 학생 투표 결과였다고 한다.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일이다. 언제나 그렇듯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의 반복과 변주가 계속되고 있다. 왜 대다수 한국인들은 다른 이들이 좋은 권리를 누리는 것 같으면 그 권리를 깎아내리려 하는 걸까. 자기에게도 그런 권리를 달라고 요구하지는 못할지언정 말이다. 표면적인 이유야 총여 지도부의 소통 부재라든가 특강 강연자 은하선 씨의 반기독교적 행동에 대한 거부감 등이 꼽히는 것 같지만, 사실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다. 이것은 총여학생회에 대한 집단적 도전이라는 것을.
요즘 유행하는 말로 페미니즘 열풍에 대한 백래시일 수도 있을 것이고(‘총여학생회는 페미니스트 집단이야,’), 좀 더 오랜 시점으로 본다면 여성 권익 보호에 대한 반발감일 수도 있을 것이다(‘여성상위시대인데도 여권신장운동이라니, 말도 안 돼!’). 그것도 아니라면 자기가 낸 세금(등록금)에 무임승차자를 태우기 꺼려하는 감정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총학생회도 있는데 뭐 하러 총여학생회를 만들어서 돈 낭비를 해?’). 아마도 진실은 여기 어디쯤 숨어 있을 것이다.
앞으로 20~30대 남성이 어떤 행보를 보일지 염려스럽다. 아직 제대로 재현되지 않고 있는 10대 남성들까지 포함해서도 그렇다. 단적으로 지난 대선에서 20~30대 남성들이 문재인 다음으로 누굴 찍었는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바로 유승민이다. 물론 이것이 곧장 청년 남성들의 우경화를 뜻하는 건 아닐 것이다. 그랬다면 홍준표가 득표율 꼴찌를 기록할 이유는 없었을 테니까. 그럼에도 그들은 여전히 적잖은 사람들로부터 우려를 사고 있다. 대체 왜일까. 대체 뭐가 어떻게 꼬인 걸까.
어쩌면 김수아의 논문「 남성 중심 온라인 커뮤니티에서의 페미니즘 주제 토론 가능성 – ‘역차별’ 담론 분석을 중심으로」《(미디어, 젠더 & 문화》, 32권 3호, 2017년)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다. 부제에 드러나듯 이들에게 공통된 정서는 ‘역차별 정서’다. 남녀차별을 원하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굳이 차별을 시정한다는 명목으로 역차별을 하는 건 반대다. 그건 공평하지 못한 처사이므로, 라는 생각이다. 이들에 대한 김수아의 생각은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되는 것 같다.
- 그들만의 리그에서는 여성들의 경험과 목소리에 공감하거나 경청하는 일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 그들은 남성과 여성이 이미 동등하다고 여기고 있고, 오히려 페미니즘의 부흥 때문에 안 그래도 곤궁한 삶이 더 어려워진다며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
- 이러한 서사는 특유의 반지성주의로 인해 더욱 강화된다. 자신들이 뭘 모르는지 알려하기보다는 이미 알고 있는 것에 자족하기 때문에 상황이 나아질 기미는 잘 보이지 않는다.
공감맹, 구조맹이라는 말이 낯설지 않을 정도로 뭔가 이상한 상황이긴 하다. 개인적으로 요즘 세태 중 한 가지 씁쓸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적잖은 사람들이 똥인지 된장인지를 꼭 경험해 봐야 알더라는 것이다. 오늘날 20대 남성에게 성차별이란 가해 사실보다는 피해 사실로 상상되곤 한다. 남아선호사상을 모르고 성장해온 유년기, (동년배 여성들에 비해) 학력수준이 달려 별다른 보상이나 인정을 받지 못한 청소년기. 실제로 아들이 남녀공학에 진학할 것 같으면 내신 성적이 우려돼 어떻게든 남자 학교에 집어넣으려는 게 요즘 세상 아니던가. 그리고 데이트, 그리고 군대. 이 박탈감을 어쩌면 좋을까. 한마디로 말해, 과거와 다르게 그들은 자신들이 손해 본 기억만 가지고 있다.
그에 반해 남녀 임금 격차에 대한 반응은 이런 식이다. 내가 차별한 건 아니지 않나? 40~50대 남성들한테나 뭐라 그러든가. 왜 하필 우리한테만 이러나? 세대 문제야말로 더 심각한 문제 아닌가! 대학로에 나온 여성들에 대해서는 심지어 이런 반응도 나온다. 성차별은 경력단절로 나타난다면서 30~40대도 아닌 주제에 왜 저리들 설치나? 뭔가 왜곡된 페미니즘 아닌가! … 실제로 이런 생각을 해본 독자들이 분명 없지 않을 것이다. ‘요즘 말을 못 해서 그렇지, 여자들이 너무 심한 거 아냐?’ 그렇지만, 여기 김수아의 일침을 들어보라.
우선, 그들이 신봉하는 팩트라는 게 얼마나 불철저한 것인지에 관한 문제. 지배질서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을 때 이런 언어들은 종종 정상적이지 않은 목소리로 분류된다. 이런 목소리들은 그들의 팩트주의 체계에 들어설 자리가 없다. 예컨대 여성들이 유아기 시절부터 자기 신체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단속해야 했고 지금도 그런 항시적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는 진실은 그들의 세계에서는 결코 번역될 수 없는 이질적 경험에 불과하다. 아무리 팩트더라도 그들의 ‘팩트 체크’에서는 팩트가 될 수 없다. 그런데도 공론장 운운하며 폼 잡는 건 우습기 짝이 없는 일이다.
둘째, 역차별 담론을 정당화하는 피해의식의 허구성 문제. 물론 요즘 세대의 삶이 전반적으로 어렵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소외된 남성 청년의 지위가 여성들의 권리 요구 탓이라는 해답은 번지수를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은 것이라는 지적이다. 준수한 사회성과 공공성을 갖고 있다면 ‘과거의 남성’과 ‘현재의 자신’ 그리고 ‘미래의 남성’이 서로 무관하지 않음을 절감하고 책임의식을 느껴야겠지만, 그들에게서는 그런 식의 연결고리를 쉬이 발견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단지 피해의식 호소에만 급급한 모습들이다.
마지막, 팩트주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반지성주의의 문제. 김수아는 팩트주의와 반지성주의가 하나의 몸통에서 나온다고 본다. “‘팩트’는 사실의 집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공론장 참여자가 바라보는 사회의 현실에 대한 정확성”의 문제다. 즉, (젊은)남성=약자라는 등식에 위배되거나 여성차별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그들의 경험적 체계에서는 어떤 수단을 동원하더라도 팩트가 될 수 없다. 왜? 그러한 사실들은 그들의 관심을 살 수 없고 따라서 앞으로도 알 수 없으며, 결코 알아서는 안 되는 거니까.
이 민망한 세계관은 과연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김수아는 남성=약자라는 담론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입할 시점이 무르익었다고 본다. 그러지 않고서야 그 모든 사회적 조치들을 역차별이라고 튕겨내는 반격을 감당할 수 있을까. 나 같은 피해자한테 왜 이래? 라고 묻는 이들이 자신이 청년 남성인 한 단지 피해자일 수만은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인정할 수 있을까.
어쩌면 김수아가 은연중 내비치듯 이와 같이 뒤틀린 인식은 지난 시기 양성평등론이 선사한 트로이 목마의 실체일지도 모르겠다. 좋아보여서 갖고 왔는데 결과적으론 ‘성인지’ 관점의 답보 및 퇴행을 가져오고 우리들 중 상당수로 하여금 양성적으로만 사유하게끔 유도한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이 모든 질문들을 제기할 수 있을까. 우리는 언제쯤에야 나 자신이 모르는 게 있고, 그 모르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을까. 남성과 남성성이라는 쟁점은 당분간 그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좋건 싫건 당분간 우리들은 뒤틀린 공정성 담론과 역차별 정서, 그리고 반지성주의 등으로 인해 아주 느리게 굴러가는 역사를 살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