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거침없는 갱스터 랩으로 미국 사회를 놀라게 한 아이스 큐브는 특별한 만남을 가졌다. 미국공산당에서 활동한 고참 흑인 운동가 앤절라 데이비스와의 대담이었다. 당시 큐브는 전설적인 갱스터 랩 그룹 엔더블유에이를 떠나 정치색을 한층 강화한 솔로 앨범을 발표하며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큐브의 엄마뻘인 데이비스는 1960년대 말부터 전투적인 흑인 급진주의자로 알려져 왔으나 1991년 당시에는 한층 성숙한 운동가이자 교수로 활동하고 있었다. 급진적 흑인 운동의 과거와 현재를 대표한 두 사람은 닮은 구석이 있었다. 주체적인 흑인 여성의 상징으로 공처럼 부푼 ‘아프로’ 머리 모양을 선택했던 데이비스처럼, 큐브도 멋을 부려 늘어뜨린 자신의 ‘제리 컬’ 머리를 자르고 흑인다운 모습으로 돌아간 인물이었다.
하지만 대담이 진행될수록 차이가 드러났다. 데이비스는 큐브에게 흑인 여성을 배제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고, 큐브는 “우리가 강해지지 않으면 흑인 여성이 흑인 남성을 존경하지 않을 것”이라며 “평등하게 서로를 바라본다면 분열되고 말 것”이라고 대답했다. 여성, 아메리카 원주민, 아시아인, 아프리카인 등과의 연대를 강조하는 데이비스의 주장은 큐브가 보기에는 별 득이 없는 인종 통합적인 주장에 불과했다. 흑인 민족주의 종교인 이슬람민족의 엄격한 가르침에 매료된 젊은 큐브에게 데이비스의 조언은 엄마의 잔소리처럼 들렸다. 그러나 이 노련한 운동가는 큐브가 아직 보지 못하는 것들을 지적했고, 그것은 젊은 날의 데이비스 자신이 보지 못한 것들이기도 했다.
앤절라 데이비스는 1944년 앨라배마 주 버밍햄 시에서 태어났다. 그곳은 여전히 강한 인종 격리 관습이 지배적인 가운데, 시민권 운동가들과 KKK단원들이 옛 질서의 유지 여부를 두고 열성적으로 다투게 될 곳이었다. 남부의 인종 차별적 관습을 겪으며 성장한 그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사회주의에 대한 지식을 접하기 시작했다. 대학 시절 파리에서 세계 각지의 학생들을 만나며 정치적으로 각성해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이후 그는 독일의 철학자 헤르베르트 마르쿠제의 제자로 서독과 미국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동독의 훔볼트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자연스럽게 1960년대 후반의 급진적 운동들에 몸을 실었다. 평등을 요구하는 시민권 운동뿐 아니라 전투적인 흑인 운동인 블랙 파워의 대의에도 공감했다. 그러면서 학생비폭력실천위원회(SNCC)와 블랙팬서당의 활동에 가담했고, 1968년에는 미국공산당에도 가입했다.
그러나 곧 시련이 닥쳤다. 1969년 데이비스가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조교수로 채용되자 훗날 대통령이 된 캘리포니아 주지사 로널드 레이건이 나서 공산당원이라는 이유로 그를 해임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1970년 당시 신변의 위협을 느끼던 데이비스는 무장한 경호원을 대동하고 다녔는데, 이 경호원은 얼마 후 한 법정에서 자신의 형을 포함한 재소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인질극을 벌였다. 네 명의 총격 사망자가 발생한 이 사건에서 데이비스가 구매한 총기도 사용됐다. 급진적인 흑인 운동을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탄압했던 미연방수사국(FBI) 국장 에드가 후버는 데이비스를 10대 지명수배자 명단에 올렸고, 대통령 닉슨은 데이비스를 ‘위험한 테러리스트’라고 비난했다. 체포 후 수감된 데이비스의 재판은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는데, 존 레논과 롤링 스톤즈 같은 음악인들이 그를 위한 곡을 발표하기도 했다. 데이비스는 체포된 지 18개월 후 무죄 판결을 받았다.
데이비스는 1960년대의 급진 운동가로만 남지는 않았다. 그는 공산주의자이자 페미니스트로서, 학자이자 운동가로서 끊임없이 자신의 활동을 발전시켰다. 1970년대에 그는 쿠바, 소련, 동독 등을 방문하며 사회주의적 반인종주의 활동을 이어나갔고, 1979년에는 모스크바에서 레닌 평화상을 수상했다. 1980년과 1984년에는 미국공산당의 부통령 후보로 대선에 출마하기도 했다. 감옥 폐지 운동 역시 데이비스의 오랜 관심사였다. 그는 미국에 더 많은 사람을 가둘수록 이익을 보는 ‘감옥산업복합체’가 존재하며, 빈민과 소수인종이 이 팽창하는 교정 산업의 희생자라고 지적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현재의 교정시설을 개혁할 것이 아니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또한 그는 여성을 주변화하는 흑인 운동에 문제를 제기했고, 인종차별주의로 빠져드는 백인 여성 위주의 페미니즘 대신 흑인 페미니즘이라는 새로운 전통을 만드는 데 앞장섰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1995년 이슬람민족의 지도자 루이스 패러칸이 주도한 집회인 백만인 행진이 여성을 배제한다는 이유로 비판했고, 2017년 반여성적 인물로 여겨진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취임식 다음 날 열린 워싱턴 여성행진에 적극 참가했다. 그는 커밍아웃한 레즈비언이기도 하다.
데이비스는 여성비하 같은 힙합의 부정적 모습에 대단히 비판적이지만, 한편으로 힙합 음악인들이 문화정치 역에서 벌이고 있는 싸움의 가치를 인정했다. 힙합 음악인들은 단순히 ‘아프로’ 머리 모양의 상징으로 그를 인용하기도 하지만, 음악과 사회의 관계를 고민하는 진지한 래퍼들에게 이 여성 급진주의자는 흘러간 패션 상징 그 이상을 의미했다. 데이비스는 나스에게 “정신에 아무 칼로리도 주지 않는” 지방 낀 랩을 듣는 대신 읽어야 할 책의 저자이고(<Stay Chisel>), 퍼블릭 에너미에게는 “우표에 나오지 않는 내 영웅들” 중 한 사람이다(<Most of My Heroes Still…>). 2012년 데이비스의 재판을 다룬 다큐멘터리 <앤절라와 모든 정치범을 석방하라>가 발표되자 윌 스미스와 제이지 같은 유명 래퍼들이 홍보에 동참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데이비스를 기념한 최고의 힙합 음악은 아마 대단한 실력파 여성 래퍼 라 디가가 2014년 발표한 <Angela Davis>일 것이다. 이 곡에서 라 디가는 저항의 지도자인 데이비스로 변신해 외친다. “난 앤절라 데이비스. 엉덩이를 흔드는 사람이 아니야. 민중에게 권력을 주라고 외치며 총을 흔들지.” 라 디가는 이 곡에서 급진적이고 주체적인 여성 래퍼로서의 자부심을 멋지게 표현해냈다.
아이스 큐브가 데이비스와의 대담 후 발매한 앨범에는 재미 한국인에 대한 공격적 가사로 논란을 빚은 <Black Korea>가 실려 있다. 대담 이후 데이비스는 자신이 이 곡을 미리 들었더라면 문화를 넘나드는 협력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리고 어느덧 중년의 나이가 된 아이스 큐브는 얼마 전 한국을 찾아 그 곡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그는 그 곡이 실패한 곡이며 “아시아인을 모욕하지 않는 다른 방식을 택할 수도 있었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또한 자신의 옛 작품들에 대해 “한때 젊고 감정이 앞서 잘못된 노래를 만들었다”며 한국인과 여성을 비하한 몇몇 곡들을 수정하거나 무르고 싶다고 덧붙다. 큐브가 조금은 데이비스에게 가까워진 것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