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숙(인권활동가)
서울보다 남쪽인 부산은 예상과 달리 공기가 차가웠다. 동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차이로 온도 차가 10도 정도 난다더니, 출발할 때의 서울보다 더 쌀쌀했다. 늦은 봄과 이른 가을 날씨를 하루에 다 겪는듯했다. 부산지역에서 돌아본 장소들의 색깔도 그렇게 차이가 컸다.
이번 인권기행의 길잡이는 부산 장애인차별철폐연대 신수현 대표다. 그는‘부산형제복지원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대책위’ 공동대표이기도 하다. 그와 만난 역광장은 공사 중이었다. 이미 광장 왼편에는 주차장이 세워졌다. 조감도를 보니 광장은 계단식 화단으로 바뀔 예정이다. 부산역 광장은 노동절 같은 큰 집회 시 사람들이 가끔 모이는 장소인데, 이제 그들의 설 자리마저 줄어들 것 같았다. 신 대표는 무엇보다 나무 옆 벤치가 사라지는 걸 아쉬워했다. 큰 나무 밑에 둥그렇게 설치된 벤치에서 더위를 피할 수 있는 자리였다. 여행객들만이 아니라 부산역에 있는 노숙인들을 위한 곳이기도 했다. 남아있는 벤치에는 노숙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신 대표는 혹여 이번 공사가 노숙인을 쫓아내기 위한 미관공사는 아닌지 우려했다.
국가가 만든 납치와 폭력극
형제복지원이 있던 시절, 부산역에서 노숙인이 사라졌다는 지역민의 말처럼 부산역은 소위 부랑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강제로 데려가던 인권유린의 장소이기도 했다. 때로는 옷이 허름하다는 이유로, 때로는 껌을 판다는 이유로, 주민등록증이 없다는 이유로 납치되듯이 끌려갔다. 거기엔 가족과 떨어진 청소년들도 있었다. 내가 만난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도 이곳에서 끌려갔다. 부산역 공안(역에서 안전경비를 담당하는 사람)들은 집으로 연락하거나 파출소로 인계해주지 않고 형제복지원에 연락했다. 단속의 근거는 1975년 제정된 ‘내무부 훈령 제410호 부랑인의 신고, 단속, 수용, 보호와 귀향 조치 및 사후 관리에 관한 업무 지침’이다. 전 방위적인 사회통제를 했던 박정희 독재정권이 만든 훈령이다. 전두환은 1981년 구걸행각이 많다며 국무총리에게 특별지시를 내렸고, 1982년부터 개인이 경영하는 복지법인에 대해 정부가 보조금을 지급하면서까지 부랑인 선도 사업을 했다. 정부는 36개의 부랑인시설에 약 80억 원을 지원하며 납치와 감금, 폭력을 종용했다.
형제복지원에 끌려간 사람들은 생지옥을 경험해야 했다. 부산시 북구(현 사상구) 주례동 산11번지. 1977년 형제복지원 법인은 국가로부터 헐값에 국유림을 매입해 시설을 만들었다. 그곳은 폭력과 강제노역으로 사람들의 영혼까지 무너뜨리는 죽음의 공간이었다. 우리는 형제복지원이 있던 장소로 이동했다. 3,000명이 넘는 사람들을 수용했고 500명 이상이 죽임을 당했던 그 터에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었다. 당시의 흔적을 짐작할 수 있는 곳은 아파트 단지 뒤에 있는 작은 산이 전부다. 그곳에는 공동묘지도 있었고 교회도 있었다. 언덕에 있는 시설에서 바깥세상의 불빛을 보며 세상을 그리워했던 이들을 상상해본다.
작년 피해생존자들은 아파트 단지 입구에 모여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국토대장정을 시작했다. 뜻밖에 아파트 주민들은 피해생존자들을 격려했다. 진상규명을 제대로 해서 자신들이 사는 땅에 묻혔던 억울한 원혼들을 위로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자신들도 마음이 편할 거라며.
처연한 무연고자들의 묘
우리는 기장에 위치한 박인근 일가가 운영했던 중증장애인 시설 ‘실로암의 집’에 들렸다. 그곳은 얼마 전에 폐쇄됐다. 언덕에 요새처럼 세워둔 그곳은 장애인들이 갇혀있던 곳이다. 곳곳에 난 균열을 본 후, 형제복지원에서 희생된 이들 일부가 묻혀있다는 금정구의 영락공원으로 갔다. 사실 형제복지원에서 죽은 사람들의 숫자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어디에 묻혔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부산시공원묘지관리소(현 영락공원 사업단) 매장처리부에 기재된 형제복지원(형제원) 무연고 시신 수는 1986년 기준 23명이었다. 하지만 지난 2014년, 형제복지원이 폐쇄된 후인 1987년부터 1988년까지 2년간 형제복지원 출신 무연고 시신 38구가 가매장됐다는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신 대표는 영락공원 묘는 형제복지원이 부산대에 해부용 시신으로 팔았던 희생자들을 모아둔 곳이라 했다. 공원의 맨 뒤쪽에 합장묘가 있었다. 합장묘가 위치한 곳은 무연고자들의 묘지였다. 20cm 폭의 돌로 만들어진 무연고자들의 묘비에는 이름도 없이 번호만이 새겨져 있다. 번호를 쫓아가면 그 사람이 사망한 장소나 이름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무연고자란 사전적으로는 혈통, 정분, 법률 따위로 맺어진 관계나 인연이 있는 사람도 없이 죽은 사람이다. 홀로 집이나 거리에서 또는 형제복지원처럼 수용시설에서 죽은 사람들이다. 저 무연고자들 중에도 형제복지원에서 탈출하다 죽은 사람들도 있겠지. 형제복지원이 몰래 밖으로 유기해버린 사람들도 있겠지. 무연고자 묘비 옆에 하얀 들꽃과 강아지풀을 닮은 은빛 억새가 손짓하듯 하늘하늘 흔들린다. 우리도 살아있는 사람이었어요, 그렇게 말하는 것 같다. 갑자기 마음속에서 텅텅텅 쓸쓸한 소리가 난다.
부산형제복지원대책위는 명절이면 이곳에서 제를 지낸다고 했다. 한번은 명절을 앞두고 합장묘에서 활동가들과 함께 제를 지내고 있는데 어린아이와 함께 온 남자가 다가오더니 고맙다고 인사를 하더란다. 자기 형이 형제복지원에 갇혔다 죽었다고. 숨소리도 못 내고 폭력에 시달리던 이들은 묘비도 없이 그렇게 묻혀 있었다.
따사롭고 밝은 가난의 모습
우리는 무연고자 묘지에서 느꼈던 처연한 감정을 안고 부산 남구로 이동했다. ‘대연·우암공동체’를 방문하기 위해서다. 유엔 로터리를 지나 부산외국어대학교로 가는 길 중간 언덕을 올라가니 가건물처럼 보이는 네모난 건물에 ‘대연·우암공동체’라고 적혀 있다. 알록달록 사람얼굴도 그려져 있다. 마을회관이다. 손이헌 공동체 집행위원장에게서 마을의 역사를 들었다. 그는 주민운동 강사이기도 하다.
현재 ‘대연·우암공동체’에 거주하는 공식 인원은 53세대 130명이다. 공동체가 만들어진 지 오래돼 주민들의 평균 나이가 많아졌다고 했다. 이들은 부산외대 소유의 땅에 무허가건물을 짓고 사는 사람들이다. 87년 민주화운동 이후 집값이며 월세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튀어 오르던 때, 일용직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던 사람들이 손수 움막을 짓고 판잣집을 지어 살고 있었다. 원래는 산림청 소유지였는데 88년에 주민들에게 알리지도 않고 부산외대에 팔아넘긴 것이다. 그러다 1990년 10월, 부산외대가 계고장이나 행정대집행 고지도 없이 강제철거를 시작했다. 철거장면이 뉴스로 보도됐고 언론은 이 곳을 ‘철탑마을’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는 95년도부터 주거권이라는 개념을 듣고 마을 만들기를 시작했다고 했다. 주민들은 교육을 받고, 논의와 활동을 하면서 인권의식이 높아졌다고 했다.
당시에는 마을에 전기도 없고 수도도 없었다. 기관을 찾아가면 무허가 건물이라 전기를 못 넣어준다고 했다. 여러 번 찾아가니 전봇대가 있으면 전기를 넣어주겠다고 했고 그래서 직접 주민들이 버려진 전봇대를 세웠다. 수도국에서도 수도를 못 넣어준다고 했다. 모든 것은 마을주민들의 힘으로 만들어졌다.
“무허가라 전기랑 수도를 못 준다는 건 우리 주민들을 비하하고 폄하하는 것 밖에 안 되잖아요. 너희가 울어봐야 도와줄 사람은 없어, 이렇게 생각하고 아예 배제하는 거죠. 우리는 집이 무허가지 사람이 무허가냐, 사람이 사는데 기본적인 건 해줘야 하지 않느냐고 항의했죠.”
도로포장도 벚나무도 주민들이 다 직접 만들고 심었다. 2000년에 주거대책위를 만들고 2005년에 ‘대연우암공동체’로 이름을 변경했다. 부산 경남에서 유일하게 점유권자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조직이자, 지방정부 지원 없이 주민들 스스로 운영하는 마을 조직이다. 공동체는 그곳에 자조주택을 짓겠다고 부산외대에 1000평을 팔라고 했다고 한다. 2013년 공동체는 자조주택 건립을 위해 씨알주택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자신들이 죽어도 자립적인 공동체가 유지되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공동체는 매월 두 번씩 주민회의를 하고 청소며 초소당번을 돌아가며 맡는다. 버섯이나 와송을 재배하고 고물이나 헌 옷을 모아 판매해서 마을 재정을 만들고 있었다. 그 돈으로 매년 10월이면 외부 손님들과 함께 하는 주민잔치를 한다. 역사를 설명하는 손이헌 씨의 얼굴에 뿌듯함과 당당함이 묻어났다.
이야기를 마친 후 함께 마을 쉼터, 작업장과 초소를 둘러봤다. 마을 곳곳에는 구호현판 외에도 직접 만든 꽃밭과 작업장들이 있었다.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것들. 가난하다고 칙칙하고 아픈 것만은 아니구나 싶었다. 가난의 색깔을 어둡게 만드는 것은 국가권력이구나. 형제복지원에 있던 사람들도 국가의 부랑인 수용 지침이 없었다면 이렇게 자유롭고 자립적으로 살 수 있었을 텐데…….
국가권력이 키운 탐욕이 가득한 서울로 오면서도 피곤하지 않았던 것은 . 짧은 시간이나마 공동체의 빛을 본 덕이 아닐까. ‘대연우암공동체’ 사람들의 밝은 표정이 어른거렸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나왔다. 마음의 힘을 충전한 듯 든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