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주(역사연구자)
“미안 아메리카, 난 너의 병사가 되지 않을 거야.” 지난 1월 내한공연을 가진 랩 스타 조이 배드애즈가 2017년 발표한 곡 ‘랜드 오브 더 프리’의 가사다. 그가 군인이 될 수 없는 이유는 오늘날의 미국이 “오바마로는 충분하지 않은” KKK의 나라(AmeriKKKa)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 구절로 미국 흑인들이 오랫동안 품어 온 군대에 대한 문제의식을 다시 끄집어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전쟁 참여에 대한 입장은 ‘싸울 권리를 위한 싸움’ 대 ‘백인의 전쟁’이라는 두 표현으로 요약된다. 많은 흑인들이 군에 입대해 애국심을 증명하고 평등한 권리를 요구하고자 했다. 그러나 전후에도 흑인의 처지는 그리 나아지지 않았고, 이를 본 다른 흑인들은 전쟁이 자신과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전설적인 헤비급 복싱 챔피언 조 루이스는 나치 독일의 막스 슈멜링을 링 위에서 때려눕혔을 뿐 아니라 육군에 입대해 애국자의 상징이 되었지만, 또 다른 전설 무하마드 알리는 챔피언에 오른 후 이슬람 민족의 일원으로서 입대를 거부해 수년간 링에 오르지 못했다.
어떤 흑인 지도자도 전쟁과 입대에 대한 이 딜레마를 피해갈 수 없었다. 이들은 때에 따라서 미국의 전쟁에 협력하기도 했지만 최소한 한 번 씩은 불이익과 위험을 무릅쓰고 저항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흑인 노조를 이끈 A. 필립 랜돌프는 사회주의자로서 1차 세계대전에 반대했고 2차 대전 시기에는 군대의 인종 격리 폐지를 위한 워싱턴 행진을 조직했다. 그와 함께 1941년과 1963년 두 차례 행진을 조직한 바이어드 러스틴은 퀘이커 교도이자 한때 공산당원이었으며 동성애자이기도 했는데, 2차 대전 시기에 평화주의자로서 징병을 거부해 옥살이를 했다. 흑인 민족주의자 마커스 가비는 영국 시민권자로서 징병을 피해갔지만 그의 추종자들은 2차 대전 시기에 일본을 옹호하며 징병에 반대해 체포당했고, 일라이자 무하마드를 포함한 이슬람 민족 단원들도 같은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가수 폴 로브슨과 노학자 두보이스는 미국의 한국 전쟁 개입을 비판해 1950년대 내내 여권이 말소된 채 법정 다툼을 벌여야 했다. 2차 대전 시기 정신장애인 흉내를 내 병역을 면제받은 맬컴 엑스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지자 옥중에서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공산주의자로서 미국의 개입에 반대한다는 주장을 펼친 결과 FBI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청년들에게 병역 거부를 권유하며 베트남전 반대 운동을 시작한 마틴 루터 킹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살해당했고, 한 발 더 나아간 블랙팬더당의 엘드리지 클리버는 북베트남을 방문해 흑인 병사들에게 미국 정부가 아니라 자신들의 해방을 위해 싸우자고 설득했다.
훗날 전설이 될 1940년대의 젊은 흑인 뮤지션들도 군대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했다. 블루스 기타리스트 비비 킹은 목화밭에서 일하며 징병 유예 판정을 받았고, 블루스 피아니스트 에디 보이드는 급료가 적어 남들이 가지 않는 방위산업체를 찾아다닌 끝에 취업에 성공했다. 비밥 재즈를 발전시킨 디지 길레스피가 정신장애인 흉내를 낸 끝에 면제 판정을 받은 한편, 그와 함께 재즈를 혁신한 찰리 파커는 헤로인 사용 사실이 드러나면서 손쉽게 면제 판정을 받았다. 재즈 작곡가 지미 데이비스는 군 내 인종 격리에 항의하며 입대를 거부해 수감되었고 감옥 생활로 심신이 약해진 이후 마지못해 입대했다. 블루스의 거장 윌리 딕슨도 비슷한 이유로 양심적 병역 거부를 주장했으나 5년형을 선고받았고, 10개월간 옥살이를 한 후에야 풀려났다.
“이라크는 날 검둥이라고 부른 적 없어”
미군이 모병제로 전환한 이후 발전한 힙합은 군대보다는 주로 경찰을 적대시해 왔지만 정치적으로 각성한 래퍼들은 현실의 군대와 전쟁에 대한 비판을 놓치지 않았다. 퍼블릭 에너미가 1989년 발표한 곡 ‘블랙 스틸 인 더 아워 오브 케이오스’의 주인공은 병역 대상으로 등록하라는 정부의 통지서를 받고는 흑인을 신경쓰지 않는 나라의 군인이 될 수 없다고 결심해 감옥에 갇힌다. 퍼블릭 에너미의 래퍼 척 디는 베트남 전쟁 당시 삼촌이 징병 통지서를 받아들고 낙심하는 것을 본 후 자신이 전쟁 참여를 거부해 수감된다면 탈옥이 정당하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이 곡의 가사는 다른 뮤지션들에게 널리 인용되었는데, 언제나 날카로운 래퍼 탈립 콸리도 2012년 이 가사를 인용해 알카에다를 뒤쫓는 일은 오늘날의 십자군 전쟁이며 자신은 결코 국가를 위해 싸우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퍼블릭 에너미와 함께 정치적 힙합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래퍼 패리스는 1992년 발표한 ‘부시 킬러’에서 베트남 전쟁 시기의 반전 구호를 인용한 “이라크는 날 검둥이라고 부른 적 없어”라는 가사로 걸프 전쟁에 대한 반대 입장을 밝혔다. 2003년 이라크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AWOL(탈영)’이라는 곡을 발표하고 이번 전쟁에 가장 많은 영향을 받는 세대가 소위 힙합 제너레이션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이 곡에서는 힙합 음악을 즐겨 듣는 가난한 흑인 청년이 더 많은 기회와 보상을 제공한다는 모병관의 말에 넘어가 입대를 결심하고, 군대에서의 생활과 전쟁을 거치면서 그것들이 모두 거짓말이었다는 점을 깨닫는다.
한국 전쟁에 참전한 흑인 병사 소니 카슨은 대치하던 인민군으로부터 “너는 왜 미시시피에서 같은 음수대로 물도 못 마시게 하는 나라를 위해 싸우려 하지?”라는 말을 들었다. 이 질문을 떨쳐내지 못한 그는 전역 후 열성적인 지역 활동가로 거듭났다. 흑인 민족주의자이자 힙합 그룹 엑스 클랜의 멤버 프로페서 엑스의 아버지이기도 한 그는 1990년 뉴욕의 한국인 상점을 대상으로 한 불매운동을 주도하게 되는데, 일 년간 지속된 운동에서 흑인들은 ‘코리안 고 홈’이라는 구호를 외쳤다. 한국의 사회운동에서 ‘양키 고 홈’이라는 구호가 여전히 힘을 가지던 때였다.[워커스 4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