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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로브슨(1898-1976)

혁명가였던 예술가
2017년 11월 20일Leave a comment36호, 힙합과 급진주의By 박형주

폴 로브슨이 1942년 9월 미국 캘리포니아 오클랜드 조선소 노동자들과 함께 노래하고 있다. [출처] 미상

박형주(역사연구자)


[필자 주]힙합은 시민권 운동과 블랙 파워 운동이 퇴조하기 시작한 1970년대 중반 뉴욕에서 탄생했다. 이 연재는 미국의 힙합 뮤지션들이 자신들의 음악에서 표현한 정치적 급진주의의 유산을 살펴본다.

미국의 힙합 그룹 퍼블릭 에너미의 2012년 앨범 속지에는 이례적으로 ‘영감’ 제공자의 이름이 표기되어 있다. 해리 벨라폰테와 폴 로브슨이 그 주인공들이다. 벨라폰테는 ‘칼립소의 제왕’으로 불리는 가수이자 배우이며, 시민권 운동 시기부터 오늘날까지 꾸준히 급진적인 주장을 펼치는 활동가로 유명하다. 로브슨은 조금 더 옛 인물이다. 1976년 사망한 미국의 흑인 가수이자 배우인 로브슨이 힙합 역사상 가장 정치적인 그룹에 어떻게 영감을 준 것일까?

퍼블릭 에너미의 리더 척 디는 한 인터뷰에서 로브슨과 자신들의 연결고리를 설명했다. “폴 로브슨이 벨라폰테에게, 벨라폰테가 밥 딜런과 커티스 메이필드에게, 그들이 우리에게 영감을 주었지.” 퍼블릭 에너미는 1989년 이미 자신들의 대표곡인 ‘파이트 더 파워’의 뮤직비디오에서 로브슨의 사진을 든 시민들이 행진하는 장면을 여러 곳에 삽입한 바 있다. 2013년 척 디는 공동체 문제에 적극 참여하는 학자와 예술가에게 주어지는 폴 로브슨 상을 받기도 했다. 러시아혁명 100주년을 맞은 지금, ‘검은 스탈린’으로 미국에서 비난받으면서도 웨일즈 광산 노동자들과 남아프리카 민중에게 사랑받은 한 국제주의자의 삶을 떠올려 본다.

폴 로브슨은 마틴 루터 킹과 맬컴 엑스 이전에 세계에서 가장 유명했던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98년생인 그는 전미 대학 미식축구 올스타 팀에 2회 선정된 촉망받는 체육인이었고, NFL에서 15경기를 출장하면서 컬럼비아대 로스쿨을 졸업한 변호사이기도 했다. 그러나 흑인 변호사를 꺼리는 분위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또다른 재능인 노래와 연기로 진로를 바꾸었다. 1920년대 중반부터 그는 흑인 영가를 탁월하게 소화하는 저음의 콘서트 가수이자 영화와 연극, 뮤지컬 분야에서 ‘쇼보트’와 ‘오셀로’ 등의 작품을 성공시킨 배우로 미국과 유럽에서 큰 인기를 구가했다.

193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거리낌 없는 정치적 활동이 로브슨을 더욱 유명하게 만들었다. 그는 급변하는 유럽의 정치상황을 몸소 겪으며 제국주의와 파시즘에 반대하는 사회주의적 국제주의자로 거듭났다. 흑인 예술가로서 나치 독일에서는 냉대를 겪은 반면, 소련에서는 열렬히 환영받은 경험이 그의 정치적 각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소련에서 그는 “여기서 나는 생애 처음으로 흑인이 아닌 한 인간으로 존재합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완전히 느끼며 걷고 있습니다”라는 느낌을 표현했다. 이후 그는 스페인 내전 현장에서 공화파를 위해 투쟁의 노래를 불렀고, 훗날 중국 국가가 되는 ‘의용군행진곡’을 중국어로 부르며 중국의 항일 전쟁을 지원했다. 2차 대전 시기 그는 미국에서 반파시즘 전쟁을 지원하는 곡들을 발표하는 한편, 인종 분리 객석에서 공연하지 않는 원칙을 고집하면서도 공연을 성공시키며 절정의 인기와 존경을 누렸다.

냉전이 시작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전시에 문제되지 않았던 친소련 입장은 이제 FBI의 사찰 근거가 되었다. 대통령 트루먼은 자신의 면전에서 린치 금지 입법을 요구하는 로브슨에게 분노를 표출했으며, 대규모 군중이 그를 살해하기 위해 공연장을 습격했다. 미국 정부는 세계적인 유명인사인 로브슨이 유럽에서 통렬하게 미국의 대외정책을 비판하는 것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고 몇 주 지나지 않아 미국 정부는 미국의 전쟁 개입을 비판하는 로브슨의 여권을 말소했고, 대학 시절의 미식축구 기록마저 삭제되었다.

블랙리스트에 올라 주된 공격 대상이 된 와중에도 로브슨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출국이 금지된 상황에서 그의 노래는 전화선을 타고 유럽의 공연장을 채운 청중들에게 전달됐고, 캐나다 관객들이 들을 수 있도록 미국 국경에서 공연이 열렸다. 칠레의 네루다와 인도의 네루가 그를 지지했고, 남아프리카에서는 만델라를 포함한 대중들이 그의 노래를 부르며 행진했다. 1958년 여권이 재발급되고 그는 국내외에서 다시 지지와 존경을 회복했지만, 신념을 포기하지 않은 대가로 직업과 재산, 건강을 희생해야만 했다. 그 결과 시민권 운동이 본격화된 1960년대에는 건강이 극도로 악화돼 대중 앞에 나설 수 없었고, 해리 벨라폰테와 마틴 루터 킹, 맬컴 엑스가 로브슨의 역할을 대신했다.

로브슨의 유산이 힙합계에서 가장 지적이고 의식있는 뮤지션들에게서 발견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시카고 출신의 랩스타들인 커먼과 루페 피아스코가 대표적이다. 커먼은 척 디에 앞서 힙합 뮤지션으로서는 처음으로 로브슨 상을 수상했다. 커먼이 존경받는 작가이자 시민권 운동의 투사였던 마야 앤절루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나눈 대화의 주제도 로브슨이었다. 루페 피아스코는 2012년 힙합계에 만연한 여성혐오를 비판하고 ‘비치’단어의 사용 자제를 촉구하는 곡인 ‘비치 배드’를 발표해 많은 논쟁을 일으켰는데, 이 곡의 뮤직비디오는 미국에서 굴욕적인 시대를 견뎌 온 흑인 배우들을 대표해 로브슨에게 헌정되었다. 스포큰워드 아티스트이자 랩퍼로 영화 ‘슬램’의 주인공이기도 한 사울 윌리엄스 역시 로브슨의 이름을 딴 곡을 발표하거나 가사에서 로브슨을 인용하면서 존경심을 나타냈다.

정부가 정보기관을 동원해 블랙리스트에 오른 예술가를 사찰하고 방해 공작을 펼친 시대에 로브슨은 자신이 누려 온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결함을 지켰다. 또다른 블랙리스트의 시대를 겪은 지금 그의 묘비에 새겨진 문장은 여전히 깊은 울림을 준다. “예술가는 자유냐 노예냐를 다투는 싸움에서 편을 정해야만 한다. 나는 선택했고, 다른 길은 없었다.”[워커스 3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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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주
parkhyungjoo@workers.com

역사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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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 2017년 11월 20일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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